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비가 | 쑤퉁 | 어둡고 깊은 절망에서 메아리치는 절규
아마 내 이야기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세상천지 불행이란 불행은 모조리 우리 집으로 모여들 수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들 그 이유를 알겠는가? 나보다 더 그 이유를 알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 내게 그렇게 묻는다면 난 아마 당신들은 어쩌면 그렇게들 잘살고 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화씨 비가(菩萨蛮)』, 317쪽)
인간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품위조차 저버리게 하는 ‘가난’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힘겹고도 역겨운 삶은 무엇인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아이들을 떠올리는가? 물론 그건 인류가 낳은 최악의 비극이자 먹고살 만한 국가들에 의해 자행되는 지속적인 테러임은 사실이지만, 죽음이라는 단절 없이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미식미식 연명해 가는 것을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아사는 그저 허무하고 불쌍한 수많은 죽음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가장 고된 삶을 찾고자 한다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가장 밑바닥에 고여 있는 하층민으로 시선을 옮길 수밖에 없고, 여기 쑤퉁(蘇童)의 작품 『화씨 비가(菩萨蛮)』에 등장하는 화씨 일가의 처절하면서도 한편으로 악다구니 같은 삶은 허구가 낳을 수 있는 가장 치열하고 험난한 삶 중 하나일 것이다.
화씨 일가는 남들이 먼저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 이상 자신들이 먼저 상대를 윽박지르거나 타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누군가 화씨 일가의 자존심을 건드린다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정도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그악스럽게 응수한다는 점에서 옴팡지고 얄망궂다. 평범함과 포악한 성질을 고루 갖추고 이러한 양면성이 일상에서도 자연스럽게 묻어나온다는 점에서 매우 인간적이지만, 이들이 겪는 가난과 고통은 인간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품위 유지조차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들은 일찍부터 인간적인 삶과는 만리장성을 쌓은 격이다 .
일단 건드리지만 않으면 큰 탈은 없지만, 세상은 이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걸핏하면 악다구니를 퍼붓는 악에 받친 모진 삶을 산다. 운명은 그들이 바라지도 않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떠넘겼고, 국가와 사회는 그들이 짊어진 가난을 더더욱 고착화시켰다. 미래도 없고 희망도 없고 그저 하루하루라도 어떻게든 입에 풀칠하려면 치열한 생존 경쟁에 부대껴야 하니 어디 악에 받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도무지 해결할 길이 없는 것들...> |
죽음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
그러나 『화씨 비가』의 저자 쑤퉁에겐 이마저도 너무 싱겁고 평범해 보였나 보다. 어제오늘, 그리고 내일도 가난에서 벗어날 길은 막막하지만, 그래도 부모가 살아 있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던 8명의 화씨 일가에 청천벼락 같은 사건이 터진다. 뜬금없이 다섯 남매의 엄마 펑황이 연로 창고에서 자살하고, 다섯 남매의 아빠이자 펑황의 남편인 화진더우가 홧김에 연료 창고에 불을 질러 감옥에 갇힌 것이다. 이것도 모자라 아내의 자살 이유를 궁금해하던 화진더우는 그 이유를 묻고자 지랄 맞게도 아이들을 남겨두고 감옥에서 떡 하니 자살해 버린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이 궁상맞은 인간은 천국은커녕 지옥도 못 가고 구천을 떠돌다 결국 지상으로 내려와 남은 자식들과 이를 뒷바라지 하는 여동생의 구차한 삶을 꼼짝없이 지켜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죽음으로 지긋지긋한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난 줄 알았더니 자신의 가난과 고통을 대물림받은 자식들의 풍진 삶을 그저 하릴없이 바라만 보며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고, 자식이 병들거나 남에게 손가락질을 당해도, 혹은 죽어가더라도 TV 드라마 보듯 눈물로 아롱진 눈으로 그저 애간장만 태우며 쳐다볼 수밖에 없는 부모 마음만큼 가슴 아픈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정말이지 화진더우는 전생에 뭔 죄를 지었기에 그런 얄궂은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죽음조차 모질고도 모진 삶의 멍에를 풀어낼 수 없다면 이승도 지옥이고, 저승도 지옥이니 이 우주는 지옥 그 자체란 말인가?
어둡고도 깊은 절망이 몸서리치듯 메아리쳐 절규하는 화씨 비가(悲歌)
하층민의 삶을 처절하게 다룬 다른 소설들은 그래도 간간이 약간의 연민이나 동정 어린 손길을 뻗어 황폐해진 독자의 기분이나 작품의 분위기를 쇄신하기 마련인데, 『화씨 비가(菩萨蛮)』는 저자 쑤퉁이 얄미워질 정도로 한 치의 흐트러짐이나 양보도 없다. 드라마, 영화, 연극에 등장하는 비극은 사치로 보일 정도로 어둡고도 깊은 절망이 몸서리치듯 메아리쳐 절규하는 화씨의 비가(悲歌)는 자식의 불행과 고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화진더우가 영혼마저 흩날려 버리는 통분의 울부짖음을 내지르는 것처럼 독자의 마음을 찢어발긴다. 그나마 화씨 일가가 세상을 향해 토해내는 옴팡진 대거리, 즉 푸짐하고 옹골찬 욕들이 이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위안거리다 .
직사하게 고생하다 겨우 죽어 귀신이 되었더니 또다시 직사하게 고생하는 화진더우는 재수 옴 붙은 여동생이 자신보다 딱히 나은 것 없는 팔자로 고생만 직사하게 하다 결국 요망스럽게 객사하여 이승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세월을 돌이키고 돌이켜 어머니 뱃속에 있던 때로 돌아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푸념한다. 살다 보면 고난을 겪기도 하고 실패도 하기 마련이며, 후회와 회한에 빠지기도 한다. 때로는 밥 먹듯 그저 나이를 먹다 보면 문득 옛 생각이 나면서 과거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절망만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삶이고, 한평생 한 번도 즐겁게 웃지 못했더라도 삶은 삶이다. 아무리 삶이 화진더우처럼 가난과 고통만으로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 할지라도 돌이킬 수도 없고 다시 살 수도 없는 것이 생명을 가진 모든 육신의 숙명이다. 이것은 진시황제도 바꿀 수 없었던 엄연한 현실이다.
고로 화씨 일가의 숙명은 우리가 짊어진 또 하나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비록 『화씨 비가』를 읽는 당신이 그들보다는 훨씬 풍족한 삶을 살고 있더라도 이 세상 어딘가에 사는 많은 사람이 화씨 일가 같은 숙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만큼 삶은 치열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이 작품의 숙명인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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