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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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아집 | 세태는 변해도 감정을 일으키는 이치는 같다

중국아집 | 권석환 | 세태는 변해도 감정을 일으키는 이치는 같다

책 리뷰 | 중국아집 | 권석환 | 세태는 변해도 감정을 일으키는 이치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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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대출할 생각은 없었는데

권석환 교수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원래 내가 찾던 책은 이런 책이 아니다. 『중국아집 - 일상과 일탈의 경계적 유희, 가슴속의 그윽한 감정을 마음껏 풀다』는 그저 도서관 자료 검색창에서 ‘중국 문학사’에 대한 책을 검색하던 도중 우연히 발견한 책 중 하나일 뿐이다. 심상스러운 긴 부제가 눈에 띄어 어떤 책인가 하고 대충이라도 흩어 볼 양으로 찾다가 못 찾은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간혹 도서관 분류기호에 적힌 숫자대로 해당 무리 속에 있지 않고 특별히 다른 책장에 따로 정리해 두는 책들이 (예를 들어 XX 전집 같은) 있긴 하다. 사서에게 책을 찾아달라고 부탁할 때까지만 해도 대출할 생각은 없었다. 제목부터가 한자인 것이 한눈에 봐도 학술서다(학술서의 가치는 인정하고도 남으나 지금은 단지 딱딱한 책은 읽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막상 사서가 책을 찾아낸 곳은 아뿔싸, 내가 몇 번이나 훑고 지나간 책장, 즉 분류기호 무리 속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가늘고 긴 몸을 이리 휘청 저리 휘청하며 책을 찾던 곳에서 사서가 이 책을 보란 듯이 꺼내 들었으니 왠지 모르게 바보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도서관을 들락거린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이런 간단한 것도 못 찾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래도 여기서 끝났으면 대출까지 가는 객기는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부탁한 책을 바지런히 찾은 사서가 데스크에서 기다리던 나에게 책을 건네주면서 무심코 던진 직업적인 한마디에 난 그만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 책을 대출하고야 말았다.

“이 책 대출하신 건가요?”

이것으로도 모자랐던지 사서는 결정타를 날린다.

“연장(대출기한)도 해드릴까요?”

하지만, 『中國雅集』을 끝까지 읽고 난 지금 사서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혹시 사서의 거절 불가능한 반 강요성 질문은 이 책을 이미 읽었던 독자로서 나에게 권유하고픈 의도에서 나온 지능적인 책략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가능성 희박한 짐작까지 들 정도다.

아무튼, 이 책 덕분에 정적(靜寂), 한적함, 고요함 등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달랑 5분조차, 아니 내가 즐겨 찾는 공원에서조차 마음껏 정적을 누릴 수 없는 나의 처량한 신세에 다시금 분노가 솟는다. 시시각각 가지각색의 소음에 시달리는 도시인으로서 옛 지식인들이 시끌벅적한 도시를 떠나 조용하고 쾌적한 자연을 찾아 나선 그 아취를 십분 백분 공감한다. 다만, 그때는 도시에서 10리만 벗어나도 속세를 떠난 듯한 자연의 정취에 도취할 수 있었는데 반해 지금은 사방팔방 어디를 가도 사람이 없는 곳이 없으니 그저 좁고 좁은 땅에 태어난 것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정말이지 이런 울화통이 터질 땐 정적 속에 파묻혀 죽고 싶다.

책 리뷰 | 중국아집 | 권석환 | 세태는 변해도 감정을 일으키는 이치는 같다
<饮乐宴 (兰亭修禊图卷)(출처: 옛사람들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경험해볼 수 없는 고상한 놀이

책 제목의 ‘아집(雅集)’은 고집과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는 ‘아집(我執’)이 아니라 중국의 옛 지식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차나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면서 지식과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던 모든 모임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지식인이란 관리, 사대부, 문인, 그리고 근대에 와서는 상인과 지식인 계층의 가족을 둔 여자 등 글을 읽고 시를 지을 줄 아는 사람들을 말한다. 아집이 성행했던 시대는 지금과는 달리 글을 읽고 시를 지을 수 있는 소수가 지식과 문화를 독점하는 특권 계층이었음을 잊지 말자.

아집(雅集)이라는 말은 생전 처음 들어본 단어일지라도, 앞에서 아집을 설명한 장면은 영화나 드라마, 혹은 소설이나 역사책 등에서는 꽤 많이 봤을 것이다. 선비들이 술을 마시며 분위기를 띄우고, 술로도 부족하면 기생을 불러 여흥을 돋운다. 그러다 취기가 얼근하게 올라오면 졸졸 흘러가는 시냇물에 낙엽을 띄우듯 운을 띄우고 정취에 도취한다. 때론 참석자들이 끝말잇기 하듯 돌아가며 시를 짓는다. 시를 제대로 짓지 못한 누군가는 벌주를 마시고, 음률을 아는 누군가는 현을 튕기거나 퉁소를 불며 아취를 자아낸다. 이러한 음주부시(飮酒賦詩)는 반드시 주변 경치가 빼어난 곳에서 이루어진다.

현대인의 냉소적인 시선으로 보면 아집은 지식이나 부나 권력 중 한두 가지를, 혹은 이 모든 것을 독점한 극소수 특권 계층의 부르주아적인 유희이자 일시적인 일탈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백성이 먹을 것 걱정하고 있을 때와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보통은 이 두 재난이 같이 오지만) 누구보다 국정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경치 좋은 곳이나 찾아다니며 한가하게 술이나 마시고 시를 짓는다니 아니꼽기 그지없다. 실제로 원나라 말기 농민봉기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아집은 지속하였다고 한다.

나라가 망해가는 시기의 전형적인 혼란을 몸소 보여준 원나라 말기는 김용의 영웅문 3부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의 시대적 배경이기도 하다. 장무기가 명교를 이끌며 원나라에 대항하고 있을 때 돈 좀 있는 사람들은 삼처사첩(三妻四妾)을 거느렸으며, 여기에 글자까지 깨우친 사람들은 아집을 개최하여 탁상공론에 취해있었던 것이니 말세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와 비교하면 민주적이고, 역시 과거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 경제적 평등이 실현된 현대인의 시선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며, 이런 한 세대에 갇힌 아집스러운 사고방식으로 아집(雅集)을 이해하려고 들면, 아집(雅集)만이 자아낼 수 있는 고아한 정취를 닭똥집만큼이라도 깨우칠 수가 없다.

나 역시 처음엔 (과장에서 비꼬면) ‘흥청망청’에 비유할 수 있는 지식인들의 현실 도피적인 작태가 아니꼽고 비위에 거슬렸지만, 술을 먹물 삼고 자연을 붓 삼아 그윽하고 아순하게 한껏 회포를 풀어내는 그 고고한 행위와 시구 한 획 한 획에 담긴 정신적 고양을 향한 태연자약한 의지, 그리고 자연을 벗 삼을 줄 아는 아정한 성품은 한순간 나의 식견을 뒤집어버렸다. 아집이 자아내는 운치와 멋,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녹아 나오는 자유분방함은 ‘일상과 일탈의 경계적 유희, 가슴속의 그윽한 감정을 마음껏 풀다’라는 이 책의 부제와 딱 들어맞는다.

비판적 태도를 잠시 접어 둔다면, 그리고 아집에 참여한 많은 식자가 관리로서, 사대부로서, 문인으로서 본분을 다했다면, 그래서 응당 열심히 일한 만큼 쉬고 즐기면서 긴장을 푸는 것도 당연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때 그들이 아집을 즐겼던 이유 중 하나는 현대인들이 북적대는 도시를 잠시라도 벗어나고픈 마음에 공원이나 숲, 산을 찾는 것과 같다는 이치를 깨닫게 된다. 그와 더불어 나의 아집(雅集)에 대한 비판을 위한 비판은 순전히 내가 경험해볼 수 없는 고상한 놀이에 대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부러움과 질투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정말이지 나도 그들처럼 아유한 놀이에 나이를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흠뻑 취해보고 싶고, 그렇게 살다가 죽고 싶다.

당신은 어떻게 감정을 풀고 있나?

현대인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취미나 놀이의 종류는 아집을 행했던 옛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다. 하지만, 그 여러 가지 중에서 아집만큼의 기품과 아취를 자아내는 것들이 있을까? 재밌고 자극적이고 스릴 넘치는 놀이는 많지만, 고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 놀이는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없다(그러고 보니 요즘의 감각적인 놀이는 감성적인 아집에 비하면 꽤 동물적이다). 아마 현대인은 ‘놀이’라는 단어에 ‘고상한’이라는 형용사가 붙는 것 자체를 의아해할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놀이’가 지향하는 바는 ‘일탈’이다. 그래서 『중국아집(中國雅集)』이란 책 제목에 쪼르르 따라붙은 ‘일상과 일탈의 경계적 유희’라는 부제는 탁월한 선택이다.

(나로선 영영 볼 수 없는) 빼어난 경치에 취하고 (나로선 영영 맛볼 수 없는) 향긋한 술잔에 취하고 (나로선 영영 들을 수 없는) 감미로운 음악에 취할 수 있다면, 양유정(楊維禎)이 말한 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시구가 되고, 붓이 닿기만 하면 글이 될 것도 같다. 또한, 왕희지(王羲之)는 〈난정집서(蘭亭集序)〉에서 비록 세상이 달라지고 세태가 변하겠지만 감정을 일으키는 이치는 같은 것이라고도 말했다.

소음과 악취에 시달리는 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악담이 되기 일쑤고, 키보드가 찍어내는 것은 졸렬한 글이지만, 이러한 행위 자체는 삶에서 자극받아 일어난 마음속의 감정을 풀어내는 과정인 것으로서 아집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물며 내가 책을 읽고, 그 감상을 굳이 블로그에 글로 쓰는 이유도 감정을 풀어내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겠다. 감정을 제때 풀어내지 못하면 응어리가 지고, 더욱 악화하면 한이 맺히기도 한다. 현대적인 용어로 바꿔 말하면 정신적 스트레스다. 옛 지식인들은 이런 스트레스를 아집으로 풀었다고 볼 수 있다. 분위기는 판이하고 격은 떨어질 대로 떨어졌지만, 현재 다양한 ‘오프라인 모임’이 아집의 기능을 흉내 내고 있다.

책 리뷰 | 중국아집 | 권석환 | 세태는 변해도 감정을 일으키는 이치는 같다
<현대 중국인의 아집(출처: 푸슈의 우아한 컬렉션 동리차 27호)>

정서 순환의 그윽한 향유

옛 지식인들이 현실을 벗어난 수려한 자연경관 속에서 경치를 감상하며 우주관과 인생관을 공유하고, 혹은 차나 술, 그리고 시와 그림과 음악을 통하여 마음속에 담겨 있는 정서를 풀어냈듯, 지금의 세대는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현실이 빚어낸 다양한 디지털 문화를 통해 소통하고 여가를 즐기고, 때론 사진과 동영상에 일상을 담아 SNS에 공유하면서 정서를 풀어낸다(익히 아는 악성 댓글 같은 댓글 놀이도 마음속에 쌓인 응어리를 해소하는 순화 기능이 있다).

세월은 흐르고 시대는 몰라보게 많이 변했지만, 감정적인 동물인 사람은 어떻게든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을 풀어내야 평온한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아집』에 등장하는 지식인들과 현대인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이치를 깨닫는다면, ‘일상과 일탈의 경계적 유희’에서 ‘가슴속의 그윽한 감정을 마음껏’ 풀어낼 수 있었던 아집이야말로 전설처럼 전해져오는 신선놀음이 아닐까 싶다. 현대인으로서는 죽었다가 깨나도 경험은커녕 상상조차 해볼 수 없는 깊고 그윽한 정취를 그들이 남긴 시나 그림을 통해 깨알만큼이나마 헤아려볼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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