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책을 읽는가 샤를 단치 | 무지無智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Original Title: Pourquoi lire? by Charles Dantzig
책은 결코 삶과 대립하지 않는다. 책은 인생이다. 진지하고 난폭하지 않은 삶, 경박하지 않고 견고한 삶, 자긍심은 있되 자만하지 않는 삶, 최소한의 긍지와 소심함과 침묵과 후퇴로 어우러진 그런 삶이다. 그리고 책은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초연히 사유의 편에 선다. 독서는 그 어느 것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서가 위대한 것이다. (p257)
“왜 나는 책을 읽는가?”
“왜 우리는 책을 읽는가?” “왜 우리는 책을 읽어야만 하는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독자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다.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상투적이면서도 가장 무난한 대답에서부터, 인생의 길고도 긴 지루한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려고, 사심 없는 순수한 지적 욕구로 지식과 교양을 쌓으려고, 누군가에게 독서량을 자랑하려고, 조금은 노골적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중에서 가장 솔직한 대답일 것 같은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라는 등까지 별의별 대답이 가능하지만, 이 대답들을 대충 흩어만 봐도 독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여타 이기적인 행동과는 구별이 되지만, 여하튼) 충분히 이기적인 행동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자리에서 떠오르는 대로 급조한 궁색한 대답들이 현실과는 얼마나 가까울까? 정말 독서가 돈과 명예를 가져다주는 것일까. 독서가 사람도 변하게 할까? 교양도 가져다줄까? 어렸을 적에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교훈대로 책을 많이 읽으면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될까?
이러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머리와 마음속에서 파리처럼 윙윙거리며 떨쳐버릴 수 없다면 샤를 단치(Charles Dantzig)의 『왜 책을 읽는가(Pourquoi lire?)』를 읽어 보자. 독서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담긴 이 책을 통해 독서에 대한 뿌리 깊은 환상도 깨지지만 공평하게 독서에 대한 근거 없는 불안과 불신도 날려버리게 될 것이다.
독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샤를 단치의 부모는 저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굳이 글자를 깨우쳐주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반발이었을까. 샤를 단치는 어렸을 때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수준 높은 독서광이 되었다. 너무 책에만 매달려 지내는 저자를 걱정하는 부모의 기분을 맞춰 드리려고 일부러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을 정도라니 정말 영재가 따로 없다. 그렇게 오랜 시간 쌓인 독서의 힘은 이 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나칠 정도로 지적인 저자의 수준 높은 독서 담론에는 수도원의 오래된 고서에서나 맡음 직한 퀴퀴한 곰팡내가 난다. 그렇다고 격식을 지나치게 차린다거나 특별히 경건하지도 않다. 오히려 날카롭고 직설적인 그의 필치는 경쾌하며 자유분방하다. 때론 뜻대로 그림이 안 그려지는 성난 화가가 마구 붓을 휘두르듯, 연약하지만 부드러운 종이에 두 눈에 광채를 뿜어대며 마구 글씨를 휘갈기는 광기 어린 저자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기도 한다.
독서광이니만큼 독서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 찰 거라고 미리 짐작했다간 나처럼 뒤로 벌렁 자빠질 수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샤를 단치는 독서는 사람을 거의 변화시킬 수 없으며 교양 있는 사람으로도 만들 수도 없다고 말한다. 참말로 놀랍게 들릴지도 모르는 말이지만, 난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 리뷰를 쓰고 있는 나를 보더라도 대한민국 성인의 평균 독서량보다는 상당히 많은 책을 읽었음에도 처음 도서관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음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원래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범인이었는데, 책과 역사 속에 파묻혀 살다 보니 오히려 사람을 괜히 미워하고 불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워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매우 인간적인 감정이다. 꿈보다 해몽이 좋듯, 그것은 아직 인간성은 남아 있다는 방증이다.
독서를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독서를 하는 진짜 이유에 대해 샤를 단치는 독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 만족적인 이기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그것은 리뷰 앞부분에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내가 주절주절 늘어놓은 대답들만 봐도 무난하게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관심을 좀 더 끌고 더 나아가 사랑받기 위한 일이 아니겠는가. 독서의 좋은 영향에 대한 환상과 나쁜 영향에 대한 쓸데없는 기우를 밝히면서 샤를 단치는 좀 더 자세하게 왜 책을 읽는지를 밝힌다. 그것은 지식의 경계를 확장하고, 편견을 없애며,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다. 왜 책을 읽는가? 자기 울타리 안에 갇혀 편견 속에 살면서 무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무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니, 이 얼마나 오만하면서도 명쾌한 비유인가. 그러나 독서는 결국 이타심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저자는 책과 독서, 문학에 대한 기존 관념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한편으로는 독서의 가치를 지키는, 종이책의 가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자처한다. 종이책의 가치가 벼랑 끝에 선, ‘책’의 전환이 이루어지려는 변혁의 시대에 숨을 쉬듯 책을 읽으면서 죽음과 경주하는 저자는 오래전 책으로 사용했던 양피지 두루마리와 대나무 등이 사라졌듯이 전자책으로 말미암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종이책이 없는 세상에 닥칠 위험을 경고한다. 정보화된 미래는 권력자들에게 더 충실히 봉사할 것이고, 그럴수록 인류의 정신은 더욱 조그만 상자 안에 갇힐 것이라고.
인류의 무궁한 상상력과 예민한 감수성과 변덕스러운 감정을 가장 잘 간직한 물리적인 매개체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책이라면, 종이는 무궁하고 예민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의 마음과 친숙하게 이어주는 가장 친근한 매개체였다고 볼 수 있다. 전자책으로도 글을 읽을 수는 있지만, 뭔지 모를 그 낯섦은 여전히 종이책을 찾게 만든다.
마치면서...
프랑스에 가본 적도 없고 프랑스어는 ‘봉쥬르’와 ‘마담’ 정도밖에 모르며 그렇다고 특별히 프랑스 문학이나 역사를 깊이 있게 읽어 본 적도 없는 나지만, 『왜 책을 읽는가(Pourquoi lire?)』는 왠지 프랑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을 프랑스적인 것, 프랑스 문학으로 사색의 정원을 꾸민 이 책에는 보편적인 애국심과는 질과 격이 다른 자부심이 넘쳐 흐른다. 파벌을 형성하고 제자들의 연구를 가로채는 프랑스 대학의 교수들과 다분히 의도적으로 글을 쓰는 졸렬한 작가들을 통렬하게 비판한 부분은 충분히 공감이 가고 시원스럽지만, 작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오만함과 자신의 신념에 대한 강한 확신은 갑자기 찌릿한 오줌 냄새를 맡았을 때처럼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그래서 때론 메스껍고 구역질이 나며 반감이 일어서기도 한다.
그러나 시체 썩는 냄새 같은 견디기 어려운 악취가 아닌 이상 다행스럽게도 사람의 코는 웬만한 냄새에는 금세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오만과 확신의 악취가 사라지면 그제야 자연스럽게 저자 샤를 단치의 놀라운 통찰력과 깊고 넓은 지식으로 곰탕처럼 걸쭉하게 우려낸 독서에 대한 고찰이 머릿속으로 스멀스멀 조금씩 기어들어 오기 시작한다.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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