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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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마 | 인류의 유구한 영생의 욕망

나를 보내지마 | 가즈오 이시구로 | 인류의 유구한 영생의 욕망

헤일셤(Hailsham) 출신의 31살의 캐시. 11년 동안 간병사로 살아오면서 간병사로는 보기 드물게 스스로 원하는 환자를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함을 인정받아 온 그녀는 간병사로서의 삶을 몇 개월 남겨 두고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헤일셤. 그곳은 그녀가 유아시절부터 16세가 되어 학교를 떠날 때까지 소중하지만, 의문으로 가득 찬 추억을 남겨준 곳이었다. 그리고 더없이 소중했던 친구 토미와 루스가 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마담의 화랑에 간 작품이 하나도 없었을 정도로 창조와는 거리가 멀었던 토미. 천진하고 덩치가 컸던 토미는 분위기 파악에 언제나 한 박자 늦어지는 무디고 미련한 감각으로 놀림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놀림을 받으면 통제하지 못하는 발작적인 행동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자신을 내버려온 토미는 제럴딘 선생님의 미술 시간에 장난삼아 그린 '풀밭 위의 코끼리' 그림을 시발점으로 확실하게 학생들의 놀림감이 되어 간다.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선생님의 과도한 친절과 배려로 실제로 그림의 잘된 점을 칭찬하자 아이들의 분개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열세 살이었던 상급반 2학년 때는 토미에 대한 박해가 절정에 달했지만, ‘꼭 창의적일 필요 없다는…….,….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우리에게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는’ 루시 선생님의 고백 같던 조언을 토미가 진지하게 받아들인 이후 조롱을 당하면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고 박해는 점점 사라져갔다. 토미는 변했고, 방법이야 어찌 되었든 성공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면서 자신의 말은 실수였다고, 잊어버리라고 말하던 루시 선생님. 훌륭한 그림이 하나의 증거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그렇게 헤일셤을 떠났다.

암시쟁이 루스는 아는 척하는 것을 좋아하고 변덕이나 화가 풀릴 때는 호들갑을 떨며 화를 낸 상대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기분파였다. 가식적인 그녀는 길에 떨어져 있던 잡지의 광고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은 희망을 품으면서 자신이 특별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언제나 사태를 있는 그대로 믿고 싶어하는 루스와 보이는 모습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에 이끌리는 ‘나’와의 갈등과 화해의 반복은 이들이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다듬어져 가는 내면의 성숙에 필요한 밑거름으로 작용했으리라.

루스의 임종을 얼마 안 남겨두었을 때 토미와 루스 '나', 이렇게 셋이서 늪에 좌초된 낡은 낚싯배의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나’에게 지난날의 잘못을 회상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가장 소중한 선물을 남기고 떠나는 쓸쓸하고 공허해 보였던 루스의 모습과 지난날 당당하고도 오만했던 그녀의 모습에서 모순보다는 두 모습 사이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그녀에게만 간직되어 있었던 아득하고도 아련한 아지랑이 같은 서글픈 기억의 한 조각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헤일셤에서 유일하게 외부의 물건을 구할 수 있었던 판매회와 학생들의 창조적인 작품들을 서로 교환할 수 있었던 교환회 이야기. 그리고 그 뒤에 공식적으로, 하지만 비공개적으로 감춰져 있던 의문의 그림자들과 어렴풋이 자신들의 미래를 알고는 있지만, 그 누구도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을 동시에 가슴에 담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모든 궁금증은 마지막 루스의 유언대로 ‘나’와 토미가 마담의 집을 방문하면서 의문의 실마리를 풀어헤칠 한 가닥의 빛을 만나게 된다.

<NEVER LET ME GO | Official Trailer | FOX Searchlight(출처: https://youtu.be/sXiRZhDEo8A)>

우리는 지금 당장 잊고 싶은 고통스럽고 슬픈 기억과 함께 영원히 죽는 그날까지 기억하고 싶은 소중한 추억들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그렇다고 그 모든 걸 기억하는 상태로 살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게 모든 걸 마음과 머릿속에 넣어두고 산다면 정말 하루도 못 가서 미쳐버리지도 모르는 일이다.

뜻하지 않게 문득문득 떠오르는 어두운 과거, 잠시 회상하다가 잊혀 가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일들, 마음의 위안을 위해 꺼내어 되새겨 보는 소중하고 따뜻했던 추억 등 우리의 머릿속은 이런저런 기억의 파편들과 조각들로 뒤죽박죽 되어 있지만, 그것을 정리할 새도 없이 매일 새로 각인된 따끈따끈한 조각들을 공급받는다. 우리는 영영 정리될 것 같지 않은 기억의 조각들을 그렇게 뒤에 남겨둔 채 막연한 새 희망을 품고 내일을 맞이하게 된다. 어제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기억의 조각들은 조각에서 파편으로, 그리고 그 파편에서 차갑게 식은 가루로 부서지는 망각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희미한 기억의 가루들은 영영 찾지 못할 깊은 어둠의 심연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고, 아직 남아 있는 기억의 조각들과 파편들은 우리 인식 속에 공존토록 붙잡아 놓아 현재의 기억들과 '나'를 지탱해준다.

주인공 캐시는 그런 망각의 가루들을 하나하나 긁어모아 하나의 파편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거기에 몇 개의 파편을 이어 붙어 하나의 완벽한 조각들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런 파편과 가루 중에는 ‘기증’, ‘근원자’, ‘일반인’, ‘복제’, ‘장기’……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SF적인 호기심을 불러내지만, 그 내용은 전혀 SF 적이지 않기에 혹시라도 영화 <아일랜드>를 연상시키면서(나도 조금은 그러했지만) 이 작품을 선택한다면 크나큰 실수임을 미리 지적해 주고자 한다.

내가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마(Never Let Me Go by Kazuo Ishiguro)』를 읽으면서 받은 굵직한 느낌을 말하라면 역시 ‘인간의 오만함’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생물은 스스로, 또는 다른 짝과 함께 무작위적인 복제를 해왔고, 그 복제는 생명의 기원과 관련된 역사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미 과학계 정설로 자리 잡은 진화론적인(진화론 자체는 교황이나 다른 대주교들도 인정하고 있다. 다만, 그들은 그 시작을 신의 의도로 보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 관점에서 우리는 모두 한 핏줄이고 그렇기에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면 다른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는 거고,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면 다른 동물에게도 영혼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 대부분은 그들이 인간에게는 저능하게 보이는 다른 동물들과 한 핏줄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해왔고, 그런 와중에 다른 동물들과 인간과의 여러 차이점을 강조하게 되면서, 그 중 가장 큰 차이점으로 영혼을 들먹인다. (사실 개와 인간의 차이점만큼이나 같은 점도 많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를 보내지마』에서도 역시 영혼은 중요한 문제이다. 근원자들이나 일반인들은 자신들의 생명 연장을 위한 복제 시스템의 뒷얘기나 참모습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그들이 도축되는 과정을 상상하거나 그런 사실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설령 그 끔찍하고 불행한 그들의 사육 시스템과 도축 과정을 TV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알게 된다고 해도, 곧 잊거나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 불편한 진실을 보고 생각을 고치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아주 극히 드물다. 마트에서 고기 세일만 하면 저녁 시간이 다가오기도 전에 동나는 걸 보면 그 이유를 알고도 남을 것이다. 들었으되 듣지 않은, 보았으되 보지 않은…. 우리의 오만함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무튼, 그러한 시스템에 반기를 들고 그들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헤일셤의 교환회가 등장하고 그들에게도 창조적인 작품을 통해 내면의 모습, 즉 영혼의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그들도 자신들과 같은 영혼이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고자 노력하게 된다. 에밀리 교장이 이 운동의 선구자가 되어 처음에는 많은 정치가나 유력자, 그리고 일반인들에게서 호응을 얻어내는 듯했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사람들은 그들이, 즉 복제자들이 자신들보다 뛰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다시 등을 돌리게 되고 이렇게 지원이 끊어지게 된 헤일셤은 폐교하게 된다. 하지만, 에밀리 교장은 복제자들이 일반인들과 같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진실의 증명 여부에서 더 나아가 근본적인 복제 문제를 거론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이 운영하는 가축 사육 시스템에서도 가축들이 태어나 도축으로 이르기까지의 삶의 환경이나 도축 과정의 개선을 위해서는 많은 이들이 큰 소리를 내지만, 정작 문제가 도축의 허용 여부에 대한 문제에 이르러서는 그 목소리들이 현저히 작아지는 우리의 현실과 별다를 바가 없다.

인간은 필요에 의해 가축을 사육하고 역시 필요해 의해 그 사육되는 가축들의 종류에 ‘복제자’를, 이 작품에서처럼 하나 더 추가한 것뿐이다. 몇 년 전에 SBS TV 동물농장에서 사육장에 갇힌 상태로 버려진 개들을 찾아냈던 방송이 기억난다. 대부분의 수십 마리의 개들은 굶어 죽은 상태였지만, 그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은 몇몇 개들은 옆에 죽은 동료의 주검에 입을 대기는커녕, 동물협회 사람들이 먹을 것을 주자 이미 오래전에 굶어 죽어서 가죽만 앙상하게 남아 쓰려져 있는 동료의 주검에 다가가 입으로 물어 일으켜 세우면서 마치, "여기 먹을 것이 있으니 같이 먹자"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물겨운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서는 같은 동료를 먹는 걸 당연한 걸로 여기게 하는, 인간만의 점유물이라고 하는 지능의 상징인 '이성'. 더 나아가 식욕의 만족을 위해 인육을 먹는 인간들의 빛나는 문화. 앞에 언급한 개들은 굶어 죽어가면서도 본능적으로 동료의 시체는 건드리지 않았지만, 인간도 이처럼 본능적으로는 거부할지는 몰라도 이성적으로는 먹어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살아남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인간사의 잔혹한 역사는 너무 도가 지나치다. 왜냐면 인간은 생명의 근원인 자연과 지구를 파괴하면서까지도 인류의 행복과 번식을 위한다는 거창한 명분 아래 모든 걸 정당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달려가다 지구가 황폐해져 더는 바다에서조차 생명의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더라도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그 잘난 '이성'이 끔찍한 전쟁과 학살의 근본 원인이라고 한다면 너무 억측일까. 정말 다른 동물들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스스로 지구 최고의 생명체라고 자부하지만, 그 자축은 너무 이르지 않을까. 최고의 생명체가 무엇을 기준으로 정의되느냐에 따라 답은 틀리기 때문이다. 만약 그 종이 지구에서 생존했던 기간을 우선으로 보자면 인간은 순위에서 밑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단연컨대 살아남는다는 사실만 보면 지능만이 최고는 아니다. 공룡이 1억 6천만 년 이상 지구에서 생존했던 사실을 잊지 말자. 또한, 작은 랍토르류의 후손인 조류가 아직 건재하고 있고, 영장류는 5,500만 년, 호미니드 사촌은 700만 년, 인간은 고작 20만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만약 6,550만 년 전에 운석 대충돌로 공룡이 멸종되지 않았더라면 그 당시 쥐새끼 정도에 불과했던 포유류는 지금까지 그 상태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능은 생존에도 도움이 되지만, 멸종에도(자기 종이든 다른 종이든) 도움이 된다는(인간이 만들어낸 다양하고 놀라운 무기들을 보라. 거기에 생화학이나 바이러스 무기들을 보탠다면 정말 금상첨화이다) 동전의 양면성과 지능이 높다고 해서 결코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 아닌가.

소설 『나를 보내지마』에서 일반인들의 복제자들에 대한 시선은 당연히 곱지 않다. 혐오스러운 동물이나 거미 같은 곤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반면에 주인공들을 포함한 복제자들은 이러한 도구적이고 제한된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이의 없이 받아들인다. 단지 그 제한된 삶에서나마 좀 더 다른 것들을 얻으려고 투쟁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감옥에서의 제소자들이 감옥 안에서의 여러 불편부당한 점에 대해서는 크고 작은 마찰들을 일으키지만, 감옥 그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작가가 복제 문제를 다룬다기보다는 일반인들의 이기심에 따라 만들어진 또 다른 인간의 세계라고 볼 수 있는 복제자들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반인들은 자신들의 생명연장 꿈을 실현하기 위해 복제자들을 생산 및 사육하는 것처럼 그들이 절실히 필요한 건 오히려 일반인들이지만, 그런 일반인들의 부당한 대우와 불쾌한 시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반면에 그들을 이렇게 만든 일반인들을 탓하지 않고 모든 현실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복제자들. 아마도 그것은 막연하고 불안한 제한된 삶을 살아가는 복제자들에게도 희망을 품게 하고 나름대로 꿈도 가지게 하는 뭔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대로 성장하고 그런대로 적응해서 예전의 꿈들은 체념과 낙담으로 대체되고 그럭저럭 기증자로서 선택받은 삶을 살아가지만, 주인공 '나'와 그녀의 친구들은 과감히 거기에 도전장을 내민다. ‘도전’이라는 거창한 단어에 걸맞지 않게 매우 축소적이고 협소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들은 체념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것일까. 루스의 바람대로 마담을 방문하고 예전 헤일셤 교장을 만나고 그제야 그들은 '들었으되 듣지 않은' 지난날의 과거를 회상하며 다른 동료처럼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게 된다.

헤일셤 시절의 무수한 소문 중 하나인 전국의 모든 분실물이 모여 있을 거라고 여겨지던 영국의 로스트 코너 노퍼크. 또한, 헤일셤 시절 잃어버린 카세트테이프를 토미와 함께 찾아낸 곳이기도 한 곳. 주인공 '나'는 토미가 죽은 후 노퍼크를 찾아가 파도에 밀려와 해변 경작지 주변 철망에 걸려 있던 많은 잡동사니를 보면서 토미를 회상하는 장면은 다른 복제자들과 달리 '나'는 체념과 침묵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들었으되 듣지 않은’ 라는 말에 ‘보았으되 보지 않은’이라는 문구도 보태어 인간의 어리석은 오만함과 난폭한 이기심이 인간을 어디까지 끌고 왔고 앞으로 어디까지 몰고 갈지 한번 상상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지구에서 영원한 종은 없다. 우리 인류의 찬란한 문화유산도 언젠가는 한 줌의 흙이 되어 다른 생명의 발바닥에 묻히고 말 것이다. 내가 너무 회의적이고 염세적인가. 매일 TV와 핸드폰, 컴퓨터에 매달려서 생각 없이 살아가는 바쁜 현대인들에게 가끔은 이런 과학과 문명에 대해 회의와 염세에 빠져보는 것도 정신적 성장을 위해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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