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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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고 깊은 구멍(또는 시지프의 면죄부) | 황세연?

붉고 깊은 구멍(또는 시지프의 면죄부) | 대합실에 방치된 잡지 같은 소설

책 리뷰 | 붉고 깊은 구멍(또는 시지프의 면죄부) | 황세연
<Punishment sisyph(출처: 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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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불명의 소설?

아마도 『붉고 깊은 구멍(또는 시지프의 면죄부)』은 작가 황세연이 천리안, 하이텔 시절 ‘PC 통신’ 작가(지금 같으면 인터넷 작가?)로 활동하면서 남긴 소설로 추측된다. 추측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소설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 서점을 비롯해 구글에서조차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 황세연이 『붉고 깊은 구멍』이란 소설을 쓴 것이 맞는지 심히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작중 사회 비판적인 분위기가 단편 「IMF 나이트(내가 ‘황세연’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 계기가 된 소설)」와 다소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붉고 깊은 구멍』은 황세연 소설이 맞는다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으로 난감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 억측이 맞는다면, 필력이 「IMF 나이트」에 비하면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작가의 습작 같기도 하다. 출판사라는 정식 루트를 거치지 않고, 직접 PC 통신에 매일매일 연재해야 했기 때문인지 미처 교정하지 못한 흔적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그땐 지금처럼 워드프로세서에 맞춤법 검사 같은 세련된 기능은 없었다). 황세연 작가는 『붉고 깊은 구멍』을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지닌 한 청년이 남긴 치기 어린 습작에 불과하다고 여겼을까? 그래서 인터넷에 공개된 작가의 작품 목록에도 빠져 있는 것일까?

사실 『붉고 깊은 구멍』은 인터넷에서 일명 ‘텍본(텍스트본)이라 불리는 해적판으로 쉽게 받아볼 수 있는 소설이다. 즉,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이 소설을 무료로 읽을 수 있다. 이 소설뿐만 아니라 PC 통신 시절에 공유된 여러 텍스트 소설 수천 편이 오래전부터 공유되고 있었고, 바이두 넷디스크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소설 중에는 (『퇴마록』의 이우혁, 『드래곤라자』의 이영도 등) 작가가 직접 게시판에 글을 올리면서 연재한 작품들도 있지만, 대부분 누군가 종이책에 적힌 글자 하나하나를 그대로 타자하거나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긁어모아 TXT 파일로 만들어 공유한 자료들이다. 한마디로 수많은 ‘인간 OCR’들이 시간과 공을 들여 공유했던 것인데, 당시엔 저작권법도 개념도 없었기에 가능했던 작업이다.

나 역시 언젠가 도서관에 갈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이런 ‘텍본’들을 보관 중이며, 이 중에서 처음으로 황세연 작가의 파일을 열게 된 것이다. 그 계기는 중국이나 일본 등 밖에서만 찾으려고 하던 나의 편협한 시선을 한국으로도 돌리게 된 계기를 만든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이다.

책 리뷰 | 붉고 깊은 구멍(또는 시지프의 면죄부) | 황세연
<95대학수학능력평가 수험생 응원하는 후배들(출처: 국가기록원)>

‘붉고 깊은 구멍’과 ‘시지프의 면죄부’ 중에서 원작은?

그런데 책 제목을 두 개로 소개한 것은 인터넷에 텍스트 파일로 공유되는 ‘붉고 깊은 구멍’과 ‘시지프의 면죄부’라는 (둘 다 똑같이 파일명에는 ‘황세연’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두 소설이 서로 같은 내용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것은 ‘붉고 깊은 구멍’이지만, 결말만 조금 다를 뿐 두 소설은 대동소이한 작품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하나는 원작이고 다른 하나는 아류작일까? 아니면 하나는 원작이고 다른 하나는 PC 통신에 연재를 마친 소설을 작가가 한번 퇴고한 작품일까?

‘시지프의 면죄부’를 대충 흩어본 바에 따르면 아류작이라고 하기에는 두 소설은 그냥 복사판 그대로다. 등장인물도 ‘김병석’과 ‘김세준’ 정도만 다르다(물론 역할은 같다). 일단 아류작은 아니라고 가정하면, 내가 보기엔 ‘시지프의 면죄부’가 원작 같고, ‘붉고 깊은 구멍’이 연재를 마친 후 한 번 이상 탈고를 거친 작품 같다. 뭔가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붉고 깊은 구멍’에는 ‘시지프의 면죄부’에는 없는 ‘차례’가 있다는 것, 그리고 ‘붉고 깊은 구멍’은 오탈자가 다소 수정되어있다는 것 정도다(참고로 공백을 제외한 글자 수는 ‘시지프의 면죄부’가 1,400자 정도 더 많다). 이 두 차이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차례’를 기재하는 것과 오탈자 교정 작업은 (작가 본인이 했든, 다른 사람이 했든) 한 번 이상 퇴고 작업을 거쳐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순전히 내 추측이고, 진실은 (이 소설을 황세연 작가가 쓴 것이 사실이라면) 황세연 작가 본인과 이 소설을 PC 통신 시절에 연재되었을 때 읽었던 사람들만이 알고 있을 것 같다.

책 리뷰 | 붉고 깊은 구멍(또는 시지프의 면죄부) | 황세연
<1990년대 압구정 로데오 거리(출처: brunch)>

형제 같은 두 소설의 큰 차이는 결말

‘붉고 깊은 구멍’과 ‘시지프의 면죄부’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결말이다. 아마도 작가는 원작의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퇴고했는지도 모르고, 내친김에 ‘차례’를 삽입하고 약간의 교정을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마치 정식 출판을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리고 이보다 못한 소설이 서점에 수두룩함에도 ‘붉고 깊은 구멍(혹은 ‘시지프의 면죄부’)는 종이책으로 출판되는 영광을 누리지는 못한 것 같다.

결말 이야기로 돌아가면, ‘시지프의 면죄부’는 대참사가 일어나건 말건 변함없이 천박하게 돌아가는 사회 풍경을 담담하게 해설하는 다소 상투적인 묘사로 이야기의 매듭을 짓는 데 반해, ‘붉고 깊은 구멍’은 이야기를 매듭짓기보다는 ‘원초적인 차별에 대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잔혹한 여운을 남김으로써 작중 문제의식이 독자가 사는 현실로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 연결고리를 찾으려 하고 있다. 이 연결고리는 소설이 적나라하게 비판하고자 하는 문제의식, 즉 테러리스트들이 주장하는 ‘원초적인 차별’과 ‘피해의식’에 독자가 얼마나 공감하느냐에 따라 끈끈하게 이어질 수도 있고, 허무하게 끊어질 수도 있다. 여기서 ‘원초적인 차별’이란 사람으로선 어쩔 수 없는 차별들을 말한다. 외모, 재주 등의 유전적 차이와 이것들을 계발시키고 펼칠 수 있는 환경의 차이 말이다.

소설은 스타 증후군, 외모지상주의, 연예인 성 상납, 성형수술 등을 시대 문제로 꼬집으면서 타고난 외모를 내세워 쉽게 출세하는 여자 연예인들을 억하게 걸고넘어진다. 그래서 테러리스트들의 최후의 표적도 방송국이다. 한때 1990년대를 살아본 입장으로서 이 소설을 읽다 보면, 특히 테러리스트가 대중의 암묵적인 지지라도 받는 듯한 뉘앙스를 끝내 게워내지 않는 것을 보면 90년대 중반이 그렇게 암울하고 방종한 시대였나 하는 괴리감이 들 정도다. 하지만, 현실을 뒤돌아보면 지금이 그때보다 나아졌다고 보기도 어렵다. 변했다면, 과거엔 께름칙하게 여겨지고 손가락질받기도 했던 반항에 가까운 행동들이 지금은 당연시되었다는 것 정도?

예를 들면, 취업을 앞둔 여자가 성형수술 하는 것은 자격증 하나 더 취득하는 것 정도이고, 마치 정신질환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했던 ‘스타 증후군’도 지금은 누구나 품을 수 있는 수많은 공식적 ‘꿈’ 중의 하나일 뿐이다. 비슷한 예로 과거엔 음식 먹는 모습을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 보인다는 것은 부끄럽거나 겸연쩍은 행동이었다면,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먹방은 전혀 안 보지만, 야동은 가끔 보는 나로서는 식탐을 자극하는 먹방과 성욕을 자극하는 포르노가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포르노는 성욕 해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만, 먹방은 식탐만 애드벌룬처럼 잔뜩 부풀려놓고 해결은 알아서 하는 식이므로 먹방은 포르노보다 못한 저질 중의 저질 방송이다.

여담이지만, 1990년대 데뷔했던 스타급 영화배우들의 연기력이 (예를 들어 1990년대 데뷔한 유명 남자 배우들의 당시 연기력과 작금 미국의 젊고 유망한 배우들의 연기력을 비교해보면 그 확연한 차이를 실감할 것이다) 수준 미달인 것도 ‘외모지상주의’가 나은 부덕일 것이다. 이런 배우들은 영화를 찍으면서 연기가 나아지긴 했지만, 이것은 마치 영화 촬영을 연기 수업으로 삼은 셈이니 웃기지도 않는다. 그 정도로 영화를 꾸준히 찍으면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읽듯 누구라도 밥 먹고 살 정도의 연기력은 달성하고도 남을 것이다.

책 리뷰 | 붉고 깊은 구멍(또는 시지프의 면죄부) | 황세연
<90년대 서울, 스마트폰이 없어서일까? 책을 보는 사람도 있다!(출처: newstream)>

그날이 올 수 있을까?

‘원초적인 차별’은 무작위로 섞이는 유전자에 따르기 때문에 자연 선택에 따른 진화라고 볼 수도 있고, 또한 부모와 국가라는 성장환경 역시 무작위로 부여받는다는 점에서 ‘원초적인 차별’은 사회적 진화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난 인생은 98%의 운과 2%의 노력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사실 ‘노력’이라는 능력치도 유전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부조리한 면을 직시할 수 있는 의식과 부조리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의지와 능력과 수단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유전이나 선천적인 것에서 오는 개체의 차이와 불이익을 최소한으로 줄여 절대적인 평등을 이루자는 테러리스트들의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얼핏 보면 꽤 이상적인 사회로 보이는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내가 볼 땐 지금의 의식 수준으론 터무니없겠지만, 아주 먼 훗날 인류의 의식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고상해진다면, 그래서 선천적인 불평들과 그에 따른 경제적 • 사회적 불이익을 국가와 사회가 어느 정도 보상해야 한다는 의무를 모두가 인정하는 날이 온다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자본주의 초창기와는 달리 지금은 자신이 번 돈에 대해 어느 정도 세금을 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남들보다 많이 벌수록 세금도 더 많이 납부하여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일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진보적인 사람들도 다수 있다. 여기까지가 능력주의 사회의 한계다. 능력주의 사회의 한계를 벗어나려면 ‘원초적인 차별’을 국가와 사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하고, 이것은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후에야 ‘원초적인 차별’에서 발생하는 불이익을 최소화하는 데 확고부동한 밑천이 될 수 있는 법적 지원이 마련될 것이다.

‘원초적인 차별’로 인한 불이익을 최소화하려는 사회적이고 민주적인 공감대는 내가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순전한 내 능력 때문이라기보다는 타고난 자질과 남들보다 좋은 성장환경에서 기이한 것이라는 자의식을 밑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우쭐하고 잘난체하고 시기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이 사회에 이런 의식이 자리 잡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할까?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그런 미래가 올 수 있을까?

희망보다는 절망이 먼저 내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보면, 나 역시 속으로는 ‘원초적인 차별’이 최소한으로 축소된 이상적인 사회에 근접하는 것조차 사람들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겉멋만 잔뜩 든 위선이지만, 사람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불신이 미래를 낙관하려는 자아를 냉소하며 비웃고 있다. 하물며 작금의 대통령 같은 머저리를 뽑은 머저리 같은 국민이 사는 나라에서야.

범죄는 유전인가? 환경인가?

1990년대는 범죄 유전설이 힘을 얻던 시기일까? 『붉고 깊은 구멍(또는 시지프의 면죄부)』엔 범죄 유전설과 범죄 환경설이 대립하고 있다. ‘범죄는 유전되는가?’ 아니면 ‘환경이 결정하는가?’, 이 문제는 여전히 일단락되지 않은 진행형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땐 설령 범죄유전자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발현시키는 것은 환경이다(마치 MMORPG 원신의 ‘원소 반응’ 시스템처럼). 범죄유전자라는 것을 인위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국가와 사회는 그것이 발현될 기회를 최소한으로 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윤리적일 것이다.

소설 역시 강진숙의 곡절 깊은 삶과 일그러진 성 정체성을 통해 범죄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결국 환경이라고 주장한다. 소설은 그녀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쌍둥이 동생이 살아온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성공적이라 할 수 있는) 삶을 독자 앞에 슬그머니 제시함으로써 강진숙 그녀가 테러리스트로 성장한 이유로서 환경적 요인을 잔인할 만큼 강하게 내비친다. 살인마를 만들어 놓고 그를 동정하게 만드는 참으로 얄미운 소설이지만, 일란성 쌍둥이 중 한 사람은 테러리스트로, 다른 한 사람은 테러리스트를 수사하는 수사관으로 성장시킨 작가의 심보는 더 얄밉다.

끝으로 이 소설을 굳이 인터넷을 뒤져가면서까지 찾아 읽는 사람들의 성향이라면 시간 보내기 용도로는 나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다소 산만한 플롯, 성의 없는 문장, 문제의식이 부족한 노골적인 비판, 훗날 「IMF 나이트」에서 보여줄 유머러스함의 미발아 등 전체적으론 투박한 작품이다. 좋게 보면 사회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혈기 왕성한 작가의 이상(理想)이 담긴 사회파 범죄소설이고, 삐딱하게 보면 피해망상에 찌든 작가의 쌓이고 쌓인 울분을 토하고 불만을 해소하는 듯한 해우소 같은 소설이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이는 PC 통신의 특성 때문에 이런 정의구현 식의 범죄소설이 게시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여건이 되면 황세연 작가의 최근 작품인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을 읽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는 것으로 나야말로 투박함을 넘어선 졸렬한 리뷰를 끝마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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