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춤 | 에드워드 홀 | 무언의 리듬에 맞추어 무형의 춤을 추며 살아가는 인류
한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일은 다른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타당성을 인식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생명의 춤』, 276쪽)
자연이 지휘하는 ‘생명의 춤(The Dance of Life)’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은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 세계를 바라본다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가 보는 세계는 우리가 창조한 것이며,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기층문화의 리듬과 우리의 리듬이 알게 모르게 일치하는 부분이 많기에 우리는 이 세계가 편안하고 친숙하게 느껴진다는 뜻도 담겨 있다. 그것은 내 기분과 상황, 분위기에 맞는 적절한 빠르기와 리듬의 음악을 들었을 때에 느껴지는 편안함 같은 것이다. 리듬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반복되는 움직임이며 사람의 생체리듬을 비롯한 계절의 순환,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등 자연의 모든 법칙과 생명체에는 각자 나름의 일정한 리듬이 내재해 있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 속의 리듬이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순환될 때 생태계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즉, 자연은 안무를 지휘하고 관장하는 안무가이자 스스로 다양한 리듬을 발산하는 연주가다 . 만약 어느 생명체가 자연이 지휘하는 ‘생명의 춤(The Dance of Life)’에 호흡을 척척 맞출 수 있다면 그 생명체는 살아남을 것이며, 만약 그렇지 못하고 엇박자로 나가며 어색한 춤을 춘다면 그 생명체는 곧 진화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태될 것이다.
<리듬은 문화 속 무형의 언어 중 하나> |
무언의 리듬에 맞추어 무형의 춤을 추며 살아가는 인류
사람의 문화라고 예외는 아니다. 사람은 자연이 지휘하는 리듬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다. 어쩌면 인류가 문화적 동물로 진화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고 포근하면서도 때론 잔인하도록 격렬한 ‘생명의 춤(The Dance of Life)’과 호흡을 잘 맞췄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인류가 창조한 문화 역시 제각기 고유한 비트 • 템포 • 리듬을 지닌 나름의 방식으로 안무되어 있다. 사람은 자신만의 생체리듬과 기층문화의 리듬이 가장 잘 합치될 때 안정감과 편안함, 만족감을 느끼며 그렇지 못할 때, 즉 자신의 생체리듬이 깨지고 기층문화에 적응하지 못할 때 사람은 긴장감, 소외감,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 사람이 숲 속에서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는 것은 결코 재촉하는 법이 없는 자연의 느긋한 리듬이 사람의 생체리듬과 가장 잘 조화되기 때문일 것이며, 반대로 도시에 사는 사람은 자신의 생체리듬을 숨 가쁘게 돌아가는 사회적 리듬에 합치시켜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받는다.
남자가 막 군대에 입대했을 때, 혹은 시골 같은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번잡한 도시로 상경했을 때, 뭐라 말로 꼭 집어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받는 긴장과 스트레스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지켜오던 생활 리듬이 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 생활에 적응하게 되면 군대에서도 나름의 편안함과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사람의 생체리듬이 불변하는 것은 아니며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변화하여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는 생래적 특성임을 의미한다. 사람에 따라서 제대할 때까지도 군 생활을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여기는 사람도 종종 있듯이 사람의 성격처럼 생체리듬의 생래적 특성 역시 제각각이다. 보통은 자신이 태어난 지역, 사회, 국가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데 그것은 장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한 문화의 리듬에만 노출된 덕분이다. 가장 익숙하고 가장 편안하다는 것은 비록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그 지역, 사회, 국가, 문화의 리듬이 가장 익숙하고 편안하다는 말과 다름없다.
일례로 우리가 일상에서 리듬감을 가장 명확하게 느끼는 것은 합창하거나 춤을 출 때이며(박치나 몸치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때 곁에 있는 사람은 리듬이 한순간에 무너짐을 아주 절실하게 느낀다), 사회생활에서는 누군가와 손발을 맞춰 함께 일을 진행할 때이다(같은 일을 해도 호흡이 잘 맞는 사람하고 일을 할 때는 실타래가 풀리듯 쉽고 자연스럽게 일이 진행되며, 작업이 끝나도 별로 피로하지도 않다. 반면에 호흡이 잘 안 맞는 사람과 일을 하면 평소보다 힘은 더 들지만 일의 진척은 매우 더디다). 재미있는 것은 폴리크노닉한(polychronic) 여자가 모노크로닉한(monochronic) 남성보다 일상에서 리듬감을 더 중요시하고 더 민감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랜 세월 함께 지낸 부부의 아내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서 부부생활의 리듬을 깼을 때 그 미묘한 차이를 감지해낸다. 아내는 남편이 요즘 뭔가 평소와 달라졌다는 의심으로써 부부 생활의 리듬 변화를 자신도 모르게 눈치챈다. 마지막 예로 축구 같은 구기 스포츠는 리듬의 중요성이 팀워크로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2014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 축구가 예전만 못하다 평가를 받는 것도 다름 아닌 ‘삼바 축구’의 리듬이 깨졌기 때문이다.
‘문화의 몰이해’가 불러올 재앙
문화의 속성은 리듬만이 전부가 아니다. 숨겨진 언어로서 기능하는 공간과 시간이 있으며, 앞에서 언급한 리듬은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한 방법일 뿐이다. 또한, 시간 체계는 모노크로닉한 시간과 폴리크로닉한 시간으로 나뉠 수도 있다. 소통이 이루어질 때 맥락의 한 기능으로서 고맥락과 저맥락을 들 수도 있다. 이외에도 우리의 세계관을 규정하고 가치를 결정하며 생활의 기본적 템포와 리듬을 설정하는 숨겨진 문화의 속성과 문법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를 전혀 또는 지엽적으로밖에 의식하지 못한다.
에드워드 홀은 ‘문화인류학 4부작’ 중 그 네 번째인 『생명의 춤(The Dance of Life: The Other Dimension of Time)』에서 이 숨겨진 패러다임을 기층문화(PLC: primary level culture)라고 부른다. 기층문화는 우리의 사고패턴을 결정하고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일련의 기초 전제를 부여하는 핵심 요소다. 그런데 만약 사람과 그들이 만든 사회가 앞으로도 여전히 표면적인 문화만을 인식하고 저변을 이루는 기층문화를 회피한다면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 폭발과 폭력뿐이다. 이것이 바로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의 4부작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인 ‘문화의 몰이해’가 불러올 재앙이다 . 『생명의 춤』이 출판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이 시점에서도 그의 걱정은 전혀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끊임없이 인류를 위협하는 테러와 종교적 근본주의, 전쟁, 기후난민, 민족과 인종 문제 등으로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았다.
마치면서...
이 모든 위협의 근간을 흐르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주의, 지속 불가능한 자본주의, 성장 지상주의 등 21세기 지배 이데올로기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과 문화, 그리고 서로 다름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일지도 모른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기술적으로 발전했다고 해서 그 나라의 문화가 다른 나라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제국주의적 논리 때문에 많은 원주민이 학살당하거나 멸종되고, 여러 국가가 식민주의적 고통의 늪에 빠져 역사적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 잔혹한 논리는 여전히 세계를 지배한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을 가졌느냐’가 한 사람을 가늠하고 판단하는 기본 척도가 되는 이 경박한 사회에서 우리는 타인을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가득한 잣대를 사용해 막무가내로 재단해 버리거나, 돼먹지 않은 마음으로 무시하고 얕보고 경멸한다. 범죄율은 증가하고 사람의 목숨은 이제 충분히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 정도로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 무엇이 이 사회를 이토록 비참하고 척박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사람의 존엄성에 대한 회복과 그 회복력을 결정하는 문화의 속성과 관련된 것은 않을까. 만약 그러하다면 문화에 대한 몰이해야말로 우리가 타파해야 할 무지 중의 무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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