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투쟁 | 히틀러 | 어쨌든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내가 승리자다!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최고 제약 없는 권위를 가지면서 궁극적인 가장 중대한 책임도 짊어진다. 그러한 것을 못하거나, 또는 비겁하여 자기 행위의 결과에 책임을 지지 못하는 자는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 영웅만이 지도자에 알맞다. (『나의 투쟁』, 478쪽)
주변에 나란히 진열된 책들을 완전히 압도하는 어마어마한 두께 때문에 눈에 잘 띄지만, 같은 이유로 선뜻 손을 뻗지는 못한다. 망설인 끝에 용기를 내어 아령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묵직한 책을 펼쳐보는 순간 히틀러(Hitler)의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장광설과 난삽한 문장에 다시 한번 압도당한다. 그리고 히틀러의 질식할 것 같은 광신적 인종주의에 완전히 녹다운된다.
어떻게든 독파하겠다는 첫 페이지를 막 넘겼을 때의 야심 찬 의지는 38선의 녹슨 기차처럼 부식되고 ‘과연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는가?’, ‘끝까지 다 읽을 가치가 있는가?’ 하는 나약한 의구심이 틈만 나면 뱀꼬리처럼 치켜든다. 기어코 의구심은 이미 녹슬어 너덜너덜해진 의지를 난타해 여기저기 구멍을 뚫어버리고 양초처럼 희미하게나마 글자를 밝히던 집중력은 흐트러트린다. 『나의 투쟁(Mein Kampf, My Struggle)』을 읽고자 힘겨운 ‘나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각다귀처럼 달라붙어 의지를 파먹는 의구심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하는 와중에 젖먹던 힘까지 쏟아낸 끝에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장을 넘길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자로 하여금 필사의 인내심을 발휘하게 하여 전쟁 범죄자의 저작을 독파하게 하였는가? 그것은 히틀러의 진짜 생각을 알고 싶어서이다. 왜 그의 진짜 생각을 알고 싶은가? 한 인간이 전 세계를 파국으로 이끈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대한 역사의 그림자와 승리자의 오만한 편견 속에 가려진 진짜 그의 모습을 알고 싶었다. 그것도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투쟁』을 다 읽고 난 지금 그에 대한 평가를 한마디로 내린다면 바로 ‘파렴치함’일 것이다.
<Bundesarchiv, Bild 183-H1216-0500-002 / CC-BY-SA / CC BY-SA 3.0 DE> |
당연히 독일어 원본이 아닌 정성스레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었음에도 그의 난해한 장광설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책 여기저기에 흩뿌려진 사상의 조각들을 짜맞추면 그 나름의 일관성 있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세계 점령의 음모를 꾸미는 유대인을 멸종시켜야 한다는 지독한 집념과 독일 민족의 생존 투쟁을 위한 동방정책에 대한 끝없는 의지다. 그는 당시 독일의 위기는 비열하고 나약한 정치가들의 무책임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얼마나 책임감 있게 권력을 행사했는가? 어떤 책임감에 전쟁을 일으켰으며 그 자신도 자각한 국민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것에 대해 어떻게 책임졌는가? 무엇보다 그가 비열한 인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앞서 『나의 투쟁』에서 공공연하게 전쟁을 주장했던 당당한 태도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자신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으며 전쟁은 오직 국제적 정치가들, 즉 자기 자신이 유대계이거나 또는 유대인의 이익을 위해 일을 하던 국제적 정치가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고 정치적 유언에서 전쟁의 책임을 비겁하게 회피했다. 이 마지막 유언 하나로 그는 스스로 소인배가 된 것이다.
참으로 길고도 험난한 여정이었다. 역겨운 그의 인종주의가 다시 고개를 쳐들 때마다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는지 나 스스로 끊임없이 되물었다. 히틀러의 편협한 사상 때문이든 지루하고 조야한 내용 때문에든 감히 누군가에게 권하기 어려운 책이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인류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나의 투쟁』이 처음 출판되었을 당시 20여 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곳곳의 사람들도 읽었다. 이처럼 히틀러의 의도는 감추어지지 않고 전 세계에 드러냈지만, 그 누구도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게 의심 많던 스탈린조차 독소불가침조약을 믿었던 것을 보면 『나의 투쟁』은 그저 히틀러 개인적 이상을 담은 자서전 정도로 치부된 것일지도 모른다. 정치가들의 잦은 말 바꾸기와 뜬구름 같은 공약처럼 『나의 투쟁』 역시 민심이나 표를 얻기 위한 일상적이며 무의미한 선거전 전략으로 격하되었고, 유럽 정치가들은 히틀러 역시 실제 정치와 외교에서는 태도를 바꿔 실리를 추구하리라 믿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상황에서 또다시 전쟁을 한다는 것은 이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저리나는 일이었으니까.
인간의 모든 생각이 말이나 글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고, 또 세상에 내뱉어진 말과 글이 모두 실행으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의지를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또한 그 사람이 권력에 도를 넘는 집착을 보인다면, 그가 내뱉은 말과 글이 웃음이 나올 정도로 황당하거나 때론 미친 사람의 의견으로 비칠 정도로 상식을 벗어나는 것일지라도 그냥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히틀러를 통해 배울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히틀러는 정직했고 그가 너무 정직했기 때문에 세상은 속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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