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의 세계 | 재레드 다이아몬드 | 문명사회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가?
당신이 만약 ─ 죄를 지어 유배를 떠나는 것이든, 아니면 긴장감 넘치는 익스트림 여행을 위해서든, 옆집까지 홀라당 태울 것 같은 활활 타오르는 탐구열 때문이든, 이유야 어찌 되었든 ─ ‘원시 사회’, ‘미개인’이라 일컫는 진짜 전통 사회에서 원주민과 함께 1년 동안 수렵채집 생활을 해야만 한다면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가? 이때 가지고 갈 수 있는 물품 종류는 제한 없지만, 물량은 당신이 짊어질 수 있을 만큼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물건으로 배낭을 포식시킬 것인가?
배낭 속에 이것저것 욱여넣고도 라면 봉지 한 개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 남았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작은 책 한 권 가져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글자깨나 읽은 문명인으로서의 핀잔받지 않고 고고한 티를 낼 유일무이한 기회일 뿐만 아니라 소귀에 경을 읽어주는 도도한 멋도 꽤 그럴싸하다. 이런 건방진 이유보다는 ‘문명인으로서 고아한 자태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책 한 권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무지몽매에서 비롯한 여유가 『어제까지의 세계(The World Until Yesterday)』라는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자랑스럽게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자가 여자친구를 대하는 태도가 호텔에서 쉬었다 가기 전과 후 180도 변하는 것처럼 마음도 생각도 돌변했다. 여자의 축축하고 따뜻한 자궁 속으로 찝찔한 정충들을 폭죽처럼 발사하고 난 후 여자에 대한 온갖 음흉한 판타지가 소멸하듯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의 책 한 권이 그동안 갖고 있었던 전통 사회에 대한 꿈과 같은 환상의 씨를 말리듯 깡그리 말살해 버렸다.
가방에 공간이 남아 있다면 책 따위가 아니라 항생제나 벌레 기피제로 채울 것이다.
기근과 굶주림이 남긴 흉터
‘10년도 아니고 고작 1년을 보내는데 책 한 권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하는 여유가 덜 익은 감처럼 떨떠름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내 막연하고 이가 빠진 설명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는 보통 ‘전통 생활’이라 하면 MBN의 「나는 자연인이다」, 또는 기껏해야 SBS의 「정글의 법칙」 정도의 예능 방송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착각도 그냥 착각이 아닌 대단한 착각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미국과 뉴기니를 오가며 50년을 보내면서 농축한 전통 사회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태산처럼 쌓인 이 책을 읽고 나면 목가적인 생활을 일생의 꿈이자 소원으로 여기는, 그래서 시시각각 도시 생활에 심히 염증을 느끼는 나조차 문명화된 도시에 살게 된 것을 매우 다행이자 축복이란 생각이 들 정도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명언을 남긴 장 자크 루소가 그 말을 몸소 실천하고자 서뉴기니에서 조밀하게 살던 고원지대 사람들의 일원으로 편입했다면(참고로 서뉴기니 고원지대 사람들은 1938년에 발견되었다), 천수를 누리기는커녕 어떻게든 유럽으로 돌아가고자 갖은 꾀를 궁리하느냐 글을 쓴다거나 사상을 연구할 틈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혹한 삶을 알려고 하지 않았던 루소에게 자연은 ─ 우리가 「나는 자연인이다」, 「정글의 법칙」을 연상하는 것처럼 ─ 귀족부인과 기분 좋게 산책하던 불로뉴 숲 정도였을 것이다.
아무튼, 심신이 허약한 나로선 우연히 마주친 낯선 사람뿐만 아니라 숲길 한가운데 처박힌 나뭇가지 같은 하찮게 보이는 것조차 생사가 달린 위험 요소로 간주해야 하는 24시간 사주경계 태세를 1년 동안 견딜 자신이 없다. 우리가 여름 한 철에 겪는 모기 정도와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벌레 공격은 문명의 이기(利器)로 그럭저럭 퇴치한다고 해도 쟁반과 숟가락이 어떻게 세척되고 누가 그런 것들을 만지는지도 유심히 지켜봐야 할 정도의 절절한 위생 문제는 만만치 않다. 물바가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똥으로 범벅된 아이의 몸을 씻기면서도 정작 그 똥을 닦아낸 손은 씻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은 내가 재주껏 조심하면 그럭저럭 피할 수 있다고 해도 ‘먹을 것 나와라, 뚝딱’하고 도깨비방망이를 부리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는 것은 기근과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굶주림이다.
우리가 아무리 문명인이라고 목젖이 쉬도록 부르짖어도 여전히 개 같은 식탐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식량 부족 사태가 빈번하게 닥치고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시기는 드물었던 변덕스러운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고 끓어오르는 식탐, 염치없이 행해지는 포식은 기근과 잦은 굶주림이 우리 유전자에 남긴 지워질 수 없는 흉터다.
고작 1년 동안에 어느 정도의 기근이 얼마나 동안 닥칠지는 알 수 없지만, 사이가 썩 좋지 않은 이웃 부족과 달갑지 않은 조우, 인정사정없는 벌레들의 쓰나미 공격, 예고도 조짐도 없이 쓰러지는 나무 등은 이등병의 빠릿빠릿한 사주경계로 용케 피한다 해도 날고 기는 말년 병장이 바글거려도 기근과 굶주림은 피할 수 없다. 기근과 굶주림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린 가능할 때, 즉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먹어 신속하게 지방을 축적하려는 유전자와 신축성 좋은 위를 획득했다. 지금은 이 유전자들이 당뇨병과 관련된 질병을 일으키는 주범이지만, 이 유전자들은 어제까지의 세계에서만 해도 기아와 굶주림의 시기를 한층 여유롭게 이겨낼 수 있는 진화의 선물이었다.
전통 사회는 갖고 있지만, 문명사회는 갖지 않은 것
우린 어제까지만 그렇게 살았다. 앞에서 말한 위험, 위생, 기근 문제뿐만 아니라 생존과 번식의 관점에서 영아살해와 노인살해 같은, 지금의 도덕관념으론 천인공노할 만행이 버젓이 행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 시대적 상황으로선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경험한 전통 사회는 즐겁게 읽을 수는 있지만 즐겁게 경험하기는 어려운 이야기다. 내가 좀 늦게 태어나 그의 이야기를 ‘삶’으로서가 아니라 ‘책’으로만 경험하게 되어 천만다행이란 요행스러운 마음조차 든다.
아직 책의 여운이 삼겹살을 먹고 난 후 입가에 번지르르하게 남아 있는 기름기처럼 누릿하게 남아 있기 때문일까? 오늘따라 도시인을 압살해 버리겠다고 으름장 놓는 철로 만든 뼈에 시멘트 살점을 붙인 거인 같은 빌딩들, 뿌연 잿빛 모자를 우울하게 눌러 쓴 의기소침한 하늘, 파키케팔로사우루스처럼 무지막지하게 달려드는 자동차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 모두 루소의 말처럼 인류가 뱉어낸 가래침이지만, 우린 이 가래침 속에서 낯선 사람을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무심한 평화와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찰나 같은 안락과 언제든지 배를 채울 수 있는 불평등한 풍요로움을 만끽하고 있다. 적어도 남에게 살해당하거나 굶어 죽을 걱정은 크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지난 50년간 꾸준히 축적한 전통 사회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독자들이 지레 겁먹을 책값과 베개로 안성맞춤인 책 두께에 꾸역꾸역 담은 것은 도시와 대척점에 있는 자연의 삶에 대한 온갖 망상에 대해 마침표를 찍고자 위함인가!
물론 전통 사회에 대한 근거 없는 공상에 빠진 독자가 쓸데없는 상상으로 뇌세포를 혹사하는 자해적인 착취를 방지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책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잊을만하면 꾸게 되는 악몽처럼 때때로 도시인의 숨통을 조여오는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듯한 공허함과 외로움이 문명화되면서 잃어버린 무언가 때문이라면,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무언가 역시 전통 사회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렇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인류애 때문이다.
─ 좋은 점만 고려할 때 ─ 문명사회는 갖고 있지만, 전통 사회는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당연히 많다.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전통 사회는 갖고 있지만, 문명사회가 갖고 있지 않은 것도 꽤 있다. 무엇무엇이 있을까 궁금하다면 책을 읽자. 이 책이 다이아몬드만큼 값지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책 중의 다이아몬드라고는 말할 수 있다.
끝으로 한 마디만 덧붙인다면, 당신이라면 정서적으로 풍족하지만, 물질적으론 빈곤한 삶과 물질적으론 풍족하지만, 정서적으로 빈곤한 삶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이고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총, 균, 쇠』, 『제3의 침팬지』, 『문명의 붕괴』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재밌게 읽히는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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