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문화사 | 로저 에커치 | 어두운 밤의 장막이 내려준 또 다른 익명의 세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때 사람들이 우선 조심스럽게 불을 묻어두고 침대로 도망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불량배, 악령, 해로운 습기 같은 밤의 온갖 위험에도 사람들은 침실로도 집으로도 가지 않았다. 오히려 밤에도 일을 하거나 즐겼다. (『밤의 문화사』, p94)
종종 깜깜한 밤을 ‘칠흑같이 어둡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그렇다면 최소 중세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이 관용적 수식이 묘사하는 밤은 얼마나 어둡고 깜깜한 밤일까. 그것은 바로 눈앞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구분할 수 없고, 그 길에 익숙한 지역주민조차 길 위에 쓰러진 나무에 걸려 넘어지거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구덩이, 개울, 낭떠러지에 빠질 정도로 길의 방향과 상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이다. 현란한 빛 공해에 시달리는 도시인에게 ‘칠흑같이 어두운 밤’은 이미 일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된, 머릿속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밤일지 모르겠지만, 달빛처럼 별빛도 은근한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촛불 옆에서는 염소도 여자로 보일 정도로 깜깜한 밤에서 일생의 반을 보내야 했던 산업혁명 이전에 살던 서양 사람들에겐 밤은 낮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배경을 제공해주는 또 다른 인생이었다. 로저 에커치(A. Roger Ekirch)의 『밤의 문화사(At Day's Close: Night in Times Past)』는 주류 역사가들이 외면한 ‘또 다른 인생’, 혹은 ‘또 다른 왕국’ 이고 일상의 반쪽이자 제도적이고 억압적인 낮과는 다른 풍요롭고 생동적이며 자유롭고 이색적인 밤의 역사를 탐구한 책이다.
<빛의 홍수로 밤이 사라진 현대의 도시> |
민중들은 강도나 도둑, 화재 등의 현실적 두려움과 악마나 마녀 등의 초현실적 공포에 떨면서도 밤이 주는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만끽했다. 그들에겐 밤이 쳐주는 어둠의 장막만이 근엄한 법과 냉혹한 주인의 속박, 그리고 파렴치한 이웃의 감시망에서 벗어날 유일한 기회였기에 낮에 충당하지 못한 벌이를 밀수, 밀렵, 좀도둑질 등으로 보충하거나 이웃이나 동료 노예들과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실잣기, 뜨개질, 양털 다듬기, 천 짜기 등의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냈다. 하루 일과에 지친 노동자들은 술과 도박으로 유흥을 즐기며 하루의 피로를 풀고 내일을 충전하는 시간이었다. 디종의 길거리 난동에서 한 식기 제조업자는 불운하게도 늦게까지 일했다는 이유로 칼에 찔려 죽었지만, 제빵업자나 구두장이, 재단사들 등 일부 노동자들은 밤에도 일했다. 귀족들도 세속적인 예의범절에서 벗어나 위선과 가식의 가면을 벗어젖힐 수 있는 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자신들의 고삐 풀린 욕망을 채우고 무절제한 힘을 과시했다. 학자들은 조용한 밤이 되어서야 영혼과 정신세계로의 깊은 사색에 잠길 수 있었지만, 도시의 밀집된 빈곤 지역에서는 밤마다 소란이 끊이지 않아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았다. 이때와 지금과 비교하면 조명의 홍수로 밤의 짙음은 엷어졌을지 모르지만, 그 어둠 속에서 꿈틀대는 민중의 생명력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역시 밤은 밤이다.
24시간 영업과 그로 말미암은 24시간 교대 근무가 보편화한 요즘에는 밤이 밤 같지 않게 느껴질 때도 있다. 밤과 낮이 뒤바뀐 삶이 일상인 사람도 많다. 그런 현대인에게 앞서 묘사한 산업 시대 이전의 밤은 방종과 무절제가 난무하는 무법지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 산업 시대 이전 사람들은 인터넷이라는 가상 세계를 통해 익명성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뼈저리게 체험하는 현대인처럼 영악하게도 밤이 제공하는 어둠의 장막을 익명성의 장치로 이용할 줄 알았으니, 이렇게 보면 밤의 어두운 면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귀족들은 가면무도회라는 인위적인 익명의 장치를 만들어 따분한 격식과 예의범절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켰다면, 그럴 여유가 없었던 민중들은 자연이 제공해준 익명의 밤을 이용해 통제와 감시에서 벗어나 영혼과 육체를 해방시킬 수 있었다. 현대인이 겪는 가난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고되고 고된 삶을 살았던 산업 시대 이전의 민중들이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모두에게 어둠의 익명성을 제공하는 밤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산업 시대 이전 사람들에게 태양 아래에서 펼쳐지는 지루하고 힘든 노동과 억압적인 규제와 감시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일탈의 해방감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오직 밤에만 가능했다. 현대인이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공간에서 분노와 불만, 억압된 충동과 감정을 발산시키면서 다소간의 위안을 얻듯 그들은 밤을 통해 그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이처럼 『밤의 문화사』에는 현대인이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경험할 수 없는, 한편으론 주류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인류의 또 다른 일상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것은 법과 규칙에 얽매인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낮의 가면을 벗어던진 인류의 또 따른 인간성이다. 그것은 주류 역사에서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인류의 시커먼 민낯이며 새하얀 속살이다. 그것은 삶의 이중성과 선과 악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한 고발장이다. 그동안의 천편일률적인 승자독식의 반쪽 역사에 질리고 민중의 역사에 대해 칼칼한 갈증을 느낀 독자라면, 로저 에커치(A. Roger Ekirch)의 『밤의 문화사』야말로 그 나머지 반쪽을 채워주고 의문의 갈증마저 청량음료처럼 톡 쏘면서도 시원하게 풀어줄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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