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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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의 판도라 | 다양성의 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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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의 판도라 |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 다양성의 혼재 속의 모호한 정체성

내가 쓴 원고가 남의 이야기든 말든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등껍데기가 자연물이 아니라 인공적인 물건이면 어떻다는 말인가.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남의 이야기를 썼다고 해서 내가 하찮은 글쟁이가 아닌 것처럼, 나무 껍데기를 썼다고 해서 하찮은 거북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p459)

현대의 판도라 ‘인류’

에피메테우스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판도라(Pandora)에게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호기심을 못 참은 그녀는 제우스의 엄중한 경고도 무시한 채 제우스가 결혼선물로 준 상자를 열고 만다. 그 상자 안에는 욕심, 질투, 시기, 각종 질병 등 온갖 나쁜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으며, 이것들은 판도라가 상자를 여는 순간 빠져나와 세상 곳곳으로 퍼졌다. 그로 말미암아 평화로웠던 세상은 금세 험악해졌다는, ‘판도라의 상자’라고 불리는 그리스 신화의 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출처인 위키백과에는 판도라의 그 뒷이야기는 나와 있지 않지만, ─ 만약 그녀가 양심적인 사람이었다면 ─ 상자를 연 판도라도 자신 때문에 불행에 빠진 세상을 바라보며 예전 같은 행복한 삶을 마냥 누릴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이 이야기는 뜻밖의 재앙의 근원을 말하고자 할 때 종종 언급된다.

그렇다면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Albert Sanchez Pinol)의 소설 『콩고의 판도라(Pandora al Congo)』에서 ‘판도라’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판도라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린다. 그러나 그녀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편으로는 제우스의 경고를 무시할 정도로 도를 넘어선 호기심을 참지 못한 채, 미지의 무언가를 추구하다가 재앙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설 속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판도라처럼 현실에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탐욕과 이익을 추구하려는 인류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자원, 새로운 땅, 그리고 돈과 명성을 좇아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세력을 확장하려는 야심을 일각에서는 ‘모험 정신’, ‘개척 정신’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하거나, 혹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려는 ‘도전 정신’으로 추켜세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제국주의가 시작되었으며, 또한 그런 식으로 서구 문명이 비서구 문명을 ─ 서구 문명의 논리와 이성으로 볼 때는 지극히도 합리적인 행동으로써 ─ 침탈했음을 익히 알고 있다. 소설 속 배경이 되기도 하는 20세기 전후에 만연했던 제국주의도 탐욕과 이익을 좇아 주변으로 무한히 확장하려는 인류 속성의 역사적 증거다.

서구 문명이 잉태한 악이 정당하게 활개 치는 그곳

소설은 ‘인류’라는 현대의 판도라가 ‘콩고’라는 또 다른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 찬란한 인류 문명과 냉혹한 이성 뒤에 감춰진 ‘악’이 소위 말하는 문명인을 흔히 말하는 야만인으로 어떻게, 어떤 식으로 서서히 탈바꿈시키는지를, 그리고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인이 자신들이 저지른 온갖 짓들에 문명의 이중 잣대를 들이대며 어떻게 합리화하는지를 액자 형식의 이야기를 통해 교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서구 문명이 볼 때 ‘콩고’는 법, 도덕, 그리고 자신들 문명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제국주의의 판사는 그런 곳에서 어떤 짓을 저질러도 문책할 수 없다고 판결한다. 그것은 인류가 빚어낸 업적 중에서 가장 고결하고, 인류를 지혜와 사랑을 품은 지적생명체로서 빛나게 해주던,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생명을 품은 ─ 인류의 존재를 위협하지 않는 ─ 모든 존재에게 두루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정의’와 ‘보편적 도덕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참으로 합리의 극치를 달리는 위대한 판결이다.

그럼으로써 서구 문명은 식민지에서의 야만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고, 동시에 현대적 문명이 자리 잡은 영역에서 적절한 탈출구를 찾지 못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사회악’이 배출될 수 있는 합리적 공간을 제공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문제처럼 식민지에서의 야만적 행위를 허용하였기에 ‘사회악’의 배출구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사회악’의 배출구가 필요해서 식민지에서의 야만적 행위를 허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콩고의 판도라’는 현대 문명의 모순과 부조리가 잉태한 더럽고 추한 인간쓰레기들의 집합소이자 현대 문명이 용납할 수 없는 그들의 변태적인 욕망과 탐욕을 해결하는 구역질 나는 변소인 것은 틀림없다.

Pandora in the Congo by Albert Sánchez Piñol
<한때 법, 도덕, 그리고 문명의 힘이 미치지 못했던 곳>

‘다양성의 혼재’의 아쉬움을 달래고도 남는 기발한 이야기

『콩고의 판도라』는 소설 속에 또 다른 소설을 삽입하거나 스릴러, 판타지, 추리, 모험 등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는 특이한 창작 기법을 구사하여 서구 문명에 대한 깊은 통찰을 시도한다. 하지만, 여러 장르의 혼합을 시도하려는 어딘지 모르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말로만 듣던 대필작가의 고단한 노예 생활,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영국과 유럽의 세태를 반영하려는 사실주의적인 풍자 요소, 문학의 예기치 못한 파괴적인 힘, 언론의 노골적인 상업성, 감동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진실과 그것이 대변하는 우매한 대중 등 서구 문명이 잉태한 다양한 문젯거리를 다루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풍요로운 맛은 있지만, 똑 부러지게 하나를 파고드는 집요한 맛은 없다. 어딘지 모르게 우겨 넣어진 느낌이다. 여기에 대필작가로서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주인공이 문학적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성장 소설적인 요소에 주인공이 남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의 여인을 짝사랑하는 애처로운 사연까지 가미되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특정한 장르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여러 장르의 경계를 드나드는, 그래서 딱히 어떤 장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지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작품에 담아내려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소설이 되어 버린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내가 보기엔 충실하게 상업성을 따르면서도 소소한 문학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 어중간하게 붕 떠버린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간간이 발휘되는 유희적이고 기지가 번득이는 문장, 그리고 ‘상업성’, ‘문학성’ 등의 작품성을 따지기에 앞서 누구라도 책 앞에 진지하게 붙들어 매 놓을 수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는 찬탄을 금할 수가 없다. 여기에 잘 만들어진 추리 소설에서나 볼법한 기가 막힌 반전과 독자를 감쪽같이 속여넘기는 서술 트릭은 또 어떠한가? 아무튼, 뭔가 깊고 옹골진 맛은 없지만, ‘다양성의 혼재’라는 새로운 창작 기법으로 할아버지가 들려줄 옛날이야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꼬마들처럼 모험심과 호기심으로 한껏 달아오른 독자의 흥심을 달래주기에는 부족함은 없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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