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의 고향 | 최인호 | 외로움이라는 이름의 괴물에 삼켜진다는 것
우리들이 서로 만나 약속도 없이 서로의 살을 맞댄 것은 사랑 때문이긴 해도 우리는 결과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혼자, 혼자, 혼자뿐이었다. 술을 마시고, 사랑을 하고, 정사를 나누고, 식사를 하고, 영화구경을 하고, 산보를 하고, 육교를 오르내리고, 커피를 나눠 마시고, 껄껄 웃어도 우리는 결국 혼자였다. (2권, p265)
한때 그녀가 살아 있었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인 1972년에 신문 연재를 시작했으니, 반올림하면 어느덧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50년은 반세기이고, 생물학적으로 계산해 본다면 호모 사피엔스의 2세대에 해당하는 짧지 않은 시기다. 이 말은 만약 경아가 살아 있다면, 그녀는 나의 어머니 또래이며 지금 자라라는 아이들의 할머니뻘에 속하는 세대라는 말이다. 그녀가 살아 있다면, 경아가 살아 있었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경아는 그러지 못했다. 경아는 암울했던 유신 시대의 종말을 고함과 동시에 새로운 군부독재의 시작을 고하던 1979년의 그 날도, 도시 빈민에 대한 가혹한 폭력의 역사를 은폐하고 국제무대에 한국을 알리는 계기가 된 1988년의 그 날도, 빚더미에 올라앉은 나라가 통째로 무너진 1997년의 그 날도, 둥그런 축구공이 어디로 튀는지에 따라서 온 국민이 울고 울었던 영광스러운 2002년의 그 날도, 그리고 70여 년 동안 적대관계에 있던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드디어 한 자리에 마주하던 2018년 희망의 그 날도 그녀는 보지 못했다. 그녀보다 네 살 어린 나의 어머니도 아직 살아 있고, 심지어 그녀보다 두 살 많으면서 믿기지 않게 한창 청춘의 고뇌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할 26살에 『별들의 고향』을 썼다고 하는 소설가 최인호도 당당하게 살아 있는데,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 그녀는 죽었다. 그래서 나는 슬프다. 이 슬픔은 잠시 사랑했던 연인과 헤어질 때 느낄법한 얄팍한 비애감보다는 내가 죽도로 짝사랑했던 여자가, 평소에는 나를 쳐다볼 생각도 않았던 도도한 그녀가, 그런 그녀가 나를 남모르게 좋아했다는, 그래서 내가 자기에게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라는 말을 남기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나의 영혼을 짓누르는 죽음과도 같은 참담함에 가깝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경아가 살아생전에 했던 말처럼 그녀가 죽어서 슬픈 것보다는 그녀가 한때 살아 있었다는 생각이 더더욱 나를 우울하고도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한다. 차라리 경아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태어났더라도 그녀의 존재를 몰랐더라면 그녀의 때 이른 죽음이 나를 때늦은 비애 속에 잠기게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미 지독한 작가를 통해 지독한 삶을 살아간 경아를 알게 되었으니 빌어먹게도 작고 귀엽고 통통하고 착한 그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쏘냐! 젠장 맞게도 난 어젯밤 경아를 연상시키는 통통한 중년 여자와 질퍽하게 섹스하면서 뭔가 비장한 쾌감까지 느끼는 이상야릇한 꿈까지 꾸지 않았던가! 상황이 이처럼 빌어먹을 지경으로까지 몰렸으니 이제 작가라도 원망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다. 무심하고 잔인한 작가 최인호, 경아를 죽인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당신이야!
죽기 전에 읽어서 정말 다행이야!
나의 되먹지도 않은 푸념과 내가 지독히도 존경하는 작가에 대한 무례는 이쯤에서 그만두고 『별들의 고향』을 읽고 나서, 그리고 읽으면서 가장 절실했던 것을 꼭 집어서 말하라면, 이제라도 이 작품을 읽었다는 안도감과 만족감이다. 죽기 전에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 정도의 좋은 작품, 좋은 소설은 이 세상에 부지기수겠지만, 한 독자가 평생 읽을 수 있는 독서량의 한계와 그 사람이 책을 접할 수 있는 운신의 폭 내에서 그런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우연과 기회는 좀처럼 드물다. 내가 비록 지금까지 천여 권의 책을 읽었다지만, 그 책 전부가 동네 도서관에 소장된 책으로 한정되어있는 점만 보더라도 세상에 읽을 책은 정말 많지만 실제로 읽을 수 있는 책은 그렇게 많지 않다. 물론 경제적인 여유와 더불어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언어적인 능력까지 겸비한 독자라면 선택의 폭은 더 넓어지겠지만, 그렇다고 무한정 책을 읽을 수는 없다. 천 권을 읽던, 만 권을 읽던 한 사람이 평생 읽을 수 있는 독서량은 한계가 있고, 그러한 현실 인식은 진지하고 현명한 독자에게 단 한 권이라도 양질의 책을 선택하여 읽어야겠다는 의지와 욕심, 조바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런 면에서 고전은 가장 무난한 선택이다. 한편, 가끔은 소일거리로, 혹은 머리도 식히고 기분도 전환할 겸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책들도 읽을 수 있겠지만, 그런 책들이 주가 된다면, 독서력을 퇴보시키는 지름길이다. 이런 책들은 독자의 시야를 흐트러트리고 편견과 선입관을 주입시키면서 지적 능력을 퇴화시킨다. 고로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낭비이며 그릇된 독서의 길로 빠지기도 쉽다. 하지만 무엇이 양질의 책이고, 무엇이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책이며, 무엇이 인생의 낭비가 되는 책인지는 독자가 선택해야 할 몫이다. 여기서 어떤 책이 좋은 책이다, 혹은 나쁜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책을 수백 권 정도 진득하게 읽다 보면 누구라도 충분히 감을 잡을 수 있는 경험의 문제다. 고로 책을 읽어라! 그러다 보면 내가 『별들의 고향』을 읽고 났을 때 내 마음속으로 쓰나미처럼 밀려왔던 안도감과 만족감을 이해하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괴물에 대하여
내겐 분명히 ‘좋은 책’으로 다가온 『별들의 고향』이지만, 요즘의 젊은 세대에겐 따분하고 이질적인 정조 관념, 통행 금지 등의 시대적 괴리, 그리고 소위 ‘참여문학’이라고 하는 문학의 한 귀퉁이에서 바라볼 때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대적 반영의 결여라는 결점이 다소 존재하는 만큼 누군가에게는 고만고만한 통속적인 소설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이 가지는 자유의 기치를 가장 높이 평가한다면 문학이 반드시 시대의 정치적 • 사회적 상황을 반영해야 할 의무는 없으며, 지금보다 낡고 고루한 풍조나 세대 차이를 드러낸다고 해서 외면해야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에겐 문학에서조차 시대의 암울했던 정치적 우울함과 마주치는 일이 고문이거나 가혹 행위이다. 우린 어차피 그 낡고 고루한 풍조의 연장 선상에서 세대 차이에 부대끼며 살고 있지 않은가! 굳이 이런 말장난 같은 변명과 두둔이 아니더라도 『별들의 고향』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거대화된 도시가 필연적으로 잉태할 수밖에 없는 괴물인 외로움이 여전히 우리를 좀 먹고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사람에 치일 정도로 사방팔방에 사람들로 바글거리고, 경아는 상상도 하지 못할 신통하고 별난 기계로 별의별 짓을 다 하는 스마트한 인구 과잉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만성 질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문제이면서도 그 누구도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명확하게 원인을 파헤치지 못한 이 변덕스러운 질병에 대해 한낱 소설 나부랭이에 불과한 이 책이 명확한 답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전장의 어둠 속에 숨은 죽음과도 같이 도시인을 하염없이 짓누르는 외로움이라는 괴물의 한 단면을 정부 시설에 내버려진 연고자 없는 약물 중독자처럼 지독히도 쓸쓸하게 죽어가는 경아를 통해 생생하게 내비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도시라는 거대한 가면 뒤에 숨은 위선과 가식의 자궁 속에서 잉태된 외로움이라는 괴물의 정체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적당한 구실을 얻은 셈이다.
히드라처럼 많은 얼굴을 가진 그 괴물은 때론 행복으로 가장된 불행이며, 때론 꿈을 먹고 사는 절망이며, 때론 인구 과잉과 인구 밀집을 사악하게 비웃는 소외감이며, 때론 옆구리 터진 유조선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처럼 대책 없이 주변을 오염시키는 고독이다. 경아가 아득한 별들의 고향으로 떠나고 나서 5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한강의 기적으로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물질적 번영을 이루었음에도, 문명의 영광이라는 찬란한 후광을 등에 업고 하하 호호 기세등등한 도시를 발작적으로 조롱하듯, 전염병 같기도 하고 기생충 같기도 한 외로움이라는 괴물은 여전하다 못해 시시때때로 도시인의 불안한 정서를 밤마다 드리우는 어둠처럼 파고 들어와 가뜩이나 보잘것없는 우리의 삶을, 조루 환자처럼 빠르게 만개했다 빠르게 져버리는 우리의 행복과 청춘을, 언제나 별 볼 일 없었던 우리의 희망을,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갉아먹는다. 고로 『별들의 고향』이 한겨울에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처럼 우리를 전율케 하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이 제아무리 흔하디흔한 소재일지라도 말이다.
<저 어딘가에 경아의 고향이 있을려나> |
지독한 외로움, 우리는 결국 혼자다
문오의 말처럼 삶이 실상은 만나고 헤어짐의 문제뿐이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공감한다면, 우리는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혼자이고, 고독하고 외로운 동물이며,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특성조차 인간이 혼자임을 견디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 아닌가? 경아를 죽인 것은 빌어먹을 작가도 아니며, 악마처럼 날뛰는 정욕에 점령당해 경아의 처녀를 빼앗고 낙태라는 뼈아픈 상흔을 남긴 영석도 아니며, 과거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경아를 내팽개친 만준도 아니며, 단물 빠진 껌 뱉듯 몇 개월 재미나게 살다가 경아를 버린 문오도 아니다. 천성이 밝고 낙관적이었던 경아, 일회용품처럼 남자의 놀잇거리가 되어 놀아나는데 이골이 난 경아는 그 정도로 죽을 여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경아는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죽었다. 아니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단지 외로움 때문일까? 아무리 지독하다 할지라도 외로움만으로 사람이 죽을 수 있을까?
콜록콜록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앓아눕게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죽는 사람은 도통 찾아보기 어려운 감기처럼 외로움은 우리의 삶을 조금씩 조금씩 갈아먹으며 괴롭힐망정 정작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지는 못하는 그런 병이었지 않았나? 경아가 외로움을 끝내 견디지 못해 죽었는지, 자신의 소박한 꿈이 계속 짓밟히는 것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나머지 죽음을 선택했는지, 남자에게 버림받는 삶에 지치고 지쳐 피곤해서 쓰러졌는지, 이기적인 남자들이 배출하는 온갖 잡다한 쓰레기를 정화하는 필터 작용을 했던 경아의 육체가 제 기능을 다 한 나머지 역류한 쓰레기에 오염되어 죽었는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서로 짬뽕되어 일으킨 합병증으로 죽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염병할 작가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허우대 멀쩡하게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선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천기 같은 그 무엇이지 않을까? 혹은 누추한 병상에 누워 홀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사람만이 느낄법한 자조 섞인 비애이자 허무와 고독의 극치를 벗어난 비극의 결정판이다.
뭔가에 취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
그 사람이 죽어서 슬픈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한때 살아 있었다는 것이 슬프다고 말하는 경아. 우리 시대에 가지고 있던 따스한 인정과 순정을 아직 간직하고 있었던 경아. 언젠가 버림받을 것을 알면서도 내색 없이 오롯이 현재 그 순간만을 지극히 사랑할 수 있었던 경아. 그런 경아가 보고 생각하는 세상은 우리가 보고 생각하는 세상과는 달랐을 것이다. 뭔가가 달랐기에 경아는 비굴한 우리처럼 세상에 적응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다. 차라리 그 시궁창 물을 마셔 없애버릴지언정 썩을 대로 썩은 시궁창에 몸을 적시기는 죽음보다 싫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미덕으로 자리 잡은 지금으로서는 경아의 순수함은 천진하다 못해 바보 멍텅구리나 다름없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가장 순수했던 경아는 우리처럼 그렇게 억척같이, 안면박대하고, 몰염치하게, 되는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경아처럼 순수했던 사람들은 억척스러운 사람들만이 살아남아 자식을 낳고 작게나마 번영을 구가할 수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진화 법칙에 따라 서서히 도태되어 가고, 이제는 억척스러운 사람들만이 살아남는다. 하지만, 웬만큼의 억척스러움 가지고는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는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사람들은 더욱더 악착같은 사람들로 진화하고 있다. 나도 어찌어찌하여 이 척박한 세상 속에서 여전히 생존해 가고는 있지만, 경아처럼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난 정말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남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다들, 다들 말이에요, 용이하게 살아가고 있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용이하게들 살아가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별들의 고향』 2권, p275)
그래서 뭔가에 취하지 않고는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나 보다. 경아는 술에 취해 꿈속으로 달아났고, 나는 책에 빠져 세상을 외면한다. SNS에 취한 누군가는 가상현실에 중독되어 현실에서 도피한다. 명성에 취한 누군가는 교만에 빠진 채 현실을 왜곡한다. 돈에 취한 누군가는 빈부격차를 조장하며 현실을 교란한다. 게임에 취한 누군가는 지존을 꿈꾸며 현실을 부정한다. 일에 취한 누군가는 자신을 혹사시키며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이처럼 현대인이 외로움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방법은 각양각색이지만, 뭔가에 취하면 취할수록,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파도처럼 밀려드는 외로움과 허무함은 더 거세고 더 지독한 법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도시를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아가리를 쩍 벌린 그 괴물 같은 외로움과 허무함이 굶주림에 지쳐 사냥을 나서기 전에, 누군가 논개처럼 비장하게 그 아가리 속으로 뛰어들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양양한 바다에서 물 한 바가지를 퍼내는 미미한 일일지라도, 그래서 세상일에 별 보탬이 되지 않는 무모한 일일지라도, 나는 애써 변명하고 싶다. 그것은 사막에서 갈증에 허덕이는 자에게 뜻밖에 내린 한 방울의 물과 같다고, 그래서 괴물의 갈증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그 한 방울의 물이 증발할 때까지 괴물은 다른 곳에 한눈을 팔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다른 곳에 한눈을 팔 수 없는 그 찰나만큼은 우리도 외로움을 잠시 잊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괴물이 나를, 당신을 당장 집어삼키지 않는 것은, 괴물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괴물의 시선을 빼앗고 있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괴물에게 삼켜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야기에 취하고 텍스트에 홀린다
마지막으로 『별들의 고향』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또 하나 들고 싶다. 그것은 텍스트를 읽는 재미다. 내가 한국 소설을 많이 읽어본 편은 아니지만, 그중에서 텍스트를 읽는 재미를 선물해 준 작가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중에서 그 작가만의 색깔, 그 작가만의 멋을 가진 텍스트를 구사하는 작가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소설을 이야기만으로 읽는다면 그 이야기가 아무리 재미있더라도 그 소설은 기껏해야 이류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은 이야기도 재미있고 그만의 의미가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야기에 작가만의 멋과 색깔이 담긴 텍스트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실상 자신만의 문체, 자신만의 텍스트를 보여주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작가가 자신만의 텍스트를, 자신만의 문체를 구사한다는 말은 이야기가 아닌 종이 위에 선명하게 인쇄된 텍스트만 보고도 그것을 쓴 작가가 누구인지를 구분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익명의 글을 문체의 특성만으로 누가 썼는지를 분별해내었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내 텍스트 분별력은 그 경지까지 오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문체를 구사한다. 나쓰메 소세키(夏目金之助)가 그러하고, 옌롄커(閻連科)가 그러하고, 셀마 라게를뢰프(Selma Lagerlof)가 그러하다. 그리고 약간 추켜세워 한국 작가 최인호가 (『별들의 고향』 한 작품만으로는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대충 그러하다.
장난스럽지만 짓궂지는 않고, 천박한 듯 보이면서도 도를 넘어서지 않고, 냉기가 스며 나오는 경멸감 어린 시선 속에 따스한 관심이 공존하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우리 시대의 마지막 남은 인정을 담을 듯한, 그래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통속적인 흐름에 은근살짝 문학적 품격을 무단 방류해 놓은 듯한 그의 텍스트는 우울하고 구슬프고 쓸쓸한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재현해내는데 단단히 한몫하고 있다. 그래서 감히 친구의 주량을 빤히 알면서도 말리기는커녕 한 잔 더 따라주는 심정으로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거기엔 책에 취해 세상만사 온갖 시름을 잠시라도 잊었으면 하는 선량한 마음과 한 번쯤은 짜릿하게 심장까지 스며드는 외로움과 허무함으로 밤잠을 설치며 번뇌에 빠져보라는 짓궂은 마음이 나란히 공존한다.
(질질 끌어 정말 미안한 마음 금할 수가 없지만, 정말 마지막으로) 갑자기 경아가 하얀 눈 속에 파묻혀 죽은 모습이 노트북 액정 화면 위로 오버랩된다. 우리 시대 순수의 상징인 경아가 깨끗함의 상징인 눈 속에서 죽다니, 이 얼마나 절묘한 궁합인가? 그것은 마치 경아는 무심한 도시인들에 밀려 쓰러지고 짓밟힌 눈사람이라고 은근히 항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것은 이상하게도 겨울만 되면 쓰라린 인생의 비애를 겪어야 했던 경아가 겨울이 돌아오면 그 고통과 상처를 딛고 우리 앞에 눈사람으로 환생한다는 판타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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