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샹즈 | 라오서 | 한 인력거꾼의 이유 있는 타락
“나라고 노력 안 해본 줄 알아? 그래 봤자 털끝만치도 남은 게 없잖아.” (『낙타상즈』, p327)
강철 인간이라고 해도 이 그늘에선 못 벗어나. 맘씨 좋은 건 또 무슨 소용이 있고! 인과응보라고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어! (『낙타상즈』, p349)
옛말에 ‘고진감래(苦盡甘來)이니 화복무문(禍福無門)’이라고 했다.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오니 착하게 살면 언제가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공평하지도 정의롭지도 희망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우리는 도무지 피할 도리가 없는 한여름의 불볕더위만큼이나 뜨겁게 체감하면서 살고 있다. 중세 교회가 민중의 고질적인 가난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교회와 영주의 권위에 대한 복종을 합리화시키고 영속시키고자 현실에서의 모든 고생에 대한 보상으로 천국을 약속하고 성서와 교리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난도질하면서 민중을 기만했듯, 어쩌면 ‘고진감래(苦盡甘來)이니 화복무문(禍福無門)’이란 말도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봉건시대의 중국 백성에게 부질없는 희망을 심어주고 달래주는 한편으로는 을러대고자 위정자들에 의해 유포된 감언이설 같은, 그래서 혹시 있을지 모를 폭동이라도 방지해 볼 심산의 기만적인 표어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지나친 비약이자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큼 가진 것 없는 민중에겐 (예나 지금이나)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하다. 그래서 라오서(老舍)가 질질 끌고 온 인력거꾼 샹쯔(혹은 샹즈? 祥子)의 일은 남의 일처럼 허탈하게 웃어넘기기에는 예사롭지가 않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부모 • 형제 • 친척 • 친구도 없는 천애의 고아지만, 여자, 술, 담배, 도박도 하지 않고 어디 한 군데 한눈파는 일 없이 인력거 끄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성실하고 착실하게 살아온 샹쯔. 말주변도 없고 그래서 더더욱 과묵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세상을 향한 원망도 두려움도 말끔하게 봉인되어 있었을 만큼 그의 타고난 천성은 낙관적이고 유순했다. 『낙타상즈(骆驼祥子)』의 샹쯔는 열심히 성실하게 자기 일만 잘하면 언젠가 자신의 인력거도 마련하면서 덩달아 생활도 안정되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나아지리라고 믿었다. 오랜 고생 끝에 처음으로 자신의 인력거를 장만했을 때까지만 해도 세상은 샹쯔의 소소한 바람대로 그럭저럭 호응해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쟁 때문에 인력거를 군인들에게 강탈당하고, 피땀 흘려 모아놓은 돈도 형사 나부랭이에게 빼앗긴다. 반쯤 속아서 한 결혼이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된다는 뿌듯한 마음에 내심 기대하던 샹쯔는 아내와 첫 아이마저 그놈의 돈 때문에 전부 잃고 만다. 이쯤에서도 얄궂은 운명의 장난은 끝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또다시 샹쯔에게 ‘새 출발’이라는 희망의 미끼를 던진 운명은 샹쯔가 처음으로 진정 좋아하게 된 여인의 비극적인 결말을 눈물겹도록 멋들어지게 연출함으로써 샹쯔의 마지막 희망과 기회마저 물거품 속으로 사그라트리고 만다. 이후 샹쯔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의 ‘개’ 같은 운명을 절실히, 그리고 절망적으로 깨달은 샹쯔가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하염없이 시궁창이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감히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을까?
<교토의 노노미야 신사 앞에서 by Fg2> |
밑도 끝도 없이 치러내야 하는 치열한 삶의 경쟁에 지치고 턱없이 높은 경쟁의 문턱 앞에서 좌절하고, 이를 개선하고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보란 듯이 자신들의 사리사욕만 챙기는 것에 절망하고 낙담한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세상이라 해서 ‘헬조선’이라 부른다. 물론 이런 이유로 애초에 (나처럼?) 노력조차 해보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비열하고 무책임한 짓거리는 없지만, 개미처럼 일하고 머리가 터지고 온몸의 피부가 부르터지도록 삶의 전선에 부딪혀도 겨우 입에 풀칠이나 면할 수밖에 없는 타인들의 비장한 삶을 보면 감히 뛰어들 엄두도 못 낸다. 도대체 얼마나 노력해야 샹쯔 같은 소박한 사람들의 소박한 꿈과 행복을 이룰 수 있을지 속 시원히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물며 평생 개미처럼 일만 하면서, 그리고 평생 피똥 싸도록 노력만 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도 없다. 정말 이런 생각들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보면 가끔 얻어지곤 하는 소소한 쾌락과 행복을 맛보고자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과연 운이 좋은 일인지 되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안국진 감독, 이정현 주연의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4)」는 샹쯔에게 일어난 일이 비단 과거, 그것도 역사적 격동기이자 혹한기를 살았던 특정 인민들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영화 속 수남과 북경에서 인력거를 끌던 샹쯔가 그랬던 것처럼 노력의 노력의 끝장을 본 사람은 자포자기적인 심정 속에서 자기연민에 빠진 끝에 사악하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생사의 결전을 앞둔 독사처럼 독이 오른다. 그것은 아무리 착실하게 노력해도 무엇 하나 이루어지지 않는 기만적인 세상은 극단적인 생존 경쟁의 치열한 장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자기연민과 이기심 속에선 하나하나가 자신의 피와 땀의 대가이니 배려란 있을 수 없다. 그러하기에 세상인심은 더욱 각박해지고 경쟁은 더더욱 치열해진다. 이런 악순환의 늪에 한 번 빠지면, 다급한 마음에 자기만 살고자 물귀신처럼 서로 물고 늘어질 뿐이니 그 누구도 헤어나올 길 없다. 한마디로 세상은 ‘생지옥’이 된다.
한 인력거꾼의 이유 있는 타락은 사회적 배려와 운명적 관용이 무너진 상태에선 선과 악의 경계, 그리고 양심과 도덕이 가지는 구속력 또한 맥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또한, 그 누구도 샹쯔와 같은 일을 겪는다면 샹쯔처럼 파렴치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많은 범죄가 더는 떨어질 나락도 없는 궁지에 몰린 사람들에 의해 자포자기적인 심정으로 저질러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낙타상즈』 샹쯔의 일은 옮긴이의 해석처럼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선 사회의 비극이자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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