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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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탐정 이상 1 | 낙상과 독서, 그리고 실망

경성 탐정 이상 1 | 김재희 | 낙상과 독서, 그리고 실망

책 리뷰 | 경성 탐정 이상 1 | 김재희 | 낙상과 독서, 그리고 실망
review rating

낙상이 빌미가 되어 대출한 책

벌써 4주 전이다. 원숭이 조상을 뒀다고 잘난체하며 철봉에 매달렸다가 낙상한 것이. 이날 생전 처음으로 낙상의 고통을 겪었고, 이날 생전 처음으로 119 응급차를 타 봤고, 이날 생전 처음으로 응급실을 이용했고, 이날 생전 처음으로 CT를 촬영했고, 이날 생전 처음으로 휠체어를 탔다. 다행스럽게도 뼈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떨어진 충격으로 다리가 크게 뒤틀리는 바람에 3주 정도가 지날 때까지도 지팡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한동안은 절뚝발이 신세를 벗어나긴 어려울 것 같다. 불과 1.5M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는 사고로도 다리 병신 되는 것 아니냐는 둥 갖은 궁상 다 떨며 된통 고생해보고 나니 교통사고 후유증의 어마어마함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울 것이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화장실 갔다 오는 것조차 행군 막바지에라도 이른 것처럼 힘들었을 땐 내 삶의 몇 안 되는 기분전환 거리이자 제대 이후 빠짐없이 해온 운동이기도 한 산책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내 삶에서 영영 사라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비관적인 망상이 통증과 불안함에 시달리며 널브러져 있는 먹잇감을 놓칠 리가 없다. ‘비관’의 섬뜩한 미소에 홀린 난 지옥 불에 담가지는 처참한 고통에 시달리고, 이렇게 불안과 비관과 고통에 함락당한 나의 박약한 영혼은 불구가 되어 죽음을 염원한다. 사람이란 이다지도 나약한 동물이다. 한 번 정신이 뒤둥그러지게 되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다.

이런 잡념과도 같은 망상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즐겨하던 교양인의 특권이자 뇌 운동이자 정신 이완 운동인 독서다. 그런데 하필 사고 전후에 읽고 있었던 책은 어렵기 그지없는 철학에 관한 책이었다. 내 것 같지 않은 한쪽 다리를 좀비처럼 질질 끌고 다니면서 10평 남짓한 마루를 오갈 데 없이 방황하는 이 불행한 교양 동물에게 철학이라니, 당치도 않다. 무엇보다 강한 진통제에 비몽사몽 취한 나에게 철학은 마취제나 다름없는 강력한 수면 효과를 불러올 것이 뻔했다. 도서관에 간다는 것은 엄두를 못 낸다. 그래서 전자도서관을 뒤지다가 예전에 눈여겨보았던 추리소설, 때가 되면 한번 읽어야겠다고 찜해놓았던 추리소설, 김재희의 『경성 탐정 이상 1』을 일말의 망설임 없이 가뿐 마음으로 대출했다.

책 리뷰 | 경성 탐정 이상 1 | 김재희 | 낙상과 독서, 그리고 실망
<한때 이상이 근무했던 조선총독부 전경
(Unknown authorUnknown autho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경성’에 ‘경성’이 없다???

알다시피 ‘실로 오래간만에 찾은 한국 추리소설이다’라고 말하기에는 내 블로그에 한국 추리소설 리뷰는 거의 전멸이다. 아직 블로그에 리뷰를 올리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최근에 읽은 한국 추리소설은 박은우의 『청계산장의 재판』과 황세연의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와 『붉고 깊은 구멍(또는 시지프의 면죄부)』, 도진기의 『가족의 탄생』, (여기까지는 초고만 작성하고 블로그에는 올리지 않은 리뷰들) 그리고 꽤 오래전에 읽은 김내성의 『마인(魔人)』과 김성종의 『최후의 증인』 정도가 내가 읽은 한국 추리소설 전부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참고로 도진기와 황세연은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을 통해 알게 된 작가들이다. 같은 책에서 「그녀는 알고 있다」의 손선영, 「다이어트 클럽」의 최지수, 「인간을 해부하다」의 류성희 같은 주옥같은 작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최근에 읽은 『청계산장의 재판』은 매우 실망스러운 소설이었지만, 그래도 『경성 탐정 이상』은 내심 기대했다. 그래봤자 돌다리를 두드리며 건너는 듯한 조심스럽고 신중한 기대이기는 했지만, (역시 초고만 작성하고 아직 블로그에는 올리지 않은) 미야베 미유키의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가 남긴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그래서 내가 살아보지 않은 시대에 대한 막연한 향수가 스펀지에 스며든 물기처럼 촉촉하게 남아 있는, 그렇게 약간 고양된 내 감성은 ‘경성 시대’를 향수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생각했던 것보다 기대감이 사뭇 컸던 것 같다.

하지만, 『경성 탐정 이상』에 ‘경성’이라 할 것은 없었다. 이름만 경성인 무색무취의 도시가 있을 뿐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엔 따뜻한 인간의 정이 있는 사회를 향한 동경, 그리고 작은 것도 함께 나누고 도와가며 살았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의지가 과장되지 않은 은은한 묘사로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김재희의 소설에 그런 아우라가 없다.

장르소설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언제까지나 ‘장르소설’이라는 자기기만에 숨어 작품의 질적 향상을 도외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로서의 직무 태만이며 국민의 독서력을 하위 평준화시키는 테러다. 아무튼, 한국 문학이 진정 발전하려면 사람들이 즐겨 읽는 장르소설부터 개과천선에 가까운 변화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책 리뷰 | 경성 탐정 이상 1 | 김재희 | 낙상과 독서, 그리고 실망
<이상(왼쪽)과 박태원(가운데)은 실제로도 단짝이었다고 한다(출처: 중알일보)>

‘추리소설’에 ‘추리’가 없다!!!

1970년대에 처음 등장한 일본의 신조어 ‘오타쿠’가 등장하질 않나, 1914년 조선호텔에 설치된 오티스의 한국 최초 전동엘리베이터를 수압식 승강기로 혼동하질 않나 여러모로 엉성한 소설이다. 철학 같은 난해한 책을 읽을 때만 난독증이 발병하는 줄 알았더니 조악한 소설을 읽을 때도 난독증이 발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진통제를 두 종류 이상 먹고 있음에도 책을 읽는 간간이 두통을 겪기도 했다. 인제와 생각해보면 도서관에서 대충 흩어봤더라면 도서관까지 왕복하는 발품이 아까워서라도 엔간해선 대출하지 않았을 책이었지만, 전자도서관은 침대에 편하게 누워 편하게 클릭 한 번이면 편하게 대출이 가능하니 ‘참으로 세상 편해졌다’ 하는 속 편한 생각으로 ‘시리즈 다섯 권 다 읽을 동안이면 아픈 다리도 어느 정도 치유되겠구나’ 하는 야심 찬 생각으로 대출할 수 있었지만, 1권을 읽고 난 지금으로선 나머지는 야멸차게 포기해야 할 듯싶다. 장르소설 분야만 놓고 봐도 전반적으로 일본 작가들이 한국 작가들보다 글을 잘 쓴다는 것만 다시금 깨닫는다.

마치 수사보고서를 읽는 듯한, 혹은 역사 교과서를 읽는 듯한 미적지근한 사건 전개와 약간의 꼬임도 없는 사건은 새 실타래를 굴리는 것처럼 술술 잘 풀린다. 추리소설이지만 ‘추리’가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흠이다. 이상과 박태원이라는 실존 인물을 셜록 홈스와 왓슨 같은 콤비로 재구성한 것은 상당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고도 남는 도발과도 같은 참신한 아이디어였으나 그것이 다였다고 할까나?

이렇게 혹평에 가까운 리뷰를 남긴 것은 ‘리뷰는 정직해야 한다!’라는 소신을 저버릴 수가 없기도 했지만, 기대감이 꽤 있었던 만큼 아쉬움도 컸기 때문이다. 사실 살아보지 않은 시대를 소설적 상상력과 문자 지식에 의지해 실감 나게 재구성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미야베 미유키처럼 많은 작가가 그런 기적 같은 일을 해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독자가 ‘과거’를 읽는다는 것은 타향살이 10년이면 발병할 법한 향수병을 앓으면서 현실의 고적함과 적막함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정서적 고향을 갖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성 탐정 이상』은 그런 독자의 무의식적인 소망을 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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