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미 | 비페이위 | 특별함 보다는 모호함이 암시하는 가능성의 미학
당당히, 그리고 교묘히 나를 압박하는 세 자매
밥 먹기 전에는 배고픔을 느끼고, 배불리 먹고 나서는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느끼면서도 다음 식사는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이 옹졸하고 탐욕스러운 새가슴을 살짝 긴장시키는 것처럼 새로운 책을 읽기 전에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들끓는 문학적 배고픔에 시달리고, 읽고 나서는 문학적 성취감으로 한껏 고양된 지적 포만감으로 알량한 거드름을 피우면서도 ‘어떤 이야기로 리뷰를 시작해야 할까?’라는 하는 의무 아닌 의무에 부담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부담에 앞서 당혹감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
마지막 페이지는 이미 넘겨졌고, 그렇게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내가 만났던 세 자매는 못내 나를 닦달하는 것이다. 똑똑하고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셋째 위슈(玉秀)는 쌍꺼풀진 큰 눈을 치켜뜨고 ‘당신이 고작 책 한 권 읽은 거로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떠든다는 거예요?’라고 내가 이제 막 뭔가를 쓰기도 전에 시퍼런 날을 세운다. 평소엔 침묵으로 차분함과 위엄을 두루 자아냈던 첫째 위미(玉米)는 어찌 된 일인지 침묵을 깨고 ‘우리에 대해 쓰고 싶으면 실컷 써보세요’라고 오만과 자신감을 분간하기 어려운 당당한 어투로 격려인지 협박인지 모를 한마디를 내뱉는다. 위미의 말은 위슈가 세운 날 위에 묵직한 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나의 폐부를 깊이 파고든다. 언니들과는 달리 땅딸막하지만 튼튼한 체구를 지닌 막내 위양(玉秧)은 고양이처럼 얌전히 웅크린 채 나를 말끄러미 쳐다본다. 나를 올려다보는 위양의 순진한 눈동자 속에는 자신들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를 사뭇 기대하는 어린이 같은 순진한 호기심이 언뜻 비치면서도, 실수인 척하면서 바퀴벌레를 짓밟아 죽인 요조숙녀의 가식적인 놀람 속에 가려진 냉소도 숨겨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집 지키던 강아지가 도둑놈 바짓가랑이를 물듯이 나를 물고 늘어지고, 지금까지 힘겹게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던 손가락에는 풍선에 바람 빠지듯 힘이 빠지고, 세 자매의 협박 아닌 협박에 머릿속은 쓰레기통 비워지듯 깨끗하게 텅 비워진다. 천지를 진동시키고 태산을 쓸어버릴 듯한 그녀들의 기세에 눌려 쥐포처럼 납작해지지 않는다면, 기껏해야 산산이 부서져 그녀들의 콧방귀 장단에 맞춰 아지랑이 춤을 춰야 하는 한 줌의 먼지가 되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써야 한다. 그녀들도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내가 아직 살아있다.
삶을 밀어붙이는 강력한 동력원, 복수와 증오
하루아침에 몰락한 집안의 권위와 가세를 세우고, 한편으론 파혼의 수치를 씻고자 간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시집간 위미는 철저하게 권력을 추구한다. 반면에 윤간의 치욕과 아픔을 뒤로하고, 그리고 위미와 대립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구미호 같은 기질을 살려 한몫 잡으려는 위슈는 악의 없는 꽃뱀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10년 후, 모든 사람에게 평범하고 평범한 아이로만 보였던 위양은 신통방통하게도 사범학교에 진학하고, 그곳에서 평범한 속에 빛을 내는 방법을 발견한다. 그것은 어둠 속에 숨어 동료를 감시하고 밀고하는 첩자가 되는 일이었다.
위미의 권력 추구가 자신의 가족을 업신여긴 고향 사람들에 대한 복수심에서 기인한 것일까? 위슈가 전심전력으로 여우 짓을 했을 뿐 아니라 꽃뱀 짓을 한 것은 윤간의 통한을 씻고자 하는 복수심에서 기인한 것일까? 위양이 룸메이트를 밀고한 것이 누군가 자신을 무고(誣告)한 것에 대한 복수였을까? 물론 그녀들은 ‘아니야’라고 앙칼지게 소리 지르고 고개를 좌우로 연방 흔들며 강력하게 부인한다. 위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약간의 권력을 누리며 예전 권위를 조금이나마 되찾아 가족들이 안락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위슈는 나중에야 그것이 진정 사랑이었음을 깨달았다고, 위양은 당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공작했을 뿐이라고 발뺌한다.
그녀들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복수심과 증오가 삶을 밀어붙이는 강력한 동력원이자 동기라는 것을 안다. 복수심과 증오심은 한 사람이 가진 천부적인 기질에 의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어 가공할만한 힘으로 성장하기도 하고, 평생 그대로 묻히고 말 수도 있었던 잠재력이 복수심이나 증오심에 자극받아 봇물 터지듯 터지면서 무시무시한 의지력으로 그 사람의 삶을 장악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은 충실하게 사회가 지향하는 원칙을 지켰을 따름인데 본의 아니게 타인의 삶을 짓밟는 일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복잡한 감정 문제와 삶의 원칙과 인생의 목적은 결국 ‘행복’이라는 보편타당한 단어 하나로 귀결된다. 복수를 하든, 권력을 추구하든, 남자를 홀리든, 동료를 밀고하든 그 자신이 행복하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지금까지 행해진 그 모든 행위가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합법이든 위법이건, 도덕적이든 비도덕적이든 등등에 개의치 않고 자기합리화 속에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러란 자기합리화도 그 사람이 행복을 느낄 때야 가능성이 있고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래서 그녀들은 행복할까?’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다.
<위미, 위슈, 위양, 이렇게 세 자매가 나란히 걷는다면?> |
그래서 그녀들은 행복할까?
그렇게나 기세등등했던 위미도 어딘가 불편한 모양인지, 아니면 하등 대답할 가치가 없는지 이 질문에는 학처럼 가녀린 목선을 드러내며 도도하게 고개를 외로 틀뿐이다. 위슈의 매혹적으로 빛나던 쌍꺼풀진 큰 눈의 초점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어딘가 위태롭다. 간망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위양의 의기소침한 표정은 마치 내가 내리는 대답에 따라 자신들의 행복이 결정되는 양 민망하기 그지없다. 그녀들의 가련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한 태도는 나를 부담의 늪으로 미끄러트리는 것도 모자라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떨게 한다.
나는 그녀들의 행복을 운운하는 것을 떠나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가족의 급격한 몰락을 겪고 그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부터 천시당하고 괄시받는 한창 예민할 나이의 소녀가 앞으로 어떻게 삶을 헤쳐나가야 할까? 위슈처럼 한창 꽃 피울 나이에 집단 강간이라는 끔찍한 경험을 겪은 여자가 남은 삶을 과연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그 어떤 트라우마라도 세월의 녹이 스며들면 완전치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녹에 가려지면서 조금씩 치유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 어느 정도라도 치유가 되는 데 필요한 세월은 얼마이며, 그 시기 동안 받는 고통은 누가 어떻게 보상해줄까?
민주적 법치가 정비된 국가라 할지라도 범죄를 당한 피해자에게 국가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이른 시일 안에 범인을 잡아 감옥에 가두는 것 외엔 이렇다 할 보상을 해줄 수 없듯, 결국 이 모든 것들은 한 사람이 평생 짊어져야 할 지극히 개인적인 짐으로 남는다. 그것은 마음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고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가야 할 응어리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위슈처럼 집단 강간을 당하거나 위미나 위양처럼 마을 사람들에게 괄시당하고 업신여겨지는 그런 비극적인 일을 겪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치열한 경쟁 속에 휘말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충돌과 마찰을 겪게 되고, 그럼으로써 증오와 분노, 수치와 원한, 실패와 좌절이라는 격한 감정의 가시는 정신과 육체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온다. 가시는 생각하고 움직일 때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듯 상처를 들쑤시면서 우리를 고통의 열반 속으로 인도한다. 여기에 슬픔과 고통의 경중은 상대적이라는 점을 고려하고, 사람은 어떤 동물보다 감정 이입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세 자매의 일이 결코 그녀들만의 일이 아니라는 참담한 현실에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그녀들이 행복하냐고 묻고 있다면, 할 말 못 할 말 다 쏟아낸 지금의 나로선 그녀들에게 직접 물어보라는 말 이외엔 더 토해낼 말이 없다.
인류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집단 광기로부터의 치유
마지막으로 중국 인민을 정신적으로 강간했던 문화대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으며, 또한 세 자매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어떤 식으로 투영된 작품인지 묻는다면, 1970년 봄에 시작된 일타삼반(一打三反)과 ‘5 • 16’ 분자 색출 운동이라는 두 가지 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조반파의 핵심 분자들이 잇달아 숙청되고 탄압받으면서 1971년이면 사실상 문화대혁명의 혼돈, 혼란, 파괴가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는 시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소설에서는 문화대혁명 초기의 과격했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비페이위(畢飛宇)의 『위미(玉米)』는 (특히 과격했던) 문화대혁명 초기의 혼란과 파괴를 몸소 체험한 작가들이 문화대혁명이 쓸고 지나간 잔해와 상처를 다룬 ‘상흔 문학’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그렇다고 문화대혁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1980년대 이후 출생한 작가들이 내놓은 새로운 중국을 대표하는 문학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가 않다. 천지를 진동시켰던 문화대혁명 초기는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고, 그 진동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가라앉고 평온을 되찾으려 하는 19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옛 상처를 파헤쳐 고름을 짜내려는 ‘상흔 문학’에서 조금씩 벗어나려는 과도기적인 소설이라고 굳이 분류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실상 문화대혁명은 그녀들의 성장이나 인격 형성 과정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는 것이 내 견해다. 그것보다는 초기 산업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도시에 대한 농촌 사람들의 막연한 선망, 경외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옌롄커(閣連科)의 『여름 해가 지다(夏日落)』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爲人民服務)』에서 어떻게든 가족의 호구를 도시로 입적시키고자 하는 군인들의 발악과도 같은 집착에서도 잘 나타난다. 『위미』에서도 농촌을 벗어나 도시에 거주하는 것 자체가 농촌 사람들이 볼 땐 반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며 부러움의 대상이다. 때론 위미처럼 뛰어난 외모와 젊다는 것 외엔 특별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 농촌 여성들도 도시에 사는 간부 남편을 만나 단박에 신분 상승을 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신데렐라 콤플렉스’ 같은 심리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복수심에서든 그보다는 조금 단순하고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출세욕에서든, 어찌 되었든 성공을 꿈꾸고 야심을 불태우는 대담한 여성은 어느 시대를 가나 존재한다는 점에서 세 자매의 이야기는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현재의 중국에서도 성립될 수 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태어나 성장했지만, 혁명적 대의와 과업을 거창하게 운운하기보다는 그보다는 세속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출세와 복수, 애증 등 혁명 과업에서는 금기시되는 개인적 감정과 야욕에 더 긴밀하게 엮여 있는 이 소설은 문화대혁명이 이제는 창작의 중심에서 벗어나 변두리나 풍경 정도로 이완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중국이 인류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집단 광기가 일으킨 대혼란에서 어느덧 자가 치유되는 단계에 진입했음을 방증한다.
마치면서...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 할 시간이다. 지금까지 혼자 잘도 주절대고 떠들어댔지만, 결국 두서없는 지루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나의 형편없는 리뷰로 말미암아 비페이위의 『위미』도 지루하다고 지레짐작해서는 안 된다. 굴욕과 치욕을 겪은 세 자매의 혁명적 이상 같은 모호한 지향성을 지닌 복수심을 다뤘다는 점에서 특별히 우아하고, 특별히 아름다운 감동도, 그리고 특별한 통쾌함도 없지만, 재치가 깨알처럼 쏟아져 나오는 유쾌한 문장과 100m 달리기에는 못 미치지만 10,000m 달리기보다는 빠른, 즉 3,000m 달리기 정도에서 느낄 수 있는 속도감이 독자를 사로잡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어딘지 모르게 마무리가 미적지근하고 막연하지만, 그 모호함 속에 세 자매 인생의 격류가 거침없이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 모호함은 독자가 추리하고 분석해야 할 그 무엇으로 남는다.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광고 수익(Ad revenue)은 블로거의 콘텐츠 창작 의욕을 북돋우는 강장제이자 때론 하루하루를 이어주는 즐거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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