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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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네딕트 | 친구에게 보내는 생애 마지막 편지

Ruth Benedict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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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네딕트 | 마거릿 리드 | 먼저 간 친구에게 보내는 생애 마지막 편지

자기 정체성 고민에 빠진 조숙한 소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과부 생활의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호소하던 어머니 밑에서 한쪽의 청력까지 잃은 우울한 아이였던 루스 베네딕트(Ruth Fulton Benedict)는 소녀 시절 일기장의 한 페이지에 "인생의 문제점은 해답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다" 라고 적었을 정도로 또래의 평범한 소녀들처럼 명랑하고 활기차고 약간의 허영심도 내세우는 수줍은 소녀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 깊숙이 침체한 내성적이고 차분한 소녀로 성장한다.

조숙한 그녀는 사회가 권장하는 가치와는 상관없이 진정한 자아를 찾고자 갈망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 보이는 ‘나’와의 내면에 침체한 ‘나’ 사이에서 무엇이 진정한 나인지 갈등을 겪으며 끊임없이 고뇌한다. 이것은 훗날 그녀가 명상과 화두를 통해 무아(無我)의 도를 깨닫는 일본의 선종(禪宗) 사상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된다.

이처럼 자기 정체성 문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는 주변의 생활을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주체하기 어려운 우울증을 억제하기 위해 애를 썼으며, 속으로는 대혼란을 겪으면서도 겉으로는 침착하고 눈물 없는 외양을 꾸미려 노력했다고 회상했다. 일기에는 “이 세상과 마찰하고 부딪히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잃지 않는 확고한 신념, 그게 필요하다” 라는 성찰이 담겨 있는데, 이 짤막한 문장에서 그녀가 주변과의 혼란과 마찰, 무언의 압력에 쉽게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우선 그녀는 여자로서 쉽게 떠올리고 선택할 수 있는 결혼을 통한 해결책을 모색한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화목하지 못한 부부생활에 어려운 수술을 받지 못하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의사의 날벼락 같은 판정까지 겹치자 베네딕트는 가정에 대한 희망과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 길은 '노력과 창조의 개성적 세계'를 만들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찾은 해법은 바로 인류학이었다.

<Ruth Benedict, 1937, World Telegram staff photographer / Public domain>

일탈자가 되더라도 내 갈 길을 걷는다는 것

그녀는 자신과 사회를 속이는 위선의 삶을 버리고 비록 사회의 일탈자로 낙인이 찍힐지라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동성애자의 길을 선택한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확실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더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없이 새로운 각오와 자신감으로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고, 노골적인 성차별과 사회적 편견 속의 무수한 난관까지 극복한 그녀는 문화의 상대성과 문화가 개인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세 부족의 예증으로 명철하게 설명한 인류학의 영원한 고전 『문화의 패턴(Patterns of Culture)』을 완성함으로써 위대한 인류학자로 거듭 태어나는 데 성공한다.

루스 베네딕트가 몸담았던 컬럼비아 대학은 대학원에 여학생을 받아들이는 등 당시로써는 좋은 전통을 가진 대학 중 하나였다고 평가를 받았지만, 여자 교수들은 남자 교수들의 식당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성차별은 시대의 지성인이라 자부하던 교수들 사이에서도 당연시되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그녀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베네딕트의 전기를 두 번이나 지은 마거릿 리드조차 솔직하게 밝히지 못했을 정도로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 박해도 대단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베네딕트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결정한 이후에도 공개적으로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고 이것은 마거릿 미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사회적 역경 속에서도 베네딕트는 청각장애와 수줍은 성격, 우울증을 극복하고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겨 학자로서 대성공을 거두었으니, 미드의 『루스 베네딕트』는 인류학자이며 동시에 20세기 위대한 여성인 루스 베네딕트의 감동적인 드라마이다. (참고로 1980년대 이후에 마거릿 리드의 딸이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함으로써 베네딕트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의심이 밝혀졌다.)

두 권의 전기를 집필할 정도로 특별했던 사랑

1922년 바너드대학 프란츠 보아스의 인류학 입문 강좌에서 베네딕트를 처음 만난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A Humanist in Anthropology)』의 저자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는 베네딕트보다 15세 연하였지만, 그 이후 두 사람의 사이는 동료 학자이자 다정한 친구, 그리고 비록 한참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때때로 연인 관계를 유지하며 베네딕트가 사망하는 1948년까지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했다.

친구에 대한 사랑과 우정이 오죽했으면 한 권도 모자라 두 권의 전기를 집필했을까. 그만큼 미드의 베네딕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특별했으며, 베네딕트의 학문적 성취에 대한 존경도 남달랐다. 이에 대한 평가는 부록의 추천사를 쓴 낸시 러트키호스의 말이 정말 가슴에 찡하게 와 닿는다.

이 전기는 마거릿 미드가 먼저 간 친구에게 보내는 생애 마지막 편지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루스 베네딕트』, p402)

당시 (1970년대) 인류학 분야에서 베네딕트에게 쏟아진 비판이 미드에게는 무척이나 견디기 어려웠을 것일까. 첫 번째 전기와 비교하면 이 두 번째 전기는 그러한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베네딕트의 학문적 성취에 대해 좀 더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래서 베네딕트의 삶을 담은 부분은 비교적 적은 페이지를 차지하고 대신에 베네딕트의 주요 연설문과 논문들이 실려 있다.

난 이 전기를 읽기 전에 『문화의 패턴』을 읽었고, 베네딕트의 또 하나의 명작 『국화의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을 읽기 전에 그녀의 배경을 좀 더 알고 싶어 이 책을 선택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 전기는 베네딕트의 학문적 성취에 대한 강조가 꽤 주요하게 다뤄지니만큼 『문화의 패턴』과 『국화의 칼』을 다 읽고 이 전기를 보는 것이 그녀의 삶과 학문을 이해하기 더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을 부적응자라고 느끼는 한 여성이 사회 내에서 자기 자리를 찾고 또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감동을 얻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확고한 신념과 그에 따른 단호한 행동, 그리고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의 “완벽한 설명 스타일이다. 절제되어 있고, 자신감에 넘치고, 보석을 세공하는 듯하고, 무엇보다도 단호하다. 단정적으로 표현된 단정적 견해”라는 극찬을 받은 베네딕트의 논문을 통해 어설픈 교양서적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지적 호기심의 충족과 그로 말미암은 지적 만족감과 성취감을 만끽하는 데는 충분하리다 본다.

인류학이 아주 흥미로운 학문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 새 학문에서 자신이 존중할 수 있는 어떤 실체를 발견했다. 이 학문에 모든 재능을 쏟아 부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왜 나는 현대 미국 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끼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개인적 질문에 답변을 얻을 것 같았다. (루스 베네딕트』,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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