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인걸전(神探狄仁杰前传) | 무측천 시대, 추리 × 정치 × 역사
역사 + 추리 + 정치, 다채로운 장르 혼합
한국엔 ‘명탐정 적인걸’로 알려진 디렌지에(狄仁傑)는 당나라 측천무후 시대의 명재상이자 중국의 셜록 홈스로 유명한 명판관이다. 그가 역사 속 명재상에서 대중 속 명탐정으로 거듭난 계기는 로베르트 반 훌릭(Robert van Gulik)의 『명판관 디 공 시리즈(A Judge Dee Detective Story)』라는 디런지에(Di Renjie)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 추리소설 시리즈 덕분인데, 이 고전스러운 분위기에 현대적인 추리 요소를 나름 잘 접목한 작품의 한국어판 4권을 모조리 탐독한 나로선 ‘적인걸’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를 걸신들린 듯 찾아 나선 것은 어찌 보면 인지상정이리라.
드라마 감상을 시작하기 전, (또 다른 명판관을 주인공으로 한) ‘포청천’ 시리즈처럼 한 개의 사건을 2~3개의 에피소드로 묶어 마무리 짓는 범죄 • 추리 드라마를 예상했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절반은 (특히 초반은) 추리물이라는 장르적 특성이 두드러지지만, 점차 이야기의 초점은 거대한 권력 다툼으로 확장된다. 즉, 나머지 절반은 역사 • 정치 • 로맨스(후반부)로 이루어진, 전체적으로 보면 여러 장르를 포용한 드라마였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처럼 복선을 회수하고, 적인걸의 세심한 관찰과 물적 단서를 토대로 사건을 추리하는 과정은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미스터리적 냄새를 끈적끈적하게 풍긴다. 고로 추리 요소에 제대로 취하려면 대사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행위에도 집중해야 하는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드라마 「적인걸전(神探狄仁杰前传)」은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그런 드라마는 아니라는 것.
여느 드라마처럼 초반에 두드러졌던 장점이 (이 경우는 추리 요소) 중후반부로 갈수록 옅어지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끝까지 버텨주는 경향이 뚜렷하므로 긴장감 있는 감상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같은 트릭을 여러 번 써먹는 흠이 있긴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치밀한 줄거리와 흥미로운 사건 전개는 그런 흠을 상쇄할 만하다. 정리하면, 역사 • 정치 • 추리 장르를 좋아하는 시청자에게 충분히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권력 다툼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적인걸
명판관 적인걸 역은 푸달롱(富大龙)이 맡았다. 무술에도 취미가 있어서 그런지 푸달롱은 몇 안 되는 무술 장면을 멋지게 소화하는데, 로베르트 반 훌릭에 등장하는 적인걸이 상당한 무술 고수였던 것과는 달리 드라마 적인걸은 무술을 못하는 벼슬아치로 등장한다. 틈틈이 연마한 무술 실력을 뽐낼 기회가 별로 없어서 푸달롱 본인으로선 조금 아쉬웠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표정 연기는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적인걸의 침착함을 잘 표현했다.
이 드라마는 평범한 추리물을 넘어, 당나라 측천무후 시대의 정치적 암투와 권력 다툼,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적절히 버무린 작품이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여러 세력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음모와 대립 속에서 뛰어난 관찰력과 침착한 논리로 공정성을 지켜나가는 적인걸의 지혜로운 처사가 눈에 안 들어올 수가 없다. 실제로 적인걸은 대리시승(大理寺丞, 최고법원 판사)으로 재직할 때 1년 동안 1만 7천 건의 누적 사건을 처리하면서 원성 한마디 안 들었다고 한다. 그는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파벌에 휩싸이지 않고 정의와 정치적 현실을 조화시키려 노력하는 인물로 묘사되는데, 그런 청렴하고 공정한 정치 감각 때문에 실제로도 무측천(武則天)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잔인한 여황제? No, 유능한 통치자, 무측천
40년 이상 중국을 통치한 중국 역사상 유일한 합법적인 여황제 무측천 역은 왕징(王静)이 맡았는데, 중후하면서도 자애로움을 잃지 않는 연기가 인상적이다.
무측천은 ‘야망 있는 황후’, ‘권력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잔인한 여성’ 같은 대중적으로 각인된 음험한 이미지와는 달리 인자하고 현명하면서도 누군가에게 쉽게 휘둘리지 않는 냉정하고 강단 있는 황후/황제로 묘사된다. 그녀가 끝까지 적인걸을 믿고 중용한 것만 봐도 그녀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바보 대통령 곁엔 바보들만 있었듯 유능한 황제 곁엔 반드시 유능한 인재가 있는 법.
드라마에서 유심히 들을 것은 무측천이 자신을 칭하는 단어의 변화다. 무측천은 황태후 시절에 자신을 칭할 땐 본인이 직접 만든 ‘아이즈(曌, 日과 月을 합친 글자로 ’하늘을 밝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음)라는 단어를 사용하다가, 황제로 등극하고서야 진시황(秦始皇) 이후 황제 전용 호칭으로 격상된 ’짐(朕)‘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신하들의 경축 구호도 황태후 시절엔 ’천세천세(千歲千歲) 천천세(千千歲)‘에서 황제로 등극하고 나서야 ’만세만세(萬歲萬歲) 만만세(萬萬歲)‘라는 구호를 사용한다. 별거 아니지만, 호칭의 의미와 호칭의 변화는 그녀의 권력 승격과 정통성 구축에 대한 심리를 잘 드러내는 상징적 장면이다. 그 단순한 변화 속엔 ‘나는 남성 황제들과 다르다‘라는 도전적 정체성, 천명(天)을 빌려 여성 통치자의 정당성을 합리화하려는 계산, 종교적 • 상징적 이미지로 권위를 보완하려는 전략을 엿볼 수 있다.
꽃처럼 피어 악마처럼 시든 여인, 영롱(玲珑)의 몰락史
순박한 시골 처녀 영롱 역은 김용의 무협 드라마 「신조협려(2006)」(소용녀를 연기한 유역비의 청순함이 돋보였던 그 드라마)에서 곽양 역을 맡아 명성을 얻은 양미(杨幂)가 맡았다.
어느 드라마에서나 빼놓지 않고 등장해야만 하는 예쁜 캐릭터, 이것이 영롱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태자’를 칭호가 아닌 사람의 이름으로 알아들을 정도로 순박한 시골 처녀였던 영롱. 그녀가 태자 이현(李显)과 눈이 맞은 것처럼 보였을 땐 ‘혹시 저러다 버림받고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순진무구했던 그녀는 자신이 손수 키우는 꽃처럼 예쁘고 티 없이 깨끗한 호수 같았다.
첫인상이 그러했으니, 그런 그녀가 사랑과 증오에 눈이 멀어 살인과 복수에 혈안이 된, 그렇게 치를 떨게 하는 악녀로 변해가는 과정은 극적이면서도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소박하고 순수했던 영롱이 악마의 헤살에 걸려든 것처럼 권모술수와 배신의 소용돌이 속에 깊숙이 휘말리면서 뒤틀려가는 모습은 마치 아름답게 피었다가 시들어가는 꽃과도 같았다. 그녀는 순정에 눈이 먼 여인인가? 아니면 냉정한 살인자인가? 직접 보지 않으면 판단하기가 어려우리라.
혼란의 시대에 던지는 적인걸의 정치 철학
이 외에도 역사에서 고종 사후 황제로 즉위했다가 무측천에 의해 55일 만에 폐위당하고, 14년간의 유배 생활을 겪었던 태자 이현은 본의 아니게 권력 투쟁에 휘말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비극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역사엔 무측천의 야망을 실현한 도구이자 무씨 세력 몰락의 시작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록된 무측천의 조카 무승사(武承嗣)는 적인걸 및 태자 이현과 대립하는 권모술수에 능한 음험한 인물로 등장한다. 훗날 신룡정변(神龍政變)으로 무측천을 퇴위시키고 중종(태자 이현)을 복위시키는 장간지(張柬之)와 간간이 등장하는 장군 이다조(李多祚) 역시 실존 인물이다.
‘무측천 세력과 이씨 왕조를 되찾으려는 세력 사이의 권력 다툼’이라는 역사적 배경 위에 이씨 왕조를 말살하려는 무승사 일당, 개인적 복수에 눈이 먼 영롱 일당, 무씨 세력을 몰아내려는 이현을 지지하는 일당, 갖은 중상모략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암투의 중심에서 진실을 밝히려 고군분투하는 적인걸 일당 등 이렇게 네 패거리가 서로 물고 물리는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히고설킨 권력 다툼의 비중이 후반부로 갈수록 커지면서 드라마는 한층 더 뜨거운 스릴을 선사한다(반면에 추리 요소의 비중은 줄어들고 살벌한 분위기를 와해하려는지 로맨스 요소가 살짝 더해진다).
눈여겨 볼 것은 적인걸의 역할이다. 여러 세력 간의 지칠 줄 모르는 대립 사이에서 법치와 인정의 균형을 유지하며 어떻게든 백성의 안위를 지키려고 고군분투하는 그는 미스터리한 추리적 요소와 전율 가득한 정치적 요소를 연결하는 훌륭한 가교이자 단순한 '명탐정'의 역할을 넘어 혼란스러운 시대의 정치적 암투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정의의 상징이자 양심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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