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지 않음, 형사 | 찬호께이 | 환상적인 미스터리와 과학적 엄밀함으로 빚어낸
갑자기 등줄기가 차가워지는 기분이다. 아친이 꺼낸 말은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을 건드렸다. 나는 수첩을 꺼내 펼쳤다. 보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 적나라하게 거기 있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정말로 6년 동안의 기억을 잃은 거라면 내 수첩에 적힌 내용이 왜 6년 전 사건인 걸까요?” (p128)
독자를 현혹하는 두 개의 미스터리
독자는 자그마치 무려 두 개의 미스터리를 추적해야 한다. 첫 번째는 전형적인 홍콩의 소시민층이었던 임산부와 그녀의 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한 범인을, 두 번째는 시간 터널을 통해 6년을 점프한 것인지 아니면 영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1992)」처럼 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즉 지난 6년간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은 한 남자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이다. 두 개의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실마리는 엉킨 실타래처럼 서로 긴밀하고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마치 눈앞에서 미치광이가 춤을 추는 것처럼 독자를 현혹하는 텍스트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안개 낀 것처럼 모호하게 흩뿌려놓는다. 한편으론 엄밀한 과학적 추론을 끌어들이는 텍스트의 간곡한 의지는 미스터리와 미스터리를 연결하는 논리성과 개연성을 증대시킨다. 이처럼 환상 속으로 밀어붙이려는 원심력과 과학적 논리를 추구하려는 구심력은 독자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도록 혼란과 의문을 가중시킨다. 함정인 걸 알면서도 함정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운명의 가혹한 힘에 떠밀린 독자는 작가가 친절하게 준비한 교묘한 서술에 중독되고, 관능적인 텍스트에 놀아나며 갈팡질팡하는 독자가 가련하고 보기에 딱했던지 멀찌감치 떨어져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관조하던 미스터리는 그제야 서서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흩어졌던 미스터리가 점점 한 점으로 응축되면서 드디어 미스터리가 더는 미스터리가 아니게 되는 순간, 독자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오싹한 한기와 미세하게 떨리는 전율은 그동안의 혼란과 좌절을 십분 보상해주고도 남을 터이다.
환상과 과학의 명확한 경계를 논리로 무너트리다
추리 소설에서는 기름과 물처럼 섞이기 어려운 존재인 환상과 과학의 확고부동한 경계를 명쾌한 논리로 무너트림으로써 완성된 찬호께이(陳浩基)의 『기억나지 않은, 형사(遺忘.刑警)』는 미스터리의 엄밀함과 (그동안 장르 소설에서는 도외시되었던) 문학성을 추구하는 텍스트로 잠수하기 전에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것처럼 독자를 한껏 빨아들인다. 그러다가 그렇게 미스터리의 중심까지 빨려온 독자를 기가 막힌 반전으로 재채기하듯 힘껏 내쳐 버린다. 이로써 미스터리의 윤곽을 서서히 잡아간다고 의기양양했던 독자를 또다시 미스터리의 한복판으로 날려 보내 어리벙벙하게 만드는 실로 놀라운 작품이다.
덕분에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은 제대로 된 추리 소설이었다. 한편으로는 읽는 내내 찬호께이(陳浩基)라는 대단한 작가를 발견했다는 기쁨과 흥분에 겨워 책을 잡은 두 손이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리는 것처럼 떨기도 했다. 사실 영화나 소설 등 많은 대중적인 작품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기억 상실을 소재로 삼아왔기 때문에 식상하지 않을까, 혹은 너무 쉽게 미스터리의 윤곽이 잡히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선입견이 작용할 수도 있으나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둬도 될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걱정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끝까지 읽고 나니 역시 그런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에 불과했다. 『기억나지 않은, 형사』를 읽는 내내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이렇게나 다른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무한한 상상력과 무궁무진한 창조력을 가진 인류의 놀라운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로 찬호께이는 일본 추리소설계의 거장 시마다 소지(島田荘司)로부터는 “무한대의 재능”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단지 ‘중국인이 이런 내용을 써낼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의심 때문에 타이완 추리작가협회 심사위원단으로부터 영어권 작품을 번역해서 고쳐 쓴 게 아닐까 하는 표절 의혹을 샀을 정도로 중국어권 추리소설계에서 용처럼 솟아오르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너무 찬사를 남발하는 것 아니냐고 못마땅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기억나지 않음, 형사』를 읽고 나면 비록 백 퍼센트는 아닐지라도 많은 사람이 특별한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이유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찬호께이는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에 투고할 때 덧붙인 글에서 미스터리의 환상성과 전통적 관념을 전복시키는 새로운 방법론, 그리고 21세기적 새로운 과학지식으로 작품을 지탱해야 한다는 21세기 본격추리 창작의 조건에 대해 언급했다고 한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이로써 독특하면서도 엄중한 자신만의 창작 가치관을 지닌 작가를 만나게 된 독자는 반갑기 그지없다. 시마다 소지의 심사평대로 ‘21세기 본격추리’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특출난 작품이다.
<좋은 추리소설은 추리하고픈 욕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
마치면서...
일반적인 문학 작품은 탐독 전에 약간의 스포일러를 안고 가도 보통은 작품 감상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말 한마디가 단서가 되고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추리 소설, 그것도 본격파 추리 소설 같은 경우는 다르다. 특히 이 소설처럼 굉장히 세밀하고 엄격한 논리로 구성된 경우 리뷰를 쓰는 사람이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라도 머리 회전이 빠르고 눈치가 뛰어난 독자에겐 김 새게 하는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므로 일부러 줄거리나 본문 중 극히 작은 부분이라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일은 삼갔다. 좀 더 많은 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관심을 불러들이고자 소설의 세부내용을 언급할 수도 있었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었음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한다면 지금까지의 지리멸렬한 내 글은 깡그리 무시해도 좋지만, 당신이 만약 추리 소설 마니아라면, 특히 나 같은 본격파 류의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정말 놓쳐서는 안 되는 작품이라는 것만 알아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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