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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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추리소설 걸작선 | 44인, 44개의 특색을 반영하는 44개 작품

한국추리소설 걸작선 | 44인, 44개의 특색을 반영하는 44개 작품

책 리뷰 | 한국추리소설 걸작선 | 44인, 44개의 특색을 반영하는 44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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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목록이 말해주는 나의 작가 편향

도서관에서 대출한 천 권이 조금 넘는 책 중에 장르소설(추리, 범죄, SF, 판타지, 로맨스, 무협 등 순문학 외의 모든 잡다한 소설)로 분류할만한 작품은 대략 220여 권 정도가 된다. 그러니까 다섯 권 중 한 권은 장르소설을 대출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220여 권의 장르소설 중에서 한국 작가의 소설은 달랑 두 권뿐이다(오차 +1~2권?). 그 영광의 두 권은 김성종의 『최후의 증인』과 김내성의 『마인』이다. 둘 다 한국 추리소설의 고전 격인 작품이며, 추리소설 마니아에게 일말의 주저 없이 추천하고픈 재밌는 소설이기도 하다.

언젠가 어떤 글에서 밝혔듯, 나의 독서 편력은 가리는 것이 없는 모범적 식성을 닮아 꽤 다양한 장르에 걸쳐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도서관을 향해 집을 나설 때 오늘은 꼭 이 책을 빌려야겠다는 뚜렷한 의지를 다진 적이 거의 없는 것처럼 책 선택은 그날그날의 기분과 감정, 그리고 지적 호기심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어떻게 보면 꽤 변덕스럽다고 할 수 있다. 변덕스럽다는 말을 좋게 해석하면 치우침과 편독이 없다는 말이다. 어쩌다가 한 작가에게 필이 꽂혀 그 작가의 작품을 내리읽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모리 히로시의 ‘S&M 시리즈’ 같은 경우), 이 경우에도 사이사이 다른 책을 선택함으로써 독서 분위기를 환기하고, 그럼으로써 뇌 활동과 정서가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려 생기는 정신적인 피로도 조금은 피할 수 있다. 또한, 아무리 스스로 발아한 호감 때문에 선택한 작가일지라도 한 작가의 작품만 주야장천 읽다 보면 자칫 지루해지거나 물릴 수 있는 부작용도 예방할 수 있다.

그래도 나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다.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 여러 분야에 걸쳐있다고 자부하는 나의 대출목록은 나의 산만한 지적 호기심을 반영하는 만큼 편독 성향은 뚜렷하지 않다고 분석할 수 있지만(반대로 한 우물을 파지 못한다는 단점을 지적하면 나로서도 할 말은 없다), 작가의 출신 국가까지 통계를 내어보면 특정 국가를 선호한다는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좋게 말해 패턴이지, 그것은 편견이나 마찬가지다.

책 리뷰 | 한국추리소설 걸작선 | 44인, 44개의 특색을 반영하는 44개 작품
<여름휴가 좋지. 하지만, 이럴 형편이 안 된다면...>

한국 작가의 글을 꺼리는 돼먹지 않은 이유

한국 교수가 쓴 너무 초보적이거나, 아니면 대학 교재처럼 딱딱하기만 한 과학 분야 교양 도서에 몇 번 질린 나머지 다시는 한국인이 쓴 과학 분야의 책(글 읽는 재미를 결정하는 문학적 글쓰기 능력이 부족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지식에 대한 이해도가 서구 학자와 비교해 많이 떨어지는 탓에 교과서처럼 딱딱하고 메마른 글이 되기 일쑤다)은 쳐다보지도 않게 된 것처럼 한국 작가의 책을 꺼리는 편견에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근거란 노벨상 한 번 타지 못한 나라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시간 낭비이지 않을까 하는 건방진 기우와 책을 많이 안 읽는 국가에서 좋은 작가가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지레짐작이다. 이것들이 한국 작가에 대한 편견을 묵처럼 응고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로 끝나버리면 어쩌나 하는 근거 없는 불안은 한국 작가의 책들이 즐비한 책장 속으로 뻗어 나가는 나의 창백한 손을 빈번히 가로막는 망설임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누군가 이런 나를 두고 한국 작가를 얕잡아 본 것 아니냐고 힐난해도 변명할 말은 없다.

아무튼, 이런 돼먹지 못한 이유로 내가 읽는 책의 작가는 대부분이 외국인이다. 특히 과학 도서 분야는 영어권(알다시피 과학 분야는 영어권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지 않은가?), 추리소설 분야는 일본 작가를 선호(최근에는 중국 작가도)한다. 물론 여기에는 ‘취향’이라는 매우 주관적인 배경도 빼놓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긴 미루기 끝에...

그런데도 워낙 추리소설을 좋아하다 보니 도서관에 들를 때마다 진열장에 전시된 상품을 바라보며 살까 말까 갈등하는 손님처럼 날 번뇌에 휩싸이게 하는 두 권의 책이 있었다. 바로 『한국추리소설 걸작선』 1권과 2권이다.

빅맥처럼 먹음직스러운 두께(같은 값이면 양이 많은 음식이 좋듯, 책도 두꺼운 것이 좋지 아니한가!), 화려함 뒤에 숨은 쓸쓸함을 상기시키는 듯한 책 표지 색깔, 그 쓸쓸함이 하소연하는 읽히지 않는 책의 외로움, 누군가의 수집 욕구를 자극할 듯한 간지나는 양장 제본, 그리고 한국을 대표한다는 추리소설 작가 44명에 대한 은근한 기대감이 그동안 한국 작가를 은연중에 멸시해왔다는 나의 죄책감을 인질 삼아 어서 자기를 읽어달라고 보채고 있었다. 아니 나에겐 공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읽을까 말까 하는 시소를 타던 중에 결정타가 터졌다. 내가 자주 다니는 도서관이 리모델링 때문에 무려 1년 6개월 동안이나 임시 휴관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입영 통지서처럼 난데없이 날아든 것이다. 나는 터무니없는 숫자가 적힌 고지서를 받아든 불행한 납세자처럼 순간적으로 얼어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땅이 푹 꺼지는 듯한 절망감을 떨쳐내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물론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 두 군데 더 있었지만, 한 곳은 구멍가게나 마찬가지였고(규모가 작아서 책이 많지 않다), 한 곳은 지금 다니던 곳보다 멀고 책 보유량도 지금 다니던 곳보다는 적다.

상황은 다급해지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럴 땐 진화심리학적으로 볼 때 감정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다. 감정에 모든 것을 맡기니 티끌만 한 망설임 없이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을 집어들 수 있었다.

나의 불찰에 면목이 없도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의심과 기대를 공평하게 반반씩 품고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을 읽게 되었다. 오만하게도 나름 심사하는 태도로 읽었다. 편협하게도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읽었다. 고집스럽게도 내가 원하는 것을 찾고자 읽었다(한편으론 이런 나름의 읽기 방법을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독자의 특권이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내 기우는 기우로 끝났다. 내 불찰이 나만의 불찰로 끝나서 정말로 다행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내가 즐겨왔던 추리소설이 수많은 추리소설의 변주 중에서 단지 하나의 흐름에 불과할 뿐이라는 깨우침과 동시에 보석 같은 작가를 발견하는 행운을 얻었다. 나의 모독 같은 불찰을 용서함은 물론 이 세상 둘도 없는 작가와 만나는 소중한 인연까지 선물했으니 이런 관대함과 후덕함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 뜨거운 눈물이 나의 두 눈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다고 말한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나의 의심스러운 눈길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도도하게 버티고 섰던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은 이제는 그런 내 의심을 눈 녹듯 녹이는 후광으로 보란 듯이 상황을 압도하고 있다. 나의 불량한 의심은 스트립 댄서의 거침없는 몸짓처럼 홀라당 벗겨졌고, 그 자리를 부끄러움과 믿음이 꿰차고 들어왔다. 그것은 한국 추리소설 작가를 무시해왔다는 성찰에서 비롯한 부끄러움과 한국 추리소설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다.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이 책장에 백로처럼 도도하게 버티고 서 있던 것에는 허영이 아니라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음을 멍청한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바보가 따로 없다. 그래도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나의 잘못을 뉘우치는 글자들을 도닥도닥 타자하는 노트북 자판 위로 안도의 한숨이 스쳐 지나간다. 한국 추리소설의 가능성과 그 가능성을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는 열정으로 뒷받침하는 한국 추리소설 작가의 혼신에 고마움과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44인의 44개의 특색을 반영하는 44개의 작품

그렇다고 해서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에 실린 작가 44명의 44개의 작품 모두가 내 마음에 든 것은 아니다. 독자의 취향에 따라 평가 기준은 다르겠지만, 과학적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한 사건의 논리적인 전개 과정, 텍스트 읽기의 재미를 자아낼 수 있는 개성 있는 필력, 이야기나 트릭의 기발함과 독창성은 내가 추리소설을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다. 추리소설에 보통 이상의 문장력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무엇이 지나치단 말인가? 단어와 단어의 매끄러운 협연과 문장과 문장이 아울러내는 교향곡이라 할 수 있는 소설에 한사오궁(韩少功)처럼 운치 있고 옌롄커(閻連科)처럼 품격 있고 셀마 라게를뢰프(Selma Lagerlof)처럼 아름다운 필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수준 있는 문장력을 바라는 것이 독자로서 지나치단 말인가?

이런 편견은 추리소설이 문학이라는 범주의 곁다리에 머무르는 삼류소설이라는 선입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자의 수준과 그에 따르는 요구사항이 높아지지 않는다면, 추리소설은 그저 인기와 돈을 좇아 탄생한 상업소설일 뿐이라는 불명예를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 부당함을 감내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런 불명예를 결코 떨쳐낼 수 없다.

그런 고로 독서의 재미는 텍스트를 읽는 것 자체에서도 기인한다는 것, 그리고 추리소설의 질적인 발전을 위해서라도 안일한 문장력은 배척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에 실린 44편의 단편 중에서 (앞서 언급한) 세 가진 기준 중 적어도 두 가지 이상 부합하는 작품, 여기에 작품 전체가 자아내는 감흥이라는 즉흥적인 기준을 취합하여 내가 선택한 단편은 18편 정도가 된다. 즉, 이 18편을 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다는 뜻이다.

이 중에서 단연코 최고의 단편을 몇 편 뽑는다면, 앨프레드 히치콕 영화 같은 사이코적인 분위기와 절도 있는 문장이 돋보이는 손선영의 「그녀는 알고 있다」, 모리 히로시(森博嗣)의 소설처럼 추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건 구성과 직소 퍼즐처럼 잘 맞아떨어지는 플롯, 그리고 눈물샘이 말라버릴 정도의 지순한 감동을 자아내는 도진기의 「선택」, 익살스러운 문장과 재치 있는 반전을 기대할 수 있는 최지수의 「다이어트 클럽」, 마지막으로 살인사건을 주로 다루는 추리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직종임에도 들러리 정도로 취급되는 법의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소름 돋는 필치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류성희의 「인간을 해부하다」이다.

솔직히 내가 선택한, 그리고 내 취향에 부합하는 18편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기대 이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중 몇 편은 세계의 추리소설 분야에 내세워도 꿀릴 것 하나 없는 뛰어난 소설들이다. 이제 18명 작가의 작품 중 어떤 작가의 작품을 먼저 읽어야 할지 선택에 갈림길에 선 이 고민은 만한전석(滿漢全席)을 앞에 둔 사람과도 바꾸고 싶지 않을 행복한 순간이다.

이런 좋은 소설들을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거들먹거리면서, 그리고 근거 박약한 편견에 사로잡혀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었으니, 만약 내가 이대로 죽었더라면 천추의 한으로 남았을 것이다.

한편으론,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포용할 수 있는 범주를 너무 확장한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일례로 「인간을 해부하다」는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범죄소설에 가깝다. 이외에도 추리소설보단 ‘기묘한 이야기’나 ‘환상 특급’에 더 어울릴법한 소설들도 다수 있었다. 이것이 한국 추리소설만의 특징이자 차별화인지, 아니면 한국 추리소설의 빈약함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알겠다.

진정한 작가는 자신만의 문체를 구사한다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원들의 작품 중 회원 스스로 가려낸 우수 단편 추리소설 모음집인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은 한국추리소설의 성경 같은 책이자 한국추리소설의 역사 같은 책이라 평가할 수 있다. 또한,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은 한국의 추리소설이 시대에 얼마나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가 하는 그 감응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리트머스 같은 책이기도 하다. 모리 히로시의 순수 추리물과는 달리 (최소한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에 소개된) 한국 추리소설은 IMF, 다이어트, 외국인 근로자, 진상 고객, 학원 폭력, 사형 제도, 불륜, 가난과 부 등 유독 시대적 상황에 섬세하게 감응하고 있기 때문이다(한국식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할까나?).

이것은 일본처럼 전업 추리소설 작가보다는 드라마, 영화, 비평, 순문학 등 이런저런 글쓰기를 겸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 장르에만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은 (작가의 선택이나 성향, 또는 그 나름의 사정을 떠나) 추리소설 하나만 집필해서는 먹고살기 어렵다는 한국추리소설의 침체한 시장 분위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추리소설의 불행이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을 통해 알게 된 점은 한국추리소설은 내가 즐겨 읽어왔던 일본이나 중국 추리소설 작가들의 작품에 비하면 과학적 엄밀함과 착상의 기발함에서 뒤처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대신 감정이 풍부한 민족이라 그런지 정서적인 면이 좀 더 강하게 드러나 있다. 특히 내가 특별히 눈독을 들인 작가들은 저마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응집력이 탄력적이고, 문장과 문장의 이어짐이 매끄럽고 세련된 개성 있는 문장을 구사한다. 이것은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잘나가는 작가일지라도 문장력은 평범하다는 면에서 (어쩌면 누구라도 읽기 쉽다는 이 ‘평범함’이 인기의 비결 중 하나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 추리소설 작가의 우위라고 평하고 싶다. 여기에 한마디 더 보탠다면, 진정한 작가는 자신의 개성과 멋을 자아내는 자신만의 문체를 가져야 한다. ‘이 글은 아무개 작가가 쓴 것이 틀림없군’처럼 텍스트가 일종이 지문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만약 내가 작가라면 그런 비평을 받았을 때 가장 뿌듯할 것 같다.

한편으론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곱창처럼 두세 번 곱씹어 봐야 참맛을 알 수 있는 진득한 문장은 (로맨스 • 판타지 등의 ‘라이트노벨’이라 불리는 질 낮은 소설들만 읽은 대가로) 독서력이 떨어지는 일부 독자에겐 오히려 거부감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문장력의 질적인 향상을 도모하는 것은 작가나 독자 모두가 헤쳐 나가야 할 곡절이기도 하다. 물론 나처럼 읽는 재미를 중요시하는 독자에겐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말이다.

책 리뷰 | 한국추리소설 걸작선 | 44인, 44개의 특색을 반영하는 44개 작품
<독서로 무더위를 잊는 것도 꽤 즐겁고 유쾌한 일이다>

강아지는 잠이 들고, 긴 글을 마무리한다

두 권 모두 합쳐 1,500페이지에 육박하는 엄청난 분량을 읽고 어떤 리뷰를 쓰게 될지 책을 읽기 전부터 지레 겁먹었는데, 막상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게임에 빠져 해 넘어가고 달이 뜨는 것도 모르는 게임 중독자처럼 어느덧 멀리서 닭의 홰치는 소리가 들려와도 전혀 이상한 것이 없는 야심한 시간이 되어 버렸다. 글을 쓰다가 잠시 쉴 겸 기지개를 힘차게 켜고 뻐적지근한 고개를 좌우로 돌리니 내 눈과 마주치기가 무섭게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던 늙은 강아지도 내게서 무언가를 기대했다가 제풀에 지쳤는지 어느새 코를 골며 잠들어 있다. 강아지에겐 어제 하루가 유난히도 고단했었나 보다. 더군다나 늙고 살도 쪘으니 이 무더위에 오죽했을까.

나에겐 긴 글을 쓰느냐 유난히도 고단했던 하루였다. 아니, 밤을 꼬박 세었으니 무박 2일이랄까?

44명의 작가가 원고지에 쏟아부은 열정에 잠시 감염된 것일까? 어쩌자고 매우 긴 글을 쓰고 만 것인지 모르겠다. 그것도 무책임하게 길기만 하고 내용은 추접지근하기 그지없는 글을 써버렸다. 이런 졸렬한 글을 쓰며 작가들의 열정 운운했으니,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킨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쩌냐, 난 그들만큼 글쓰기 실력을 타고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은 생긴 대로 살고 재주껏 벌어먹듯, 글조차도 꼴리는 대로 쓰는 그런 무례한 사람인 것을.

이제는 이 글을 끝마치고, 잠시 후에 뜰 것 같은 해를 기대하며 추레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가볍게 몸을 푼 다음 몸에서 육즙을 뽑아내는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와 무모하게 대적하면서 기나긴 글쓰기 여정의 피로를 품 겸 산책이나 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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