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위소보 없는) 강희제 평전 | 장자오청, 왕리건
무엇을 선택할지 그것이 문제로다!
(양보다 질이 중요하지만, 아무튼) 연간 독서량이 도서관 출입 초기에 비하면 한없이 추락한 요즘의 난 다독자(동네도서관의 다독자로 선정된 사람의 경우 1인당 월평균 18.6권 대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10여 년 넘게 손에서 아예 책을 놓지는 않았으니 꾸준하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서’만을 놓고 보면 박약하다는 말을 들어야 할 정도로 의지가 없는 편은 아니지만, 변덕스러운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 마음이 심란해서인지, 아니면 애초 한 분야를 깊게 팔 정도로 뇌가 발달하지 못해서인지 아무튼, 책을 읽어도 한 우물을 깊게 파지 못한다.
블로그에 올린 책 리뷰를 보면 알겠지만, 내가 즐겨 읽는 책들은 몇몇 장르에 국한된다는 것은 얼추 드러나 있지만, 그렇다고 한 분야를 진득하게 파고들지는 못한다. 왜 그런가 하고 굳이 따지고 들 이유도 없지만, 굳이 따지고 들면 나에겐 한 우물을 파야 할 이유도 명분도 의무도 없다는 것! 최소 한 분야 이상에 도통해야 할 의무와 사명을 지닌 학자가 아닌 이상 북극에 내리는 눈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호기심만으로 책을 선택한다는 것은 독서인의 당연한 권리다.
바람 부는 대로 떠도는 먼지처럼 파도가 일렁이는 대로 흔들리는 부표처럼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는 나뭇잎처럼 입맛에 따라 매끼 달라지는 식탁처럼 나 역시 그날그날 호기심 따라 책을 선택하는데, 이날은 세 분야의 책들이 지나가는 남자를 향해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홍등가의 아가씨처럼 나를 유혹했다. 하나는 오랜만에 흥미를 느낀 ‘인류의 진화사’, 다른 하나 역시 오랜만에 흥미를 느낀 ‘우주’, 그리고 마지막 주자가 오늘의 주인공 장자오청(蔣兆成), 왕리건(王日根)의 『강희제 평전(康熙傳)』이다.
사실 간택 경쟁은 ‘인류’와 ‘우주’를 두고서 시작되었다. 장 보는 아줌마가 이 달걀이 신선한지 저 달걀이 신선한지 갈피를 못 잡는 것처럼 두 책을 앞에 두고 어떤 책을 선택해야 할지 고심의 고심을 거듭했다. 오래전의 나 같았으면 의심의 여지 없이 두 권 모두 선택했겠지만, 요즘 책 읽기가 더딘 나로서는 (그리고 편리한 전자책도 있으므로) 두 책을 모두 책가방에 넣기에는 대출 기한의 압박이 두려웠다. 마치 어떤 학과로 진학할지 고민하는 수험생처럼, 혹은 어떤 분야의 회사로 취업할지 궁리하는 사회 초년생처럼 인생을 좌우하는 선택의 갈림길에라도 들어선 듯 그 짧은 시간에 뇌가 소비한 에너지란 나의 저체중을 고려하면 무시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나의 고민 아닌 고민을 일장에 박살 내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만한 일이 일어났다. 바로 『강희제 평전』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연상되는 무지막지하고 인정사정없는 상념들. 가령 이런 것들. 위소보, 녹정기, 그리고 일곱 빛깔의 일곱 마누라!
최근에 본 드라마 「녹정기(鹿鼎记, 2020)」가 닭이 횃대 위로 올라서는 것처럼 푸드덕 떠올랐으니, 실제 책 내용이야 어찌 되었든 『강희제 평전』을 간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본의 아니게 두 책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으나 다음 기회가 분명히 있으리라.
김용 작품의 가치를 더더욱 빛내주는 ‘역사 지식’
지금까지 도저히 책 리뷰라고는 할 수 없는 잡스러운 나의 글을 읽어준 보살 같은 독자분은 진즉에 의도를 간파했을 것이다. 책에 관해 쓸 이야깃거리가 마땅치 않아 이런 헛소리를 하고 있는가 보다 하고.
사실 『강희제 평전』은 지금까지 읽은 ‘덩샤오핑’, ‘마오쩌둥’, ‘스티브 잡스’, ‘장제스’, ‘히틀러’, ‘스탈린’, '장칭' 같은 평전들보다 이야기로서나 문장으로서나 (몇몇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딱히 재미는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 평전들의 주인공들은 모두 20세기 인물들이다.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취하지 않을지 작가가 고민해야 할 정도로 사료(史料)가 풍부하고 그런 만큼 이야기가 세밀하므로 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가 있다. 반면에 청나라 시대의 사료는 이들에 비하면 극히 적어서 그런지 ‘오배’와 ‘삼번의 난’과 ‘후계자 계승 문제’ 부분을 제외하고는 교과서처럼 딱딱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것은 저자가 두 명이라는 특이한 저작 방식에서 기인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두 명의 저자 중 장자오청이 서술한 부분은 적당히 장황한 것이 소설처럼 읽기도 쉽고 재미도 있지만, 왕리건이 서술한 부분은 사관이 실록을 편찬하는 듯 건조하고 딱딱해 수면 효과가 다소 강하다. 또한, 한자어가 많고 지명도 옛 지명이라 뜻을 헤아리고 문맥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강희제 평전』엔 ‘위소보’가 없다는 것! 위소보 비슷한 내시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김용의 애독자라면 『강희제 평전』이 남다르게 느껴질 이유는 꽤 있다.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오늘로써 김용의 『녹정기』가 무협소설로서뿐만 아니라 역사소설로서도 진가가 상당한 작품이란 것을 체험했다고 할까나?
군주를 기만하고 정권을 독단한 보정대신 오배(鰲拜)를 사로잡는 한 편의 희극, ‘도깨비집’라 불리는 곳에 은거하는 장씨 집안 과부들의 한 맺힌 사연과 반청 인사 70여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오지영(吳之榮)이 일으킨 문자옥(文字獄), 소설 『녹정기』에서 친정하지 못한 아쉬움을 위소보 앞에서 연방 토로했던 강희제의 넘치는 용기와 자신감, 그리고 위소보뿐만 아니라 독자들을 놀라 자빠지게 하는 강희제의 뛰어난 지략 등 김용은 역사와 허구를 자연스럽고 멋들어지게 조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장용, 왕진보, 조량동(소설에선 조양동), 손사극, 시랑, 진영화(소설에선 진근남), 풍석범, 유국헌, 정극상, 임흥주(등패병의 활약도 사실!), 갈단(소설에선 갈이단), 오응웅, 건녕공주 등 무미건조한 역사 인물에게 ‘개성’이란 색을 입힘으로써 고금을 통틀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진귀한 무협소설을 만든 셈이다.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소설적 상상력과 학문적 깊이에 또다시 탄복하고 탄복할 따름이다.
세종대왕과 강희제의 공통점?
눈여겨 볼만한 재미난 사실은 중국의 황제나 조선의 왕이나 태평성대로 가는 길을 개척한 사람, 즉 성실하고 왕성하게 정치를 한 사람은 권력을 강화하고 민생을 돌보는데 열심히 한 것처럼 대통을 잇는 자식을 낳는데도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강희제의 자식은 아들딸 합쳐 무려 55명이었으며, 조선의 강희제라 할 수 있는 세종대왕은 조선 왕 중 두 번째로 많은 자식을 두었으니, 만사에 열정적인 사람은 어떤 일을 해도 두각을 나타내나 보다. 세종대왕과 강희제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성군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인가? 그렇다면 요즘 정치하는 사람들은 책을 읽고 공부하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을 투자할까?
어떻게 봐도 그는 인류가 낳은 성군 중의 성군!
책에 대해 딱히 품평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서 책 내용을 요약하는 수준 정도로 리뷰를 작성하는 것은 내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방학 숙제 같은 독후감 수준의 리뷰는 초짜였을 땐 나도 어쩔 수 없었지만, 나름 읽을 만큼 읽고 쓸 만큼 쓴 지금의 나로선 성에 차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쓰는 재미도 없다. 그런 고집 아닌 고집으로 해서 오늘 같은 이것도 아닌 저것도 아닌 잡글이 내 리뷰의 주를 이룬다 해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이 절절한 심정은 글을 써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끝으로 중국 드라마 「우성룡 천하제일청백리(于成龙, 2017)」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강희제가 막 등극했을 때 청나라는 결코 사람 살만한 시대가 아니었다. 한나라처럼 같은 민족에 의해 왕조가 전복된 것이 아닌 외세의 침략으로 정부가 전복된 격이니 우리가 겪었던 일제강점기처럼 지배 민족의 폭정 때문에 민심은 흉흉했을 것이다. 『강희제 평전』을 읽기 전엔 드라마 「우성룡」에서 겪는 백성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이 우성룡의 능력을 빛내기 위해 과장이 조금 보태진 연출인 줄 알았는데, 사료에 기록된 걸 보니 실제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오배의 전횡(드라마 「우성룡 천하제일청백리」에서 팔기군이 주인 없는 황무지뿐만 아니라 주인 있는 땅에 깃발을 꽂는 것만으로도 땅 소유권을 획득하는 황당무계한 제도였던 권지(圈地)는 사실이었다), 평서왕 오삼계 • 평남왕 상가희 • 정남왕 경정충의 폭정, 명나라 말기의 부패가 나은 탐관오리, 삼번의 난, 대만 정벌 등 내적인 불안과 러시아인의 남하와 갈단 • 티베트의 반란 등의 외적인 불안까지 겹친 이런 난세 중의 난세를 평정한다는 것이 실로 가능했다는 것에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강희제는 중국이 다시는 얻을 수 없는 최고의 복이었다.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로 이어지는 태평성대를 재현하려는 작금의 중국은 강희제가 입에 달고 살았던,
짐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지극한 뜻에 부합하도록 하라
라는 말에 담긴 '안민(安民)' , ‘양민(養民)' , '휼민(恤民)’을 생각하는 지극한 마음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권위주의로 인민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단속하고 있다. 지금의 중국은 강희제가 이룩한 업적만 보고, 그것의 밑바탕이 되었던 강희제의 신념과 통치 철학, 그리고 그것을 얻고자 노력했던 강희제의 의지와 행동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부자만 될 수 있다면, 도둑질해도 상관없다는 중국의 상식으로선 어찌 보면 당연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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