프랑켄슈타인 | 메리 셸리 | 괴물의 탈을 쓴 사람, 사람의 탈을 쓴 괴물
이것이 무슨 뜻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디서 왔나?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이런 질문들이 끝없이 떠올랐지만, 이런 질문에 답할 수가 없었어. (『프랑켄슈타인』, 149쪽)
프랑켄슈타인을 상상하라고 하면 각진 얼굴, 꿰맨 자국이 힘줄처럼 도드라진 이마의 흉터,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과학과 기계 시대를 상징하듯 관자놀이에 박힌 나사못이다. 여기에 덩치는 산처럼 크고 행동은 좀비처럼 부자연스럽고 굼뜨다. 그런데 이것은 원작을 영화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보태진 상상력이 낳은 산물이지 실제 원작에 등장하는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은 아니다.
네이버 영화에서 ‘프랑켄슈타인’으로 검색하면 59건이 검색될 정도로 프랑켄슈타인은 원작 소설보다 영화로 더 유명해졌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영향력은 가히 막강하여 이 작품의 옮긴이조차 작품해설에서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나사못’으로 ‘괴물(소설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의 생김새를 표현할 정도이다. 저자는 이 ‘괴물’의 생김새를 거구의 매우 흉측한 외모를 가진 인물 정도로 표현했지 이렇다 할 세밀한 부연 묘사는 (훗날 자신의 작품을 영화로 각색할 사람들의 일거리를 위해 남겨둘 작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감히 생략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영화의 영향력 때문인지 아무튼 작품을 읽는 독자는 ‘괴물’의 외모에 대한 조금은 부족한 묘사를 자신이 본 영화 속에 등장했던 괴물의 생김새에서 보충함으로써 완전한 형태를 가진 ‘괴물’의 형상을 머릿속에 완성할 수 있다.
<André Koehne / CC BY-SA> |
필자는 이 작품을 읽으며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한 1994년도 작품과 매우 매끄럽게 연결지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본 ‘프랑켄슈타인’ 관련 영화 중에서 가장 원작에 충실한 작품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괴물을 연기한 로버트 드니로의 연기가 원작에 등장하는 괴물의 고뇌를 잘 담아냈기 때문이다.
원작을 읽지 않은, 즉 영화로만 프랑켄슈타인을 접했던 독자라면 ‘괴물의 고뇌’라는 말이 당황스럽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대부분은 원작 속의 ‘괴물’을 공포 영화의 주인공다운 진짜 괴물로만 그려내려고 온갖 짓을 다 했기 때문에 이런 난폭하고 흉측한 괴물이 사람처럼 고뇌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작의 ‘괴물’은 비록 외모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지만, 그의 마음은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깨끗하다. 그는 독학으로 지식을 습득하면서 사람보다 더 사람답게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에 침잠하며 고뇌의 고뇌를 거듭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은 원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선호하는 선량하고 온화한 성품을 가졌지만,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친절하고 난폭한 사람들 때문에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괴물처럼 흥분하는 빅터에게 현자처럼 차분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과 어울리는 또 다른 ‘괴물’ 여자를 만들어주면 둘이 인간 세계를 영원히 떠나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빅터를 설득시키는 데 성공할 정도로 충분히 지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러나 빅터는 ‘괴물’의 말을 끝내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와 약속한 ‘괴물’ 여자도 만들다가 다시 부숴버린다. 이에 분노한 ‘괴물’은 빅터가 사랑하는 존재들을 파괴함으로써 피의 복수를 강행한다. 태어나자마자 단지 외모가 흉측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과 창조자인 빅터에게조차 버림받은 그는 나름의 선행을 하면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어하지만 끝내 단 한 번의 기회도 얻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정당한 분노에 독자는 십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비록 살인은 악이지만, 복수를 강행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그의 번뇌에 동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선과 악을 판단할 줄 알며 보통 사람처럼 선과 악의 경계에서 갈등을 겪기도 하고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기도 한다. 심지어 보통의 사람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존재론적이고 근원적인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괴물이라 부르며 혐오스러워하는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며, 그에게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고 단지 외모가 흉측하다는 이유만으로 몽둥이를 휘두르는 사람들이 더 괴물 같다. 양심이 고갈된 시대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괴물을 보면 왠지 모르게 우리 자신이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페미니즘, 과학과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신뢰와 인간의 오만, 성선설에 바탕을 둔 양육의 중요성, 지식의 양면성, 괴기소설 등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다양한 읽기가 가능하다. 다양한 읽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읽히는 고전 명작으로 남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작품과 함께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한 영화도 같이 본다면 원작과 영화의 부족한 부분들이 찰떡궁합처럼 상호보완적으로 매우 훌륭하게 메워질 것이다. 이로써 안갯속에 잠겨 있던 흐릿한 ‘괴물’의 형상은 뿌연 안개가 걷히면서 독자의 가슴과 머릿속에 확실한 존재감을 남길 선명한 캐릭터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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