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 이광수 | 사랑의 번뇌가 싹 틔운 근대적 자아
1917년 1월부터 6월까지, 126회에 걸쳐 <매일신보> 에 연재된 이광수의 『무정』은 경성학교 영어교사 이형식이 부잣집 딸 김선형과 옛 은사의 딸 박영채 사이의 삼각관계 속에서 번민하는 구시대적 가치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자아의식의 성장을 이루어가는 이형식의 성찰에 자주적 계몽을 통한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는 저자의 염원을 투영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이다. 그런 고로 유교적인 결혼 관습의 폐단을 청산하기 위해 자유연애를 옹호하고 있다.
이형식은 재산과 명성을 가진 김장로의 딸 선형과 고아인 자신을 보살펴주고 가르쳐준 박진사의 딸 영채 사이에서 고민한다. 선형을 선택하면 미국 유학과 함께 출세가 보장될 것이지만, 옛 은사와 은근한 언약까지 있었던 영채를 버리는 것은 보은의 도리와 은사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것이다. 영채는 오직 형식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았다는 뜻을 은연중에 비치지만 영채와 함께 자라 정도 어느 정도 들은 형식이 영채를 섣불리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영채가 기생 계월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을 구하고자 옛글에 나오던 열녀를 본받아 기생이 된 영채지만, 형식은 영채가 정조를 잃지 않고 어찌 7년 동안이나 기생 노릇을 할 수 있었는가, 하고 의심을 하며 부유한 양반댁에서 곱게 자란 선형을 떠올린다.
형식이 선형과 영채를 두고 출세와 의리 사이에서 번민하는 모습은 나쓰메 소세키가 1907년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우미인초(윤혜영 옮김, 궁미디어)』의 주인공 오노를 떠오르게 한다.
고아이며 가난한 오노는 고도선생의 은혜를 받아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를 우등생으로 졸업해 천황에게 은시계까지 하사받은 장래가 촉망되는 스물일곱 살의 젊은이다. 오노는 도쿄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결혼 상대로는 교토에 있는 고도선생의 딸인 사요코가 아니라 자신의 장래를 위해 재력가이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후지오를 선택하기로 하지만, 오노는 친구 무네치카의 설득에 감흥을 받아 은사에게 받은 은혜를 갚는 ‘의무’를 실천하기 위한 도덕적인 삶을 선택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인에게 가장 큰 모욕인 ‘의리도 모르는 놈’이라는 비난을 듣기 때문이다.
<이광수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김동환 / 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
루스 베네딕트는 자신의 저서 『국화와 칼(김윤식, 오인석 옮김, 을유문화사)』에서 “기리(義理)를 고려하지 않으면 일본인의 행동방침을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일본인에게 의리와 의무는 특별하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우미인초』를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무정』에서 형식은 『우미인초』의 주인공 오노처럼 은사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의무를 지켜야 한다는 중압감과 더불어 ‘처녀’, 즉 영채가 미래의 남편에 대한 의무로서 정절을 지켰는지에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스스로 깬 사람, 개화된 문명인으로 자처하면서도 아내를 선택함에는 구시대적 가치관을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모순을 지닌, 아직 근대적 가치관을 확립하지 못해 구식과 신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형식은 스스로 만든 번뇌의 올가미 속으로 죄어들어간다. 영채 역시 형식을 아버지가 어렸을 적에 짝을 지어준 사람으로 자신이 응당 섬겨야 할 사람으로만 여겼지 형식을 사랑하는지는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영채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버지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로 결정된 미래의 혼약을 거절하지 못하는 유교적인 효(孝)의 의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채가 청량사에서 강간을 당하고 자살을 하러 간다는 유서를 남기고 평양으로 떠나자, 형식의 친구 우선이 영채의 자살을 두고 가장 좋은 행위라고 판단하는 것과는 달리, 형식은 영채가 비록 효(孝)와 정(貞)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지만, 그 두 의무는 영채가 가진 전체 의무, 즉 충(忠)이나 세계, 동물, 산천, 성신 등에 대한 의무 중에 일부분에 불과하므로 생명을 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살을 다짐한 영채가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동경 유학생 김병욱 역시 영채가 죽는 것은 조상, 동포, 자손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고 죽는 것이므로 죄라고 설득한다.
형식과 영채를 이어주는 매듭에는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이 우선시되지 못하고 보수적인 유교 문화에서 출발한 ‘이유를 불문하고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의 관습이 남아 영향을 미치듯, 부모의 일방적인 명령에 의해 남편을 맞게 된 선형에게 형식은 마땅히 아내로서 남편을 섬겨야 할 의무의 대상이었지 사랑이라는 감정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것은 아내가 되었으니까 지아비를 사랑하는 것이지 사랑하니까 아내가 된 것이 아니다.
선형의 아버지 김장로는 형식과 기생 계월향과의 소문을 들은 날부터 형식을 못마땅해하며 딸을 형식에 준 것을 후회하지만 한 번 약속한 것을 체면상 깨트릴 수도 없고, 훗날 일이 잘되건 못 되건 그것은 선형의 팔자로 돌려버린다. 루브 베네딕트는 앞의 책에서 체면을 중시하는 일본인을 가리켜 자신의 이름에 대한 의리, 즉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하는 의무라고 말한 바 있다. 아마도 김장로에게 파혼은 자신의 이름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것이리라.
부부 사이의 애정보다는 ‘이유를 불문하고 마땅히’ 아내로서, 또는 남편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만을 내세웠던 유교적 결혼 관습의 부작용은 『무정』 곳곳에 등장한다. 형식의 친구 신우선 부부와 영채를 새 삶으로 인도하는 김병욱의 오빠 김병국 부부가 그러한데, 이들은 그저 자신들의 관계를 운명이나 팔자소관으로 여기며 묵묵히 서로의 할 일만 하며 하릴없이 살아간다. 그들의 하루하루는 무미건조하며 소원한 부부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줄 수 있는 자녀의 생산과 양육은 소위 말하는 ‘애정의 산물’이 아니라 가문을 이어가야 한다는 ‘의무’의 결과이다. 이렇게 겨우겨우 위태로운 부부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이들을 두고 작품의 화자는 “조선의 흉악한 혼인제도는 수백 년래 사랑의 가슴속에 하늘에서 받아 가지고 온 사랑의 씨를 다 말려 죽이고 말았다.”라고 비난한다. 이것은 이광수 자신이 중매로 결혼하여 애정 없는 결혼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비참한지를 체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자신을 조선 최고의 문명인이라고 자만했던 형식이 자신의 부족함과 오만함을 뉘우치는 자각의 과정에서 엿볼 수 있다. 형식이 선형을 사랑했다면 그것은 외모의 사랑이다.
외모의 사랑은 옅다. 그러므로 얼른 식는다. 정신적 사랑은 깊다. 그러므로 오래간다. 그러나 외모만 사랑하는 사랑은 동물의 사랑이요, 정신만 사랑하는 사랑은 귀신의 사랑이다. 육체와 정신이 한데 합한 사랑이라야 마치 우주와 같이 넓고, 바다와 같이 깊고, 봄날과 같이 조화가 무궁한 사랑이 된다. (『무정』, 중에서)
또한, 형식은 그동안 선형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너무 유치하고 근거나 내용이 빈약했음을 깨닫고 동시에 자신의 정신 발달한 정도가 아직도 유치함을 깨닫는다. 이런 자신은 인생을 논할 때도 아니므로 사랑을 논할 때도 아니다. 더불어 오늘날까지 학생에게 문명을 가르치고, 인생을 가르친 것은 극히 외람된 일이었음을 느끼며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더구나 형식은 아직 ‘나’를 모른다. 내가 세상에 처하여 갈 인생관이 없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좋은 것을 좋다고 할 만한 무슨 표준이 없다. 형식의 이와 같은 자각은 자기 철학, 자신의 신념이 없이 주변에 휩쓸려 자본의 꼭두각시로 살아가는 현대인도 한 번쯤 되새겨 볼 만한 화제다.
이렇게 근대적 자아의 눈을 뜬 형식의 조선 근대화는 조선의 과거부터 바로 알고자 하는 올바른 역사 안식에서 시작한다.
조선 사람의 품을 이상과, 따라서 교육자의 가질 이상을 확실히 잡았거니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필경은 어린애의 생각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 조선의 과거를 모르고 현재를 모른다. 조선의 과거를 알려면 우선 역사 보는 안식(眼識)을 길러 가지고 조선의 역사를 자세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현재를 알려면 우선 현대의 문명을 이해하고 세계의 대세를 살펴서 사회와 문명을 이해할 만한 안식을 기른 뒤에 조선의 모든 현재 상태를 주밀히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의 나갈 방향을 알려면 그 과거와 현재를 충분히 이해한 뒤에야 할 것이다. 옳다, 내가 지금껏 생각하여 오던 바, 주장하여 오던 바는 모두 다 어린애의 어린 수작이라. (『무정』, 중에서)
춘원 이광수는 작품을 통해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려면 무엇보다 민족이 깨어야 하고 인생을 운명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의지로 헤쳐나가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는 참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러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계몽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계몽주의적인 춘원 이광수의 뚜렷한 의도가 현대인에게는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형식과 영채, 선형의 삼각관계 사이에서 애정 문제로 고민하는 그네들의 의식을 통해 문화의 흐름과 단절, 그리고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소중한 간접 체험이 될 수 있으며 서구화의 겉멋만 든 김장로의 억지스러운 신식 생활은 현대인이 품은 소박한 허영의 원류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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