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섹토피디아 | 휴 래플스 | 우리를 눈뜬장님으로 만드는 곤충 세계
소리소문없이 로드킬 당하는 작은 존재들
만약 한 사람이 일생에서 저지르는 살생의 횟수를 통계 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살생의 대상을 종(種)별로 분류해본다면, ─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 사람과의 직접적인 접촉이나 예기치 못한 폭력 등으로 가장 많은 비명횡사를 겪는 생명은 아마도 곤충일 것이다. 사람에게 해롭다는 이유로, 해롭지는 않지만 징그럽거나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특별히 해롭지도 않고 특별히 징그럽지도 않지만, 그냥 ‘벌레’라는 이유로 사람은 곤충을 그 큼지막한 발로 무지막지하게 짓밟고 짓뭉갠다. 때론 파리채나 살충제 같은 문명의 이기를 총동원하여 서슴지 않고 대량 학살을 자행한다. 때때로 사람조차 마구 죽임을 당하는 잔인한 세상에서 보잘것없이 작고 존재감 없는, 말 그대로 별 볼 일 없는 곤충이 자비를 구할 처지는 아니다.
꼭 의도적이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곤충을 짓밟는다. 바쁘게 길을 걷는 사람의 묵직한 발로 의도치 않게 로드킬 당하는 곤충의 수는 셀 수도 없다. 한 생명체의 일생이 걸린 그 절체절명의 순간, 발아래 꿈틀거리는 뭔가를 발견했더라도 대부분 사람은 자동차 앞에 뛰어든 사슴을 피하고자 급커브 하는 것이 운전자를 더 큰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것처럼 굳이 부상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발바닥을 내딛는 위치를 변경할 의지는 없다. 뜬금없이 일어난 동정심에 자극받아 그렇게 하려고 해도 대부분은 운동 신경이 미처 따라주질 않을 것이며, 설령 그 묘기 같은 민첩한 동작이 성공한다고 해도 그 어색한 발동작은 우리에게 작은 곤혹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자신들(곤충)만큼이나 바글거리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힘겹고 지긋지긋해서 죽고 싶어서였는지, 매끈하게 포장된 길이 마음에 들어서였는지, 아니면 그냥 하릴없이 산책 나왔는지 등등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길바닥 위로 기어 나온 곤충이 넘겨야 할 위기는 첩첩산중이다. 누군가의 동정으로 납작하게 짜부라질 참혹한 위험을 한두 번 넘겼다 하더라도 이런 행운이 발길질의 융단폭격 사이사이를 헤쳐가는 내내 계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사람의 발길이 비교적 뜸한 산책길에서도 따뜻한 햇볕 좀 쬐러 나왔다가 무참한 모습으로 객사한 지렁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육중한 탱크로 빳빳하게 다림질된 사람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징그럽게 아름다운 애벌레> |
곤충의 일생을 충실하게 증언한 사람들
물리학의 ‘끈 이론(string theory)’이 상정한 여분의 추가 차원 중 하나라도 되는 듯 곤충의 세계는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수적으로만 보면 동물의 80%를 차지함에도 사람에게 있어선 너무나도 미미한 존재다. 곤충의 세계는 보려고 해도 잘 보이지 않지만, 그 특유의 혐오감이나 징그러움 때문에 ─ 특별한 취향을 가진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 보고 싶지도 않고 보려고도 않는다. 곤충의 처지에선 사람이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자부심과 생태계의 기반을 다져왔다는 혁혁한 공로 때문에 사람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을 것 같지만, 사람의 처지에선 병을 옮기고 가려움이라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왠지 위생상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모호한 존재다. 그뿐만 아니라 사막메뚜기 같은 경우는 전 세계 경작지와 목초지의 20% 이상을 침범하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사악한 존재로 낙인찍혀 있다.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고 싶지만, ‘지구’라는 삶의 터전을 공유하는 한 절대 그럴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본의 아니게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사는 사람과 곤충은 합의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못해서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마뜩잖은 동거인이다. 곤충에게 있어 사람은 ‘거인 동거인’이고 사람에게 있어 곤충은 ‘작은 동거인’이다. 서로 눈에만 잘 띄지 않는다면, 혹은 위기 적절한 순간에 서로 눈감아주거나 못 본 체하는 아량을 베풀 수 있다면 사이좋게까지는 아니더라도 ─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 그럭저럭 큰 마찰 없이 살아갈 수는 있다.
그러나 호기심이 왕성하고도 유별난 사람들은 곤충을 그렇게 시시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곤충을 해충으로만 보지도 않는다. 마치 세상을 축소해 놓은 듯한 소우주 같은 곤충의 세계에 흠뻑 매료된 그들은 곤충을 서로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친구로까지 격상시킨다. 그들은 파파라치처럼 시간과 노력을 들인 집요하고 세심한 관찰로 곤충의 사생활을 파헤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그러한 열정을 통해 불가해한 일로만 여겨왔던 곤충의 신비로운 세계를 사람의 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었다. 그들에겐 곤충은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이자, 명성과 기쁨을 안겨준 연구 대상이며, 예상치 못한 안식처를 안겨준 달가운 동거인이다.
유명한 곤충학자 파브르(Jean-Henri Fabre)는 왕성한 호기심과 지칠 줄 모르는 관찰로 베일에 싸인 곤충의 진짜 세계를 폭로함으로써 곤충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의 기이한 곤충 열풍의 도화선을 당긴 인물이기도 하다. 생물도감 일러스트레이터인 코넬리아 헤세 호네거(Cornelia Hesse Honegger)는 기형으로 태어난 곤충들을 심미적이면서도 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통찰력으로 그려냄으로써 방사능 오염의 심각성을 인류에게 알리고 있다. 아마도 인류 최초의 곤충학책이자 귀뚜라미 애호가들을 위한 현존하는 최고의 해설서인 가사도(賈似道, 1213~1275)의 『귀뚜라미 서(書)』는 중국에 심오한 귀뚜라미 문화를 심어주었다. 1973년 노벨 생리학 • 의학상을 받은 카를 폰 프리슈(Karl von Frisch)는 보통 사람의 눈에는 하릴없이 윙윙거리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벌의 춤을 사람의 언어로 풀어냄으로써 인류의 무지에서 비롯한 곤충의 본능에 대한 편견을 정화하는 데 일조했다. 이 밖에도 딸과 아메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거느리고 곤충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유럽에서 잘 알려진 여성 메리안(Maria Sibylla Merian), 곤충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요리스 호프나겔(Joris Hoefnagel) 등 휴 래플스(Hugh Raffles)의 『인섹토피디아 - 인간과 곤충의 아름답고 위험한 공존 이야기(Insectopedia)』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등장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위대한 업적으로 조명받은 사람들과 그러지 못한 사람들 모두가 짧지만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곤충의 일생을 충실하게 증언한 덕분에 인류 문명의 경계선 밖에서 마땅히 짓밟혀지고 짓뭉개져야 할 존재로 취급받았던 곤충은 뒤늦게나마 문명의 경계선 안으로 들어와 약간의 관심과 배려 속에서 조금은 우쭐할 수 있게 되었다.
<공원에서 내 손 위로 폴짝 뛰어든 노린재목> |
악연과 선연으로 뒤엉킨 사람과 곤충의 아찔한 공존
바로 앞에서도 봤듯 곤충과 사람의 인연이 평소 우리가 맞닥트리는 그런 께름칙하고 찝찝한 상황처럼 꼭 악연인 것만은 아니다. 파브르의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 더듬이는 곤충이라는 제짝을 만난 덕분에 그는 ‘곤충학의 아버지’, ‘벌레의 시인’, ‘곤충의 아저씨’라 불리는 위대한 곤충학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폰 프리슈는 벌들의 민첩한 춤에서 높은 지능의 유산 중 하나로써 오직 사람만이 터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왔던 ‘언어’를 발견한 덕분에 노벨상을 받았다. 지금도 많은 일본인이 기이한 열정과 비상한 애정으로 곤충을 애완동물의 한 종류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본의 독특한 곤충 열풍은 미야자키 하야오(宮﨑 駿) 감독과 데즈카 오사무 감독(手塚 治虫)이 곤충 소년으로 성장하도록 영향을 미쳤고, 결국 두 감독은 곤충에게서 영감을 받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철완 아톰」이라는 애니메이션 역사에 길이 남을 수밖에 없는 명작을 탄생시켰다. 유전학연구소에 없어서는 안 되는 앙증맞은 주인공 초파리들의 아낌 없는 거룩한 희생은 많은 과학자의 이름을 빛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과학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어디 이뿐만인가? ‘노래하는 친구들’, ‘노래하는 형제들’이라는 친근한 애칭으로 불리는 귀뚜라미는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의 ‘귀뚜라미 씨름’ 문화를 대표하는 마스코트다. 비록 ‘귀뚜라미 씨름’이 ‘도박’이라는 사람의 탐욕에 오염되기는 했지만, 중국에서 귀뚜라미는 사람의 세계와 곤충의 세계를 평화롭게 잇는 몇 안 되는 튼튼한 다리다. 일본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는 곤충을 소재로 한 축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뭔가를 짓뭉개는 걸 좋아하는 일부 남자들은 자기 자신이 작은 벌레 크기가 되어 여자의 발아래 깔려 바스러지기를 바라는 망측한 상상으로 자위행위를 한다. 비슷한 취향을 가진 여자는 생사기로에 놓인 발밑의 벌레를 헤어진 옛 남자 친구라고 생각하고 짓밟고 짓뭉개면서 복수의 쾌감에 전율한다. 영악한 마야인들은 말벌집을 이용한 폭격으로 적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인섹토피디아』는 인류와 곤충의 께름칙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신비스럽고 불가사의한 인연과 그 아찔한 인연을 필두로 인류와 곤충이 아슬아슬하게 서로 뒤엉켜 사는 천태만상을 수필처럼 친근하게 묘사했다. 그 인연은 앞서 언급한 대로 파브르나 폰 프리슈처럼 기쁨의 인연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통념을 통렬하게 조롱하는 남자의 기이한 성 충동이나 통념에 통쾌하게 부합하는 여자의 분노를 해소하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밝은 모습 뒤에는 언제나 어두운 이면이 존재하듯 인류와 곤충의 인연이 단순히 악연을 넘어서 잔혹한 학살로 이어진 비극도 종종 있었다.
여전히 우리를 전율케 하는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자행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유대인을 독일인의 피를 빨아먹는 이 같은 기생충으로 깎아내린 ‘위생학’이 철의 장벽처럼 버티고 있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 諭吉)는 중국인, 대만인, 조선인 등 아시아인에 대한 멸시와 편견을 심는 데 앞장섬으로써 훗날 일어날 ‘난징 대학살’의 불씨를 지핀 대표적인 악덕 지식인인데, 그가 아시아인을 헐뜯는 데 사용한 동물 중 하나가 ‘장구벌레’다. 투치족에 대한 학살은 마치 나치의 구호가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바퀴벌레 박멸’이라는 너무나도 익숙한 구호로 명명되었다. 이처럼 인류가 자행한 학살의 선행 조건은 목표가 된 집단을 사람이 아닌 특정한 유형의 생물로 규정하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개나 돼지보다 더 죽이기 쉬울뿐더러 죽이고 나서도 일말의 가책을 느껴야 할 필요가 없는 벌레, 그중에서도 ‘바퀴벌레’나 ‘이’ 같은 해충이 주인공이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류와 곤충의 인연은 악연이고 선연이고 간에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군사적, 과학적 등으로 인류 문명 전반에 걸쳐 골고루 걸쳐있다. 선뜻 떠올리기 어려운 추상적인 관계는 제외하더라도 곤충은 삶의 원치 않는 동거인으로서 투명 인간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신처럼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존재다. 그것은 재미없는 외모를 가졌지만, 다리 수에서만큼은 최고인 노래기가 그 엄청나게 많은 다리로 마치 간이라도 보듯 사람의 세계 곳곳을 찔러보는 것 같다. 물론 진짜로 그러려면 노래기의 다리 길이가 엄청나게 길어야 하지만 말이다.
박멸당할 위기에 있는 우리의 ‘불편한 동거인’
사람과 곤충 간의 미묘하고 께름칙하면서도 한편으론 아름답고 정겨운, 마치 보이지 않는 그물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를 적당한 두께의 책으로 담아내려고 노력한 것이 『인섹토피디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평범한 곤충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얄팍하고 오만한 사람의 지식으로서는 곤충의 언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결코 결말 지을 수 없는 이야기다. 사람이 곤충을 바라보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지만, 곤충을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으로만 구분 지으려는 사람의 무식한 이분법으로는 결코 진실을 밝힐 수 없다는 점에서 ‘네버엔딩 스토리’다. 한쪽이 다리를 걸치면 한쪽은 짓뭉개질 수밖에 없고, 다른 한쪽이 다리를 걸치면 한쪽은 소름이 돋는 불협화음 같은 두 종의 관계는 이 책의 난해한 문장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다. 우리가 응축된 인류 지식을 총동원하여 곤충을 관찰하더라도 거기에는 인류 지식의 한계를 절실히 드러내는 어쩔 수 없는 추측과 추론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이 불편한 동거인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해할 수 없다면 당연히 신뢰할 수도 없다. 신뢰할 수 없으니 여전히 곤충은 보는 즉시 약간의 소름과 불쾌함을 감소하고서라도 확실하게 밟고 뭉개야 할 그런 작고 볼품없는 존재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밟고 뭉개고 으깨고 짓이겨도, 아예 직업을 바꿔 인생 전부를 곤충 퇴치에 쏟아붓는다고 하더라도 곤충은 쉽게 박멸되지 않는다. 아니 박멸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까? 무려 5억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존재가 기껏해야 수십 만년 된 존재에게 멸종당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문제지만, 인류 전부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곤충 박멸에 나선 지금은 자존심 운운할 상황이 아니다. ─ 그들이 인지할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이 ─ 곤충으로선 종의 운명이 걸린 절박한 상황이다. 사람 없이 곤충은 살 수 있지만, 곤충 없이 사람은 살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류의 생존도 위협받는다.
인류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먼 옛날부터 알게 모르게 생태계를 관리해 온 곤충으로서는 사람을 무시할 수 있지만, 전적으로 생태계에 의존하는 사람으로서는 곤충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 자연의 이치로 따지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되먹지도 않은 사람의 이치로서만 따지려고 든다. 이 세상을 대표하지 않는 것 같지만 어디에선가 조용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고마운 존재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해주지는 못할망정 ‘해충’이라 하여 수시로 핍박하고 탄압한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뿌리 뽑는가 하면 홀로코스트 정도는 웃고 넘길 학살이 되풀이된다. 매초 매분 매시간 사람의 무심함 때문에 발생한 엄청난 곤충 난민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100년 안에 모든 곤충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과학자들의 우려는 과장도 아니고 기우도 아니다. 그것이 여섯 번째 대멸종의 시작이자 인류의 종말을 알리는 서막이 될지라도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징그러운 벌레만 보면 어찌 된 이유인지 짓밟고 싶은 것이 우리의 착잡한 본능일 것을. 아니면 인구 폭증이 인간 생명의 물질화와 인명 경시 풍조를 불러온 것처럼 곤충의 어마어마한 개체 수가, 그리고 아무리 밟고 밟아도 끊임없이 어디에선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 사람만큼이나 ─ 엄청난 번식력이 화를 자초했다고 비겁한 핑계라도 둘러대야 할까? 결코, 곤충은 알아들을 수 없는 우리의 자조 섞인 넋두리를?
<운동 기구 위에서 날 보고 있는 여치? 메뚜기?> |
손으로 죽일 용기가 없다면 그냥 내버려 둬!
엄청난 종 수만큼이나 엄청난 개체 수를 자랑하는 곤충과 마치 곤충의 거룩한 업적을 따라잡으려는 듯 열심히 생태계를 파괴하며 영역을 확장하고 인구를 불리는 인류의 복잡미묘한 공존을 다룬 흥미로운 책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복잡미묘한 관계만큼이나 복잡미묘한 문장이 독자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괘씸한 책이기도 하다. 번역이 문제일까? 원문이 문제일까? 만약 번역이 문제라면 지금까지 본 번역서 중에서 가장 무성의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옮긴이만 뭐라고 탓할 수 없는 것이 중간중간 매끄럽게 이어지면서 보통 수준의 책 읽기가 가능한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난독에서 헤매다가 모처럼 쉬운 텍스트를 만나면 마치 신세계를 만난 것처럼 기쁘다. 하지만, 이런 기쁨도 잠시, 곧 괴상망측한 수식어가 나의 빈곤한 뇌 주름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과 여지없이 마주치게 된다. 벌레보다도 끔찍하고 그 벌레는 짓밟는 것보다도 징그러운 문장들이다. 뭐, 이 모든 것이 나의 부족한 독서력 탓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한편으론 ‘읽기 쉬운’과 ‘읽기 어려운’의 경계 사이를 밥 먹듯이 넘나드는 일관성이 부족한 문장은 저자가 두 명이거나 그 반대로 옮긴이가 두 명이라고 추론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독자를 속였다는 점에서 명백한 사기 행위다.
자, 이제 벌레처럼 지긋지긋한 이 글도 마무리 지어야 할 시간이다. 소리 없이 세상을 지배하는 곤충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곁 어딘가에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고 보고 싶지도 않지만, 그들은 그런 사람의 케케묵은 감정이나 부당한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각자의 삶을 향해 정진하고 있다. 그것은 세상이 아무리 부조리하더라도,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더라도,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세상에 내 편이 하나도 없더라도 묵묵히 자기 일에 매진하며 신산한 삶을 사는 사람의 일생을 떠올리게 한다. 이쯤 되면 동병상련의 애틋한 정이라도 느끼며 서로 등이라도 토닥여 주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우리가 그들의 등을 토닥여 줄 땐 이제 막 태어난 아기의 손을 잡는 것 이상으로 아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마치 곤충의 비극적인 삶을 몸소 보여주겠다는 듯 내 책상 위로 이름 모를 벌레 한 마리가 순간 이동했다. 그의 대담한 용기와 그 절실함에 감동한 난 세상의 순리대로, 그리고 ─ 내 멋대로 판단한 ─ 그의 가상한 뜻대로 그를 짓뭉갰다. 다만, 이 경우에는 상황상 발을 사용할 수가 없어서 대신 투명테이프를 동원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투명테이프라는 값싼 물질만큼이나 값싼 죽음이다.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에서라도 내 손으로 직접 죽였어야 했다는 후회와 양심의 가책이 잠시 나를 괴롭혔다. 명예롭게 손으로 죽일 용기가 없다면, 그냥 내버려 둬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난 가끔 천장 구석에 진을 친 거미를 발견하면 베란다 한 귀퉁이에 어정쩡하게 모여 있는 화분으로 옮겨주는 친절도 베푼다. 그런데 내 책상이나 잠자리를 침범한 녀석들에게는 마치 나의 신성한 사유지에 침범한 도둑을 대하듯 가차 없다. 나도 어쩔 수 없는, 그리고 벌레만큼이나 보잘것없는 인간일 뿐이라고 자책하며, 지금까지 나의 악의 없는 폭력에 어이없게 희생된 모든 곤충에 애도를 표하며,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에 심심한 조의를 표하며, 그리고 끝으로 이 징글징글한 글을 묵묵히 읽어준 분들에게 고마움의 마음을 전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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