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6

염소가 웃는 순간 | ‘공포’에 ‘추리’를 덧칠하다

염소가 웃는 순간 | 찬호께이 | ‘공포’에 ‘추리’를 덧칠하다

책 리뷰 | 염소가 웃는 순간 | 찬호께이
review rating

독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글을 쓰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내 책 리뷰는 (초심과는 달리) 건방지게 비평의 날이 좀 과도하게 세워진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책을 읽으면서 받은 감흥이나 좋았던 느낌, 특별히 마음에 와닿았던 아이디어, 이야기, 지식 등을 부각하고, 반면에 좋지 않았던 점은 대충 추려내는 수준 정도로 자제한다, 도대체 이 책이 어떤 책이기에 이런(혹은 이따위) 리뷰를 썼나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럼으로써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의 손 위에 내가 읽었던 책을 한 번쯤은 펼쳐지게 만드는, 그렇게 책 보따리장수 같은 글을 쓰겠다는 것이 책 리뷰를 처음 시작했을 때의 다짐이고 바람이었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받은 감명이나 지식을 다수와 공유하고 싶었고, 그럼으로써 많은 사람이 독서가 고상한 척하는 따분한 취미가 아니라 정말 재밌고 흥겹고 유익한 취미라는 불변의 진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사공이 많지 않았음에도 나의 리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 괴롭다.

초심과는 다른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리뷰가 흘러간 까닭은 애초부터 초심을 넉넉하게 지원해 줄 수 있는 필력이나 지식이 모자란 탓도 있겠지만, 그 모자란 능력에도 불구하고 까칠한 리뷰를 쓰게 된 이유는 책 좀 읽어봤다는 우쭐함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책을 많이 읽은 것이 그게 그렇게도 우쭐할 일인가? 아마도 내가 남들보다 잘난 것 하나 없다는 열등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픈 발악과도 같은 몸부림이 그런 옹졸한 리뷰를 쓰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으론 이런 것도 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좋은 책을 선별하는 능력도 좋아질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양질의 책을 읽는 기회도 더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눈이 높아지다 보니 예전에는 흠잡을 것 없이 재미나게 읽었던 책일지라도 조금은 시시하고 성에 차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인지상정이다. 한마디로 지나치게 눈만 높아졌다고 할까나?

이제는 이런 마음을 다잡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많은 사람의 독서 욕구를 신랄하게 자극할 수 있는 그런 리뷰를 쓰겠다고 다짐해보지만, 세상만사 어디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있었던가? 머릿속 생각을 글로 완벽하게 표현하기는 도스토옙스키 같은 천재 작가도 어려워했다. 하물며 좋게 말해 평범한 재능을 갖춘 나 같은 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지난날의 리뷰에서 별것도 아닌 것으로 나에게 트집잡혀 부당한 곤욕을 치렀던 작품들에 미안한 생각이 굴뚝같다.

책 리뷰 | 염소가 웃는 순간 | 찬호께이

추리소설 작가가 쓴 공포소설? 아니면 그 반대?

나에게 작가 찬호께이(陳浩基)에 관해 물어본다면, 무조건 반사처럼 『기억나지 않은, 형사(遺忘.刑警)』를 쓴 추리소설 작가라고 말할 것이다. 찬호께이와의 기분 좋은 인연도 이 소설로부터 시작했고, 이 소설을 읽고 충격에 가까운 감명을 받은 덕분에 찬호께이의 다른 소설도 기필코 읽어야겠다는 욕구도 일어났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또한, 찬호께이는 『기억나지 않은, 형사』로 일본 추리소설계의 거장 시마다 소지(島田荘司)로부터 “무한대의 재능”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런 찬호께이가 사실은 작가 생활 초기에는 생계를 위해 공포소설을 썼다고 하니 약간은 뜻밖이다(여담이지만, 경제적으로 한없이 너그러웠고 그래서 궁핍한 삶을 살았던 도스토옙스키도 거의 죽을 때까지 생계를 위해 글을 썼다는 것!).

아무튼, 최소한 나에겐 추리소설 작가로만 알려져 있었던 그가 『염소가 웃는 순간(山羊獰笑的剎那)』이라는 공포소설을 내놓았으니 약간의 실망을 안겨주었던 『망내인(网内人)』을 훌쩍 뛰어넘을 추리소설을 기대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어안이 벙벙해지는 것도 당연하고, 기대감이 살짝 어그러지는 것에서 기인한 얄팍한 허탈감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유명 작가가 된 그가 지금에 와서 또다시 공포소설을 집필한 것은 단순히 생계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가 오래간만에 다시 공포소설을 집필한 이유는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서인지, 대성한 작가로서 근근이 연명했던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추리소설을 쓰는 것만큼이나 공포소설을 쓰는 것도 좋아해서인지 등등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없다. 하지만, 오늘 읽은 『염소가 웃는 순간』은 의문의 여지 없는 공포소설이며, 지금까지 내가 읽은 찬호께이의 그 어떤 소설보다 매우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장르소설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어쩌면 작가는 장거리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의 무료함을 달래주거나 방구석에 처박혀 지루함이라는 달갑지 않은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에게 ‘지루할 틈도 없는 재미’라는 선물을 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찬호께이가 또다시 공포소설을 쓴 이유야 어찌 되었든, 『염소가 웃는 순간』은 작가의 또 다른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소설이다. 『기억나지 않은, 형사』가 환상과 과학의 명확한 경계를 논리적으로 무너트렸다면, 『염소가 웃는 순간』은 현실과 초현실의 불명확한 경계를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연결 지었다고 할까나.

비현실에서조차 과학적 • 논리적 엄밀함을 추구

하지만, 찬호께이가 누군가? 미스터리의 환상성과 전통적 관념을 전복시키는 새로운 방법론, 그리고 21세기적 새로운 과학지식으로 작품을 지탱해야 한다는 21세기 본격추리 창작의 조건에 대해 언급했던 작가가 아니었던가? 비록 『염소가 웃는 순간』은 얼핏 보면 풋풋한 대학생들의 혈기 왕성한 활약을 내세운 고만고만한 공포소설처럼 보이지만, 우습게 볼 수 없는 것이 작가가 지향하는 이념과 소설 쓰기의 방법론, 그리고 다른 소설에서 보여준 찬호께이의 작가적 재능이 전체적인 조감도에서 여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빛을 뿜어내는 마법진, 악마 강림 의식, 좀비처럼 땅에서 솟아오르는 시체들, 친구인 척하는 초대 받지 않은 불청객, 7대 불가사의(김전일?), 거울에 갇힌 사람 등 대학 신입생들이 겪기에는 너무나 버겁고 무시무시한 일들은 분명히 공포소설의 특징을 잘 보여주지만, 한편으론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현실을 실제 상황이라고 가정했을 때, 어떤 점에서 모순인지를 암시하고, 더 나아가 진실까지 밝혀낼 수 있는 단서들이 이야기 곳곳에 웅크리고 있는 점은 마치 본격 추리소설을 읽는 것 같다. 또한, 단서와 그 단서들의 조합이 의미하는 진실을 충실하게 따라가다 보면 지금까지 전개된 모든 상황을 단박에 뒤틀어버리는 (아마도 반전을 위해 특별히 섭외된 듯한) ‘시공간’, ‘무의식’ 개념은 톡 쏘는 SF 양념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여기에 주요 갈등과 사건이 사람의 비극적인 심리 상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과 그것이 주변과 상호작용하는 심리적 요인까지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소설 속에서 창조된) 초현실 세계의 작동 원리가 그렇게 허무맹랑하지는 않았다는 것에 소름이 돋을 것이다(스포일러가 될까 더는 말하기가 무섭다).

악령, 원혼, 귀신, 살아 움직이는 시체 등이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에서조차 마치 그것이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엄밀함을 추구하려는 집념을 끝끝내 버리지 못하는 찬호께이의 무서운 패기가 정말 무섭게 느껴지는 소설이다. 아마로 이런 글쓰기 특징은 작가만의 독특한 특징임과 동시에 버리기 어려운 개성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찬호께이는 공포소설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자아와 추리소설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자아 등의 두 인격을 가진 해리성 정체성 장애를 가볍게 앓는 해롭지 않게 적당히 미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염소가 웃는 순간』은 공포소설을 좋아하는 자아가 약간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자아가 끈덕지게 간섭한 결과이니라.

책 리뷰 | 염소가 웃는 순간 | 찬호께이

무섭지는 않아도 재밌기에 추천만은 꾸욱!

『염소가 웃는 순간』은 훌러덩훌러덩 페이지를 넘기는 나의 손이 애인의 옷을 허겁지겁 벗기는 남자의 손처럼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에 대한 기대감에 잔뜩 도취한 나머지 손에 흥건히 땀이 차오르는 것도 잊어버리기 일쑤였을 정도로 몰입감 하나만은 끝내주는 소설이다. 건성건성 읽어나가도 이야기에 푹 빠지거나 맥락을 이해하는 데 거의 지장이 없을 정도로 독자의 멱살을 움켜잡고 책 속으로 끌어당겨서라도 어떻게든 몰입하게 만들겠다는 장르소설 나름의 의지가 번득인다. 내가 볼 땐 찬호께이가 “소설이란 것이 뭐 별것 있어? 그냥 재밌게 읽었으면 된 거잖아~”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기라도 하듯 애당초 작정하고 이 소설을 집필한 것 같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독자는, ‘어 그래? 그럼 나도 가볍게 읽어주지’라는 호응하는 마음으로 무던하게 읽어나가는 것이 앞뒤가 맞기는 하지만, 이러다 보면 꼼짝없이 ‘단서’를 놓치게 된다. 바로 나처럼 말이다. 건성으로 읽어도 재밌지만, 그랬다간 모든 단서를 놓치게 되는 판국이니 함정도 이런 함정이 어딨을까? 공포소설이지만, 추리소설처럼 읽을 수 있으니, 역시 찬호께이의 소설답다.

과학적 엄밀함을 칭송받던 작가에게서 이런 초현실적인 텍스트를 읽고 있으니 재미는 있지만, 적응이 쉽지는 않다. 공포영화와는 달리 공포소설은 거의 읽어 본 기억이 없어서 그런지 초반에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기도 했고, 읽기도 서툴렀다. 몰입도만큼은 매우 높지만, 그 느낌은 여타 잘 쓰인 추리소설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추리소설이 뭔가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들어가려는 지적인 몰입감을 준다면, 『염소가 웃는 순간』은 불난 집을 구경하는 것 같은 어딘지 모르게 불미스러우면서도 그렇다고 쉽게 떨쳐내기는 어려운 불경한 쾌락을 좇는 듯한 몰입감을 대놓고 자극한다.

읽어보면 알겠지만(아니면 내가 공포소설보다는 공포영화를 더 많이 봐서 그런지), 『염소가 웃는 순간』은 글보다는 영화로 제작하면 더 재밌고, 무섭기도 더 무서울 것 같다. 내 상상력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시각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텍스트의 약발이 좀 약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작가가 애써 준비한 극적인 효과나 악령 장면들이 자아내려고 하는 공포감이 나에겐 별로 와닿지 않았다. 화장실 가는 것도 참을 정도로 재밌지만, 그 참고 참은 오줌을 속옷에 지릴 정도로는 무섭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영화로 재탄생한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시청자의 간을 잘근잘근 씹어 콩알만큼조차 남지 못하게 할 정도의 압도적인 장면들을 자아낼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또한, 공포영화라면 빠질 수 없는 약방의 감초 같은 미녀 캐릭터도 이미 설정되어 있고, 뭇 남자들의 입가를 침과 땀으로 흥건히 적실 흐뭇한 장면도 한 컷 정도는 벌써 안배되어 있다. 이렇게 놓고 보니 애당초 영화 제작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구성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정말 돈독이 제대로 올랐나 보다.

걸어 다니는 인터넷이나 다름없는 사람의 장광설을 얌전히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이 다소 불편할 뿐, 모든 사람이 유쾌하고 재미있고 신속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심란하고 정신이 사나워 뭔가에 집중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감히 추천하고 싶다. 고통은 참는 것보다 잊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에서, 재밌는 소설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잠시나마 고통과 분리해 놓는다는 점에서 유익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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