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을 기다리며 | 필립 K. 딕 | 삶이 가진 예측 불가능함의 필연성
“그놈의 시간여행 약을 먹고 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자네 앞에서 작고 하찮은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어? 옆이나 뒤가 아니라? 혹시 작년이 다시 되돌아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거야?” 에릭은 손을 뻗어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작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시 와줄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군요.” (『작년을 기다리며』, 358쪽)
소위 말하는 순수문학이든, 아니면 추리소설, SF소설 등을 한데 묶는 장르소설이든, 소설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 그 자체와 그 인간들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유기적으로 기능하는 사회와 그 사회가 생산하는 문화에 대한 다각적 관찰과 그에 따른 다양한 해석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SF소설은 현실에서 전혀 일어나지 않을 법한,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그래서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소재로 인간을 설명하고 인간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접근할 수 있다. SF소설이라고 해서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나 고찰이 빠진 채 그저 과학적 • 기술적 상상력을 발흥하여 단순한 흥밋거리를 제공하는 것에만 그친다면 그저 그런 삼류소설과 다름없다.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작품들이 그의 사후에도 꾸준히 재평가를 받으며 재판되는 이유는 그의 작품들은 시간 보내기 용이나 흥미 위주의 SF 소설이 아니라 제한적이며 규격화된 현실의 상황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인간의 내면과 실존 문제를 파헤치는데 SF 소재를 사용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SF소설의 품격과 위상을 높인 그만의 독특한 혜안이 있었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의 작품을 읽을 수밖에 없다.
<웜홀을 건너면 어떤 세상과 마주칠까?> |
지금까지 읽은 필립 K. 딕의 작품 중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유빅』에 이어 세 번째인 『작년을 기다리며(Now Wait for Last Year)』에는 인류의 문명이 발생한 이후 인간 사회에 끊이지 않는 논란과 문젯거리를 제공해 온 ‘결혼’에 실패한 인공장기 이식 전문의 에릭 스위트센트가 등장한다. 그는 아내의 사악한 계략에 걸려 JJ-180이라는, 외계 문명과 전쟁 중인 지구에서 적국을 섬멸하고자 만든 최악의 마약을 복용한다. 덕분에 그는 평행우주의 실체를 몸소 체험하고 다양한 미래를 경험하게 되면서 현실과 평행한 또 다른 세계에 사는 미래의 ‘나’를 만난다. 미래의 또 다른 에릭들은 거두절미하고 마약 때문에 폐인이 된 아내 캐시와의 관계를 일찌감치 끊으라고 조언한다. 그래야만 평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릭은 미래를 여행함으로써 마약에 찌든 아내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 그것이 자신에게도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또 다른 ‘나’의 강고한 조언이 있었음에도 아내를 저버리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어떤 결말이 올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음에도, 그것이 설령 파국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일으킬지라도 인간은 종종 그러한 선택을 자행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논리적 • 과학적 설명도 필요 없으며 들어맞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자율제어식 택시의 말대로 인생은 그런 식으로 구성된 현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악독하고 파렴치한 여자라 할지라도 병든 아내를 차마 저버릴 수 없는 인지상정은 비합리적이며 비이성적일 수도 보일 수도 있지만 바로 그러한 인간성 때문에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작년을 기다리며』는 아무리 많은 미래를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필연이 아니라 일어날 법한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일 뿐임을 환기시켜 준다. 예상한 대로, 예측한 대로 인간이 행동하고 사회가 기능한다면, 그것은 프로그래밍한 대로 움직이는 로봇의 삶과 다름없으며 허무와 권태의 극치이다. 삶이 가진 예측 불가능함의 불가결함을 다중현실이라는 SF적 요소에 자신만의 독특한 필치와 깊이 있는 안목을 결합시켜 완성시켰다는 점이 바로 필립 K. 딕의 『작년을 기다리며』의 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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