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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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연속 살인사건 | 정직한 심리 트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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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연속 살인사건 | 사카구치 안고 | 정직하지만 교묘한 심리 트릭에 매혹되다

“ … 문에 끈을 달아 저절로 닫히게 한다거나 밀실살인을 가장하는 그런 잔재주는 그 자체로 결국 흔적을 남기고 마니까요 잔재주를 일체 배제한 점이 바로 범인의 어떤 한 심리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지요. 그는 자기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걸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조심조심하고 있지요 그런 침착성과 침묵은 범인이 천재적인 살인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범인의 진짜 동기는 무엇일까요? 어떤 살인이 범인의 진짜 목적일까요? … ” - 교세이 (p186)

오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던

1947년 9월호부터 다음 해 8월호까지 잡지에 연재된 『불연속 살인사건(不連続殺人事件)』은 사카구치 안고(坂口 安吾)의 첫 추리 소설이다. 소년 시절부터 반 다인(S.S. Van Dine)과 엘러리 퀸(Ellery Queen), 그리고 애거사 크리스티(Dame Agatha Christie) 등의 추리 소설을 즐겨 읽었던 사카구치는 성인이 되어 문인 생활을 하면서도 종종 동료 문인들과 함께 추리 소설의 범인 맞추기 게임을 했는데, 그는 누구보다 게임에 열심히 임했음에도 범인을 맞춘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범인 맞추기 게임에서 매번 지기만 해서 오기가 발동했는지, 아무튼 그는 ‘자네들이 절대 알아맞히지 못할 추리 소설을 내가 꼭 쓸 테니까, 어디 두고 보게’라는 전설 같은 말을 남기고 훌쩍 사라졌다가 어느 날 약 350장의 원고용지 묶음을 가지고 잡지 편집부에 나타났고, 그렇게 탄생한 소설이 바로 『불연속 살인사건』이다. 또한, 이 소설이 잡지에 연재되기 시작했을 때 엘러리 퀸(Ellery Queen) 추리 소설만의 별미인 ‘독자에게 도전’을 본떠 범인 맞추기 현상금 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 범인 맞추기 대회에는 우리도 익히 그 명성을 아는 에도가와 란포(江戸川 乱歩) 등 쟁쟁한 문인들이 도전했는데, 뜻밖에도 1등은 도쿄 물리 학교의 한 학생이 차지했다고 전설처럼 전해진다.

탐정 교세이와 긴다이치

어렸을 때부터 추리 소설을 즐겨 읽었음에도 동료와의 범인 맞추기 게임에서는 번번이 실력 발휘를 못 한 한이 맺혔던지 『불연속 살인사건』에서 활약하는 탐정 교세이(巨勢)는 사카구치처럼 문인일 뿐만 아니라 소설이 엉성하니까 범죄를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즉 소설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탐정의 자질이 있다는 어딘가 역설적인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이것은 마치 사카구치 자신은 범인 맞추기 게임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추리 소설은 잘 쓸 수 있다고 동료에게 해명하면서도, 한편으론 늘 범인 맞추기 게임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신 자신을 위로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식의 구차한 해명을 굳이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 소설은 ‘심리 트릭’을 기가 막히게 활용했다.

탐정 교세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이 소설이 연재되기 바로 1년 전에 요코미조 세이시(横溝 正史)의 긴다이치 코스케(金田一 耕助) 시리즈 첫 소설인 혼징 살인사건(本陣殺人事件)이 나왔다는 점이다.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두 소설 모두 살인 잔치라도 벌이듯 대량 살인이 처참하게 벌어진다는 점과 얄궂게도 범인이 계획한 모든 살인이 다 끝나고 난 후에야 진상이 밝혀진다는 점(대부분의 추리 소설 이야기 구성이 이와 비슷하겠지만)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긴다이치와 교세이 역시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면모를 풍긴다는 점이다. 앞으로 나서서 적극적으로 활약하기보다는 좋게 말하면 겸손하게,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소심하게 경찰 수사 뒤에서 사태를 관망하는 한편, 어딘지 미덥지 못한 어수룩하고 능청 떠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죽을 사람이 다 죽고 난 후에야 마침 기다렸다는 듯 진상을 밝힌다. 아마도 추리 소설 마니아였던 사카구치로서는 『불연속 살인사건』을 준비하면서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것이 첫 추리 소설을 쓰는 부담감을 조금 덜어주는 의미에서 약간의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Discontinuous Murder Case by Ango Sakaguchi
<소설 속 단골 살인 무대, 산장>

산장을 애욕의 산란장으로 전락시키는 문인들

도시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는 산장에서 무려 8번이나 일어나는 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문인들이다. 이 소설 속에서 문인들은 서로 노골적으로 야유하고 조롱하고 경멸하고 비꼬고 업신여기고 놀리고 모독하고 험담하는 등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주 무대가 되는 산장을 애욕의 산란장으로 전락시키는 등 문명과 문화를 대변한다는 문인들이 홍등가에서조차 보고 듣기 어려운 파렴치한 짓거리를 서슴없이 행한다. 패전의 영향으로 치부하기엔 정도가 지나친 경향이 있는데 아마도 문인들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의식과 각자의 작품특성이나 성격을 두고 일어나는 논쟁에서 비롯한 날카로운 대립의식 때문에 문인들이 받는 스트레스와 그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픈 자포자기적인 심정을 반영한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별생각 없이 보면 마구 내뱉는 말처럼 보이는 거칠게 오가는 설전 속에 의미심장한 가시를 심어두는 문인들의 그럴듯한 말재주를 음미하는 재미도 가히 쏠쏠하고, 그런 설전 속에서 뒤틀리고 왜곡된 인간의 심성을 은연중에 부각시키는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심리 트릭’에 푹 빠지다

마지막으로 『불연속 살인사건』은 연재를 시작하자마자 범인 맞추기 현상금 대회를 시작했을 정도로 독자 앞에 정직하고 공정한 소설이다. 고로 눈치 빠른 독자는 네 번째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쯤 심증만으로 진범을 추려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만만하게 볼 트릭은 아니다. 왜냐하면, 불연속적인 일곱 번의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알리바이 조사를 통한 공통된 용의자도, 살해된 사람들의 신상 관계를 통한 공통된 동기를 가진 용의자도 추려내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독자는 이 일곱 사건이 서로 다른 범인에 의해 계획된 개별적인 사건인지, 아니면 같은 범인에 의해 계획된 연쇄 살인인지 혼란에 빠진다. 아니면 일곱 사건 중 그중 몇 가지는 범인의 진짜 목적과 들어맞는 살인이고 나머지 살인은 잔악하게도 그 목적을 숨기기 위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설정도 떠올려볼 수 있다. 힌트를 주자면 이 소설이 준비한 트릭은 밀실이나 알리바이 같은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트릭이 아니라 매우 교묘한 심리적인 트릭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자연스러워 보여도 막상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언행이 바로 정답이다. 그 매혹적인 ‘심리 트릭’에 푹 빠져버리지 못한 당신은 더는 추리 소설을 읽을 자격이 없다는 말을 끝으로 지루한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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