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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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왜 김덕령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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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정본 징비록 | 유성룡 | 왜 김덕령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을까?

유성룡이 ‘징비록’을 지은 이유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덕일의 『유성룡: 설득과 통합의 리더』를 읽고 나니 역시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징비록』은 어떤 책인가? 말년에 조정에서 물러난 유성룡이 조선시대 가장 큰 전쟁으로 국가의 존망이 걸렸던 임진왜란을 되돌아보면서, 임진왜란을 거울로 삼아 다시는 나라에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자 후예들을 생각하며 지은 책이 『징비록』이다. 이 뜻을 『징비록』에서 유성룡은 이렇게 밝힌다.

『시경(詩經)』(제19권 주송周頌 소비장小毖章)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懲] 뒤에 환난(患難)이 없도록 조심한다[毖].”라는 말이 있는데,이것이 바로 내가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징비록』 「자서(自序: 스스로 적은 머리말)」)

그리고 『징비록』 「자서」에서 유성룡은 왜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러고서도 우리나라에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다. 또한, 선대 여러 임금님들[祖宗]의 어질고 두터운 은덕이 백성 속에 굳게 결합되어,백성의 조국을 사모하는[急漢] 마음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며,임금께서 중국(명나라)을 섬기는 정성이 명나라 황제를 감동시켜 우리나라를 구원하기 위한[存邢] 군대가 여러 차례 출동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위태로웠을 것이다. (『징비록』 「자서」)

백지원의 『조일전쟁』에서 말하는 왜란 극복 삼대 요소인 명나라 원군, 이순신, 의병과는 약간 다르기 하지만 크게 틀리지도 않는 것 같다. 어찌 보면 전쟁을 그쯤에서나마 끝마칠 수 있었던 이유에는 백지원이 말한 앞의 세 가지 요소보다, 유성룡이 말한 대로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순신의 등용, 곽재우나 유정 등 의병의 활약,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기적절했던 죽음(이왕이면 더 일찍 죽었으면 좋았을지도), 명나라와 후금과의 전쟁이 한창때가 아니라서 조선에 원군을 파병할 여유가 있었다는 것 등 당시 조선의 국운이 아직 다한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왕 하늘의 도움을 바란다면 애초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겠지만, 불행하게도 조선의 운은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나마 나라가 망하는 꼴은 면할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일본강점기가 약 3백 년이나 앞당겨지는 바람에 대한민국이 탄생조차 못 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의병 활동을 말하면서 한 번도 거론되지 않는 이름, ‘김덕룡’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몇 가지 의문점 중 하나가 『징비록』에서는 전라도 의병장 김덕령의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징비록』 제1권, 제7장 민중의 분기와 의병의 활동’에서 공로가 있는 전라도 의병장을 소개하는데 김천일, 고경명, 최경회 이렇게 세 명만 나온다. 그래서 ‘왜 김덕령은 징비록에서 한 번도 거론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나름대로 초보적인 추리를 해보았다.

국역 정본 징비록 | 유성룡 | 왜 김덕령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을까?
<징비록 / Jocelyndurrey / CC BY-SA>

‘이몽학의 난’에 가담한 세 사람

일단 김덕령은 선조 29년(1596) 충청도에서 발생한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 도중 사망했다. 이는 압수된 이몽학의 문서 중에 기록된 김 • 최 • 홍씨 성이 누구냐는 질문에 반란에 가담한 한현은 '김덕령 • 최담령 • 홍계남'이라고 대답했다는 것과 이몽학이 세를 모으려고 김덕령과 공모했다고 선전한 것도 김덕령이 역모로 몰린 증거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한현은 곽재우와 고언백도 모두 자신의 심복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 중에서 김덕령과 최담령만 역모죄로 몰려 국문을 받았다. 고언백은 1609년 사망하고, 곽재우는 1617년 사망했다. 홍계남은 네이버 지식 백과에도 사망연도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았다. 우선 선조 30년(1597) 1월 24일 2번째 기사를 보자.

상이 이르기를,
“경주는 누가 지키고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권응수(權應銖)와 김태허(金太虛) • 홍계남(洪季男) 등이 부산 산성(釜山山城)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30년 1월 24일)

그렇다면 홍계남은 김덕령처럼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었지만, 그 일로 죽음까지는 이른 것 같지는 않다. 같은 해 5월 3일 5번째 기사를 보자.

이조가 아뢰기를,
“홍계남(洪季男)에게 증직(贈職)하는 것이 옳은가의 여부를 비변사와 의논하여 아뢰라는 일이 판하(判下)되었기에, 비변사에 의논하였더니 ‘홍계남이 전후에 세운 전공은 참으로 많으나 이미 당상관(堂上官)으로 특진되었으니 증직까지 하는 것은 조금 지나친 듯하다. 해조(該曹)에서 별도로 부의(賻儀)를 내리도록 하고, 또 상사(喪事)를 주관하여 고향에서 장례하게 하며, 그의 노모에게는 음식물을 제급(題給)하고 처자에게는 3년 동안 요미(料米)를 지급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다만, 의병이라 일컫고 단 한 번의 싸움에 패퇴하여 그 사졸을 몽땅 잃은 자에게도 재질(宰秩)을 추증하였는데, 계남으로 말하면 흉적들이 가득히 있을 때에 우뚝이 충청우도(忠淸右道)의 보루(堡壘)가 되어 반쪽의 하늘을 떠받쳤으니, 이것이 누구의 공로인가. 옛사람들은 전사한 장수들에게 대부분 그 직질을 추증하였으니, 짐의 뜻은 증직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30년 5월 3일)

증직은 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이다. 고로 실록의 기록만을 보면 홍계남은 선조 30년 1월 24일에는 살아 있었지만, 같은 해 5월 3일에 ‘증직’이 거론되는 것을 보면 그 이전에는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한현의 입에서 나온 5명 중 김덕령과 최담령만 역모로 몰려 국문을 받았고, 곽재우, 홍계희, 고언백은 역모에 연류되지도 않았고, 천수를 다 누린 것 같다. 이 살아남은 세 명 중 『징비록』에서 공로가 있는 의병장을 소개할 때 곽재우, 홍계희는 등장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최담령이다. 김덕령과 같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고 죽지 않고 사면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세 가담자 중 기인 기질이 엿보였던 최담령

이덕일 소장은 『유성룡: 설득과 통합의 리더』에서 김덕령과 같이 최담령도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보자.

김덕령(金德齡) • 최담령(崔聃齡) • 홍계남(洪季男) • 곽재우(郭再祐) • 고언백(高彦伯) 등이 무인되었다. 그중에서 김덕령과 최담령은 혹독한 심문 끝에 억울하게 장살(杖殺)당하거나 옥사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몽학의 난」)

이번에는 실록의 기록을 보자. 김덕령이 수백 번의 형장 신문에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지는 와중에서 최담령을 천거하고 죽은 기록이다.

“ …… 다만, 신이 모집한 용사 최담령(崔聃齡) 등이 죄 없이 옥에 갇혀 있으니 원컨대 죽이지 말고 쓰도록 하소서.”
라고 했을 뿐 시종 다른 말이 없이 죽었다.
(중략)
남도(南道)의 군민(軍民)들은 항상 그에게 기대고 그를 소중하게 여겼는데 억울하게 죽게 되자 소문을 들은 자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가슴 아파하였다. 그때부터 남쪽 사민(士民)들은 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勇力)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최담령(崔聃齡) • 최강(崔堈)을 사면하여 덕령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리고 양남(兩南)의 방어사에게 나누어 배속시켰다. (『선조수정실록』 29년 8월 1일)

이번에는 선조가 죽은 김덕령을 대신하여 그의 군사를 거느릴 장수에 별장 최담령을 지목하는 기록이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 그(김덕령)의 별장(別將) 최담령(崔聃齡)은 내가 일찍이 그의 사람됨을 보고 말도 해보았는데 용기가 뛰어났고 계략(計略)도 없지 않았으며 또 글을 조금 아는 데다가 발호(拔扈)하는 기상도 없었다. 이 사람으로 하여금 김덕령의 군사를 대신 거느리게 하고 싶다마는, 지극히 어려운 것은 사람을 알아보는 일이니, 마땅히 도체찰사(都體察使)로 하여금 그 사람을 불러다가 대신 거느리게 할 만한 인물이 되는지를 참작해 보아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렇게 한다면 또한 그가 거느리던 부하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도가 될 것이니, 비변사(備邊司)에 이르라.” (『선조실록』 29년 8월 25일)

최담령 역시 홍계남처럼 사망 연도는 미상으로 남아있다. 최담령은 김덕령의 친구로서 김덕령이 천거했다. 실록에서 권율이 이런 최담령을 칭찬하는 장면이 나온다.

“ …… 또 김덕령(金德齡)이 천거한 최담령(崔聃齡)이란 자는 체구가 남보다 크고 또 영기(英氣)가 있으며 7식(息)이나 되는 길을 하루에 가니, 이는 참으로 얻기 어려운 인재입니다.” (『선조실록』 29년 3월 4일)

7식이면 210리(里)이니 약 84km인데, 이를 하루에 갈 정도면 엄청난 경공술의 소유자이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사람이 직접 소식을 전하던 그 당시에는 발이 빠른 능력은 엄청난 재능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전시라면 더더욱. 더불어 권율이 말하는 최담령은 조금 특이한 인물이기도 하다.

상이 이르기를,
“(최담령은) 문장에 능한가?”
하니, 권율이 아뢰기를,
“담령의 측근에게 물으니, 담령은 평소에 옷소매 속에다 병서(兵書)를 넣고 다닌다고 하였는데, 정작 담령에게 물었더니, 담령은 ‘한 글자도 모른다.’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어에는 문자를 많이 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 중에는 자기 재주를 감추어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 오직 등용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김덕령을 내가 한번 보고자 했으나 그는 먼저 내려갔다. …… ” (『선조실록』 29년 3월 4일)

김덕령은 형과 함께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김덕령의 친구도 글을 어느 정도 알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만약 글자를 아는데 모르는 척했거나, 반대로 글자를 모르는 데 병서를 가지고 다녔거나, 어찌 되었건 특이한 인물이긴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 이후에 실록에서는 최담령은 더는 등장하지 않는다. 실록을 보고 판단하자면 최담령은 김덕령처럼 고문을 받아서 사망하거나 옥중에서 사망하거나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지나가는 말이지만, 선조는 ‘사람 중에는 자기 재주를 감추어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마음에 드는 인물을 잘 감싸고 돌다가도 한 번 삐치면 국물도 없는 변덕이 심한 임금이었다. 그러니 선조 밑에 있던 신하들은 꽤 고생했을 것이다. 그래서 유성룡도 조정을 떠나야 했다.

난이 일어나기 전부터 추문에 시달린 김덕령

아무튼, 최담령은 약간 특이한 기질이 있어 보였어도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김덕령은 달랐다.

잡아다가 국문하던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을 특명으로 석방시켰다. 덕령은 첩보(牒報) 전달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역졸 한 사람을 매로 쳐서 죽였을 뿐만 아니라 도망한 군사의 아버지를 잡아다가 매를 쳐서 죽게 하였는데 죽은 자는 바로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이었다. 근수가 남쪽 지방을 순시하는 도중에 덕령을 직접 만나 석방해 주도록 타일렀고 덕령은 이를 승낙하였는데 근수가 돌아가자 즉시 그를 죽였던 것이다. 근수는 그가 약속을 어긴 것이 미워서, 덕령은 신의가 없고 학살을 즐겨서 장수 재목이 되지 못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때 논의가 분분해서, 덕령은 살인을 부지기수로 많이 했으며 심지어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말하는 자까지 있었다. 결국, 덕령을 나국하였는데 증거를 들어 스스로 해명하자 상(上)은 특별히 방면할 것을 명하여 위로하고 달래어 보내고 또 전마(戰馬) 1필을 주었다. 상이 입시한 여러 신하에게 일렀다.
“당초에 덕령을 지나치게 추장하여 한신(韓信)이 다시 나타났다고 하였는데 이제 보니 하나의 돌격 장령(突擊將領)을 시키기에 합당할 뿐 대장을 삼기엔 가합하지 않다.” (『선조수정실록』 29년 2월 1일)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 몇 달 전부터 김덕령을 둘러싸고 마찰이 있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두 건의 살인죄를 일으킨 원인을 보면, 하나는 첩보 전달을 지체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도망한 군사의 아버지였다는 이유다. 전시에서 첩보 전달은 군 전체와 더불어 나라의 운명이 걸린 문제다. 이런 첩보 전달에 문제를 발생시켰다면 군법으로 다스려 상황의 경중에 따라 사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전시에 탈영 역시 사형감이다. 그런데 정작 탈영한 병사가 아니라 그 아버지에게 불똥이 튀었는데, 이것은 연좌제를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니, 김덕령으로서는 두 사건 모두 나름 변명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탈영한 군사의 아버지가 윤근수의 노비였다는 점이다. 이때 윤근수는 좌찬성 자리에 있었고, 형 윤두수는 이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다. 이 두 형제는 선조 37년(1604)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봉되기도 한다. 유성룡도 2등에 책봉되었다. 즉, 일개 의병장이 권세 있는 집안의 노비를 잡아 죽였으니 당연히 뒤탈이 없을 리가 없다. 이에 김덕령은 증거를 들어 스스로 해명해서 임금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 또한 김덕령 나름대로 억울한 면도 있었다는 것이다.

권율이 말하는 김덕령

선조가 권율에게 김덕령이 어떠한 사람인지 물었더니 권율은,

“덕령은 본래 광주(光州)의 교생(校生)으로 용력이 뛰어나 쓸 만한 인재입니다. 그러나 늘 군율(軍律)이 엄하지 못한 것을 분개하여, 휘하 사람 중에 범죄자가 있으면 귀를 자르거나 혹은 곤장을 치기도 하므로 휘하 사람들이 점차 도망한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29년 2월 19일)

김덕령은 용맹스런 힘은 뛰어났지만, 부하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어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위 글을 보면 범죄자에 대해서다. 즉, 김덕령은 군기를 엄하게 잡았고 군법을 어기면 덕을 베풀기보다는 단호하게 처벌하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그리고 위의 살인 문제는,

“극악한 왜적이 아직 소멸되지 않아 혹시라도 적절히 대처할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우선 방면하여 그로 하여금 힘을 다해 충성을 바치게 하고, 서서히 의논하여 조처하는 것도 또한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선조실록』 29년 1월 8일)

토사구팽당한 김덕령

이렇게 선조의 명으로 그 당시에는 넘어갔지만, 문제는 이몽학의 난이다. 이때 김덕령은 무고로 죽은 것이다. 『난중잡록(亂中雜錄)』의 병신년(선조 29, 1599)의 기록을 보자.

(김덕령은) 국운이 불행하여 죄가 아닌데 죽였도다. 하늘이 그에게 수년의 수명을 더 주었더라면 정유년의 적이 어찌 전라 • 충청도에 쳐들어올 수 있었으랴. 당시에 뜻있는 이는 개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뒤에 뒤떨어졌던 왜적이 듣고는 그 진위(眞僞)를 알고자 하여 원수에게 통지하여 충용장군을 보기를 요청하니, 원수는, “집에 돌아가 상(喪)을 마친다.”라고 답하였다. 그가 죽은 것을 자세히 알고는 모든 적추(賊酋)들이 술을 마시며 서로 축하하고 날뛰며, 기운을 내기를, “전라ㆍ충청도에는 걱정이 없다.” 하였다. (『난중잡록(亂中雜錄)』 병신년)

김덕령이 죽자 백성은 걱정하고 반대로 일본군은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김덕령은 현종 2년(1661)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이후에도 숙종 때 병조판서 등 추증은 계속 이어졌다. 이는 김덕령의 죽음이 무고였다는 증거이다. 진짜 죄가 있다면 이몽학, 정여립, 이괄의 경우처럼 신원 된다는 것은 꿈도 못 꾼다. 그렇다면 유성룡은 김덕령이 국문을 당할 때 김덕령을 유죄라고 생각했을까. 실록에 유성룡의 뜻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덕령이 순순히 체포되어 하옥되었는데 상이 직접 국문하였다. 이에 덕령은 사실대로 답변했으나 증거는 없었다. 그는 갑자기 유명해진 까닭에 이시언(李時言) 등의 시기를 받았으며 조정 또한 그의 날쌔고 사나움을 제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고 의심하였으므로 기회를 타서 그를 제거하려고 많은 사람이 그를 놓아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상의 뜻도 역시 그러하였는데 대질하여 심문하고는 오히려 그를 아깝게 여겨 좌우에 묻기를,
“이 사람을 살려줄 도리가 없는가?”
하니, 대신 유성룡 등이 아뢰기를,
“이 사람이 살 도리는 없습니다. 다만, 아직 그대로 가두어 두고 그의 일당을 국문한 뒤에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고, 판의금 최황(崔滉) 등은 즉시 형신(刑訊)할 것을 청하였다. 상은 재삼 난색을 지었으나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그는 살인을 많이 했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며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하기도 하였다. 정언 김택룡(金澤龍)은 아뢰기를,
“국가가 차츰 편안해지는데 장수 하나쯤 무슨 대수입니까. 즉시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하여 사람들의 웃음을 샀다.
상이 도원수를 시켜 덕령이 출병할 적에 태도가 어떠했는지 물었으며, 또 그의 부하인 최담령(崔聃齡)과 최강(崔堈) 등에게도 물었는데 모두 단서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29년 8월 1일)

김택룡은 이황의 문인이었다. 그리고 선조수정실록은 서인이 편찬했다. 서인들은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유성룡이 반대한 것처럼 꾸며 유성룡이 왜란을 자초한 인물인 것처럼 만들어 깎아내렸다. 위에 기록에는 김덕령을 죽일만한 증거나 단서는 없었고, 김덕령이 갑자기 유명해져 시기를 받았다고 나온다. 아마도 그 시기의 중심에는 자신보다 인기가 높은 인물을 질투하는 선조가 있었을 것이다. 선조와 그를 따르는 위정자들은 전란이 위급할 땐 김덕령을 써먹을 때까지 써먹다가 전란이 조금 가라앉는가 싶더니 그새 자신들 자리를 보전할 생각이 급급한 나머지 김덕령을 토사구팽한 것이다.

국역 정본 징비록 | 유성룡 | 왜 김덕령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을까?
<충의각 / Urwiki2016 / CC BY-SA>

김덕령은 역모를 꾸민 죄인이라고 확신한 유성룡

북인이 편찬한 선조실록의 다른 기록을 보면 유성룡은 김덕령을 좋게 보지는 아니한 것 같다.

“역적들의 옥사는 종사에 관계가 있는 것이므로 시일을 지체하거나 끌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 상의 하교는 지당하십니다. 다만, 단서가 드러나지 않았을 적에는 부득이 갖가지로 캐물어 기어코 실정을 얻어내야 하는 것으로 이것 또한 큰 옥사를 신중하게 다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큰 옥사를 추국할 때는 반드시 공초한 말에 드러난 것으로써 증거를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역적들의 공초에는 단지 ‘김종사(金從事)’라고만 했으니, 가리킨 것은 반드시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언욱(彦勖)과 응회(應會)가 다 같이 성이 김(金)이고 같은 족속(族屬)이므로 구분하여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난처하게 되었기에 이렇게 취품(取稟)합니다.
…… 대저 역적들의 입에서 이런 말 저런 말이 잡다하게 나온 사람으로는 김덕령이 제일이니, 이렇게 드러난 것에 의거하여 먼저 김덕령을 추국하는 것도 안될 것이 없습니다. 신들이 반복해서 헤아려보고 의논해 보아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기에, 감히 성상께서 재량하시기를 품합니다. …… ” (『선조실록』 29년 8월 14일)

유성룡을 비롯한 대신들은 김덕령을 추국할 단서가 마땅하지 않아 고민했다. 이에 선조가 답했다.

“김덕령의 일은 이미 뭇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으니 이를 고찰하여 엄하게 추국해야지 전혀 단서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다만, 이번의 큰 옥사에서 물어볼 만한 수종인(隨從人)들을 먼저 추국해야 하는 이유는, 실정과 행적을 모조리 얻어내어 이를 증거로 삼아 괴수를 추국할 바탕을 만들고자 하는 까닭에서이다. 옛적에도 이와 같은 옥사는 그 집의 노복(奴僕)과 비첩(婢妾)들까지도 모두 심문했다. 어찌 단지 공초한 말에 드러난 것만을 증거로 삼겠는가. …… ” (『선조실록』 29년 8월 14일)

‘어찌 공초한 말에 드러난 것만을 증거로 삼겠는가.’라는 이 말을 다르게 생각해보면 공초에서 나온 증거로는 김덕령을 처형하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성룡도 김덕령이 역모에 가담한 증거로 제시한 것은 죄인들의 공초에 나왔다고 한 것뿐이었다.

“김덕령은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으니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마는 여러 역적이 도착하기를 기다린 다음에 의논하여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적부터 역적을 다스리는 일은 반드시 문서를 기다려 본 다음에야 다스렸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 역적의 공초에 나왔는데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상황이 이러하니 반드시 살게 될 수는 없겠습니다마는, 그래도 차차 따져 물어 실정을 얻어내야 합니다.” (『선조실록』 29년 8월 4일)

이때만 해도 유성룡과 선조는 죽이 잘 맞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기심이 강한 선조는 왜란이 끝나고 유성룡을 미련없이 내친다.

유성룡은 김덕령은 역모를 꾸민 죄인이라고 확신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 증거는 단지 공초에 김덕령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확실히 ‘김덕령’ 세 글자가 죄인들의 입에서 나온 것 같지는 않다. 『선조실록』 29년 8월 14일 기록의 “이번 역적들의 공초에는 단지 ‘김종사(金從事)’라고만 했으니”라는 대신의 말이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물적증거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범죄자의 입에서 한 번 이름이 거론되면 그걸로 그 사람은 끝장이었다

이몽학의 난에 연루된 의병장 중 김덕령만이 선조의 눈에 나다

그런데 이몽학의 난에 연루된 의병장은 김덕령뿐만이 아니었다.

그(한현)는 자백에서 많은 무리를 끌어들였는데 당시의 명장 김덕령 • 곽재우 • 고언백 • 홍계남 등이 연루되었다. 상은 모두 불문에 부칠 것을 명하고 김덕령만을 잡아올 것을 명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9년 7월 1일)

김덕령만이 선조에게 걸려들었다.

“김덕령은 사람을 죽인 것이 많은데 그 죄로도 죽어야 한다. 이빈(李賓)이 그를 절제(節制)하는 장수였는데도 또한 죽이려고 했었다니 그 죄 역시 크다.” (『선조실록』 29년 8월 4일)

선조는 다시 예전의 일을 꺼내 김덕령을 내친 것이다. 한때는 김덕령에게 호피((狐皮)와 말[馬]까지 주었던 선조였다. 필요할 때는 무슨 짓을 해도 못 본 척 넘어가다가도 필요가 없어지면 토사구팽(兎死狗烹) 하는 것이 선조의 특기다. 유성룡, 이순신도 그렇게 선조에게 버려졌다. 김덕령이 윤근수의 노비를 죽인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이미 김덕령은 죽은 목숨이었다. 단지 그때는 아직 일본군이 남아 있었고, 선조입장에서는 장수 하나가 급한지라 어쩔 수 없이 넘어간 것이었는데, 이몽학의 난과 더불어 선조 29년(1956) 5월에는 강화를 위해 명 사신 양방형 일행이 일본으로 건너갔었고, 8월에는 심유경의 요청에 따라 통신사 황신 일행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강화의 기미가 보이자 이제는 눈엣가시였던 김덕령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여기에 유성룡까지 합세하였으니 김덕령은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실록에 있는 사관의 평을 들어보자.

인품이 일을 만나면 과연 나라를 위하여 근심하는 정성은 있으나 또한 치우치게 자기 소견만을 고집하는 일이 있고 또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는 비평이 있었으며, 김덕령(金德齡)의 죽음에 대하여도 사람들의 말이 없지 않다. (『선조실록』 37년 8월 10일)

당시에도 유성룡이 김덕령을 구제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었던 것이다.

지역감정의 시작은 유성룡?

그런데 유성룡이 지금처럼 지역감정이 있었던 건 아닐까에 대해 의심이 가는 대목이 있다.

“호남은 인심이 본디 나쁩니다. 토적이 봉기하여 혹 왜적에 붙거나 왜적이 물러가기 전에 산골짜기에 꽉 차 있게 되면 매우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 ( 『선조실록』 27년 6월 26일)

당시 양호(호남, 호서) 지역이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였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도에 비해 인구도 많았을 것이고, 부(富)도 집중되었을 것이다. 전라도의 음식문화와 풍류문화가 발달한 이유도 로마의 부흥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만큼 전라도에 대지주가 많았다는 것을 말하고, 또한 이것은 착취당하는 백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을 책임져야 할 임금과 대신들, 평소에 호화를 누리던 양반들은 다 도망을 가버리니 인심이 좋을 리가 있을까. 오죽했으면 왜군에 붙었을까라는 생각도 해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일본군이 패전한 이유 중 하나가 곡창지대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해 조선이 전라도만은 일본에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을 그렇게나마 끝마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라도를 지킨 이순신과 의병장들의 업적은 더욱 빛나는 것이다.

『징비록』에서는 전라도에서 활약한 공이 있는 의병장으로 김천일(전라도 나주), 고경명(전라도 광주), 최경회(전라도 능주) 등 이렇게 세 인물을 들고 있다. 여기서 김천일은 퇴계 이황에게서 수학했고, 최경회는 김천일과 같이 선조 26년(1593) 6월 진주성을 지키다 전사했던 인물이다. 고경명은 선조 25년(1592)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고경명이 전사하고 나서 고경명의 휘하였던 문홍헌 등의 남은 병력은 다름 아닌 최경회가 수습하였다. 참고로 그 유명한 논개(論介)는 최경회의 후처였다.

마무리

이상으로 이 정도 선에서 살펴보면 유성룡이 김덕령을 전라도에서 활약한 의병장에서 제외한 것은 평소 김덕령의 행실이 바르지 못했다고 본 점(좋게 보면 군기를 엄격하게 다스렸다고 볼 수 있겠다)과 증거야 어찌 되었든 송유진, 이몽학 등의 역적들과 연루된 것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징비록』에는 송유진, 이몽학의 난에 대해서도 한 마디 언급도 없다. 민란 발생의 주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조정의 무능을 조금이라도 감추고 싶었을까? 『징비록』은 전쟁이 다 마무리되고, 유성룡 또한 조정에서 은퇴하고 지었던 점을 고려해보면 유성룡은 죽을 때까지 김덕령을 역적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비록 김덕령이 평소 언행이 난폭하기는 했다지만 전시에 권율과 곽재우를 도와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파했던 커다란 공이 있었으니, 확실한 증거도 없이 역모로 몰려 전사(戰死)가 아닌 장살(仗殺)로 인생을 마치게 한 일은 안타까운 일이다. 설령 과거의 살인을 저질렀던 죄가 있었더라도 그가 전장에서 세운 혁혁한 공적이라면 충분히 사면도 가능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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