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료마전(龍馬傳, 2010)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영웅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영웅이자 메이지 유신의 숨은 공신이자 지사(志士)의 표본 같은 인생을 살다가 요절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일생을 다룬 드라마다. 료마는 일본 역사를 잘 몰라도 어딘가에서 이름 정도는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데, 나 같은 경우는 마리우스 B. 잰슨(Marius B. Jansen)의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라는 책을 통해 료마와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드라마까지 찾게 되었다.
250여 년 동안 평화를 누렸던 시스템을 뒤엎는 메이지 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로는 오랜 세월 누적된 하급 사무라이들의 불만 • 불평에 서구 열강의 위협이 도화선으로 작용한 것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렇게 해서 분기한 하급 사무라이들은 사심 없이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지사임을 자처했다. 그중 많은 사무라이가 무조건으로 양이를 배척하는 양이론(攘夷論)을 신봉했는데, 처음엔 료마도 새 시대 • 새 문물에 눈감은 그런 무모한 사무라이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격동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는 협상가이자 개혁가로 거듭난다. 드라마엔 그런 료마의 극적인 사상적 변화가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사카모토 료마
료마 역은 가수, 작곡가, 사진작가, DJ 등으로 활약하는 다재다능한 배우 후쿠야마 마사하루(福山雅治)가 맡았는데, 장난기가 다분한 소년 같은 천진함과 무력보다는 대화와 협상을 중시하는 평화로운 기질을 간직한, 그러면서도 절대 나약하지 않은 료마를 연기했다.
료마의 가장 큰 업적은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와 함께 견원지간이었던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동맹을 맺게 만든 것이다. 이 두 번의 관계는 (한국으로 따지면) 전라도와 경상도를 떠올리면 된다. 아마 한국인은 설령 망국의 위기가 코앞에 다가온다고 해도 이 두 도가 동맹을 맺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것 같은데, 그만큼 두 번 사이는 매우 안 좋았다(동맹을 맺기 바로 전까지 전쟁했다는 것).
그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남으로써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250여 년간 내놓지 않았던 권력을 내려놓음으로써 대사를 도모할 수 있게 된다. 격동의 시대에서 과거의 한계를 뛰어넘는 큰 도약은 이렇게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일을 해냄으로써 이루어진다. 일본은 그렇게 근대화에 안착하고, 그러지 못했던 조선 • 청나라가 치욕스러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
미쓰비시(三菱)그룹의 창업주이자 료마와는 동갑내기 소꿉친구인 이와사키 야타로 역은 카가와 테루유키(香川照之)가 맡았고, 드라마는 그의 회상 형식으로 전개된다. 진지한 사극 드라마임에도 얼굴 근육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듯한 과잉 연기가 징그러울 정도다.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렁이가 꿈틀대는 것 같다.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영화의 이론(Theory of Film)』을 보면 영화비평가들이 때로 배우의 과장된 연기를 비난하는 것은 반드시 그 연기가 연극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라 오히려 비평가들은 배우의 연기가 어쩐지 너무 강하게 목적을 의식하고 있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카가와 테루유키의 유아독존 같은 과장된 연기는 몰입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다.
어찌 되었든, 어린 시절 형편이 어려울수록 재물 욕심도 강해진다는 경향을 보여주는 예가 있다면, 바로 이와사키 야타로가 그러할 것이다. 성공에 대한 과도한 집념과 료마에 대한 열등감을 자주 내비침으로써 그는 마치 성격 파탄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런 울분 가득한 성정 아래에 숨은 이와사키 야타로의 여린 마음을 보여주는데 인색하지 않다.
세트의 협소함이 낳은 답답한 샷들
이와사키 야타로의 연기만큼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드라마 세트의 협소함이다. 일본 사극만 보아온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최근까지 중국 사극을 즐겨 본 한 사람으로서 헝디엔 월드 스튜디오 같은 장대하고 화려한 세트장에 눈이 익어서 그런지 조망 샷이 불가능한 협소한 세트는 간간이 답답함을 느껴지게 한다.
볼만한 풍경은 료마와 오료(お龍)의 기리시마 연산 로케이션 정도인데, 지금 같으면 드론으로 촬영했을 이 멋진 샷을 담느냐 카메라맨도, 배우들도 꽤 고생했을 것 같다. 흔들림 보정(Warp Stabilizer)도 없는 순수하게 사람이 촬영한 샷이라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박진감이 느껴진다. 그밖엔 배경을 역광으로 뿌옇게 처리한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배경을 가리기 위한 트릭인지, 아니면 계획된 연출인지 모르겠다.
전체적으론 마치 연극을 보는 듯한 답답함이 다소 있지만, 일본 전통 가옥 특유의 아담한 정취와 검소하고 담백한 실내 장면은 중국 사극의 화려함과 대조적이라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마치면서
일본 드라마뿐만 아니라 한국 • 중국 드라마를 보면서도 느끼는 점이지만, 대체로 남자보단 여자가 연기를 훨씬 잘 소화해 낸다. 히로스에 료코(배역: 히라이 카오, 공교롭게도 그녀는 카오와 같은 고치시 출신), 마키 요코(배역: 료마의 아내 오료), 아오이 유우(배역: 료마를 좋아하는 게이샤 오모토) 등 그녀들의 연기는 좋은 연기는 “연기를 해선 안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배우는 전혀 연기하지 않은 것처럼 연기해야 한다는 통념에 잘 들어맞는다. 남자와 여자 배우들의 연기의 성격이나 성향 차이를 음미하면서 감상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료마의 사상적 스승인 가쓰 린타로(勝麟太郞), 메이지 유신 영웅 중 한 명이자 정한론의 우두머리 격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료마의 수하이자 훗날 외무대신이 되는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도사번 최후의 실권자였던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 등 메이지 신정부에서 활약할 주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므로 역사를 좋아하는 시청자라면, 협소한 샷에도 불구하고 그리 지루하지 않게 감상할 수 있는 드라마다. 반면에 사무라이가 주인공이지만, 영화 「자토이치」 같은 멋들어진 활극은 등장하지 않으므로 ‘칼싸움’을 기대하고 찾은 시청자라면 실망과 후회의 눈물을 뚝뚝 흘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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