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더 | 아야츠지 유키토 | 보이지 않아도 될 것이 보이는 공허한 푸른 눈동자
아야츠지 유키토를 처음 만난 작품은 『십각관의 살인』이었다. 꽤 오래전에 읽었던 작품이라 역시 기억이 가물가물 한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정리를 좀 했다면 기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무튼, 기억나는 건 학생들이 무인도에 놀러 가서 십각관에 묵게 되고, 역시 본격 추리물답게 한 명씩 죽어나가는 살인사건이 중심 이야기였을 것이다. 특이한 점은 무인도에서의 사건 진행과 동시에 육지에서도 추리가 진행되는 점이랄까. 뭐 대충 그러한 기억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도 본격 추리물로써 선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어나더』의 뚜껑을 열어보니 본격 추리물이라기보다는 미스터리 공포물에 가깝다고나 할까. 보통 추리나 범죄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에서 작품 끝에 범인이 밝혀지듯이 소설 『어나더』에서도 딱히 범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엇비슷한 인물이 마지막에 밝혀지고 난 직후에는 굉장히 허무하고 실망이 컸다. 왜 실망했을까. 아무래도 아야츠지 유키토의 작품은 『십각관의 살인』만 읽었기에 본격 추리물 작가로서의 인상이 깊이 남아있었고, 보통 추리소설의 ‘범인 찾기 놀이’가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이 찾는 ‘망자 찾기 놀이’로 대체되는데, 나중에 그 망자가 등장인물 중 누구와 어떤 관계인지 드러나는 과정에서 독자에게 작가가 숨긴 것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작가도 알고, 등장인물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독자에게만 정직하게 말하지 않았던 어떤 사실.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면 그 사실은 원래 작품 초반에 언급된 것이지만, 작가는 그 부분만 독자에게 살짝 가리고 대신 그 사실을 독자가 추리할 수 있게 단서들을 여기저기 숨겨놓았다. 사실 작품 후반부에 그 망자가 등장인물 중 누군가와 어떤 관계인지 드러나는 결정적인 문장만 보면 내가 그렇게 경솔하게 실망한 것을 그렇게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단순히 ‘어라, 이거 원래 앞부분에 나와야 했던 거잖아. 아, 속았다.’라는 생각만 하고 그 뒤에 숨겨진 깊은 뜻을 몰랐을 때는 실망과 짜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이런저런 단서와 내용을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늘어놓고 차분하게 되씹고 음미해 보면 그것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오히려 작가가 그 사실을 유추할 수 있게 곳곳에 숨겨둔 단서들을 떠올려 보는 순간,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온몸을 짜릿하게 관통하는 전율과 함께 그제야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돌덩이처럼 굳은 내 지성의 둔감한 깨달음을 통해 뒤늦게나마 이 작품의 묘미를 마음속으로 전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아차 했으면 아무 감동 없이 그냥 책을 덮어버리는 바보스러운 짓을 해버릴 뻔했다. 고로 이 작품의 특징은 일반적인 추리 소설의 ‘범인 찾기 놀이’가 그대로 ‘망자 찾기 놀이’로 계승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했으니 당연히 그 망자가 누구인지를 나타내주는 단서는 작가가 은근슬쩍 작품 곳곳에 심어 놓았다. 그런 것을 보고도 눈치채기는커녕 오히려 작가를 탓한 내가 바보였으리라. 눈치 빠른 독자들은 여기까지의 내 글만 보고 이 작품을 정독한다면 그 망자가 누구인지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과연 어떤 이야기이기에 그러는지 궁금할지도 모르니 대충 전반부 정도만 살펴보고 넘어가자. 참고로 작품의 진행은 원래 열다섯 살 소년 사카키바라 코이치의 일인칭으로 진행되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보통 삼인칭 시점으로 진행하겠다.
1부 What? Why? (2부는 ‘How? Who?’이다. 제목은 줄거리를 관통하는 화살과도 같다.)
코이치는 중학교 2학년 때 생긴 왼쪽 폐의 구멍으로 3학년부터는 요미야마에 있는 외가에 신사를 지며 도쿄의 사립학교에서 요미야마키타(요미키타) 공립중학교로 전학을 와 다니기로 했다. 요미키타 중학교 졸업할 때쯤에는 인도에 출장을 가 있는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고 그 때는 다시 도쿄에 있는 사립고등학교로 진학할 예정이었다. 외가에는 코이치에게 무척 잘 해주는 외할머니와 최근 치매가 시작된 외할아버지, 그리고 코이치는 실물로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진으로만 본 어머니를 빼닮은 이모 레이코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재작년 가을부터 기르기 시작한 구관조 ‘레이’가 있었다. 코이치의 어머니는 15년 전 친정 요미야마에서 코이치를 낳고 산후조리가 잘못되어 그해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런지, 코이치는 어머니와 닮은 레이코 앞에서는 긴장되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레이코는 예전에 코이치 어머니가 쓰던 별실에 아틀리에를 꾸며 기거하고 있었다.
1998년 4월 20일. 코이치는 재발한 기흉(氣胸: 공기가슴증)으로 다시 요미야마에 있는 시립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데, 4월 26일 일요일 오전에 코이치에게 뜻밖의 방문객이 왔다. 요미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의 남자 반장 카자미 토모히코와 여자 반장 사쿠라기 유카리가 앞으로 코이치가 다닐 3반을 대표해서 튤립 다발을 들고 병문안을 온 것이다. 그들은 별 얘기 없이 시간을 보내다 병실을 나갔다. 나가기 전 느닷없이 카자미는 코이치에게 악수를 청했다. 코이치에게 악수를 하는 카자미의 손은 땀인지 모를 촉촉함이 전해져왔다. 나중에 학교에서 알게 되었지만, 병문안은 미카미 미술 선생의 제안이었다고 했다.
입원 팔 일째 월요일. 코이치는 드디어 드레나지의 튜브를 제거하고 오래간만에 병원을 산책했다.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의 엘리베이터에서 코이치는 요미키타 중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작고 가냘픈 체구에 왼쪽 눈에 안대를 한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지하 2층에 있는 자기 반쪽에 전해줄 물건이 있다며 가슴에 뭔가를 품고 지하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남긴 ‘미사키 메이’라는 이름은 그녀만큼이나 공허하게 코이치를 주변을 맴돌았다. ‘지하 2층에는 창고와 기계실, 영앙실 뿐일 텐데….’
5월 6일 수요일 아침. 드디어 전학 첫날을 맞이했다. 이른 아침부터 코이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인도의 아버지에게서 격려전화가 온 것이다. 전날 밤에는 레이코 이모가, 이모 그리고 코이치의 어머니도 다녔던 요미키타 중학교에서의 마음가짐을 가르쳐 주었다. 코이치는 집을 나서기 전에 어제 이모가 가르쳐 준 가르침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첫째, 옥상에서 까마귀 울음소리를 들으면 안으로 들어올 때 왼쪽 발부터 내디딜 것. 둘째, 3학년이 되면 학교 후문 밖 언덕길에서 절대 넘어지지 말 것. 셋째, 반의 결정사항은 반드시 지킬 것. 넷째는….
그때 “코이치!”하고, 외할머니의 기운찬 부름에 곰곰이 이어가던 회상을 끝마치고 코이치는 등교 준비를 해야 했다. 코이치의 첫 등굣길을 구관조 레이가 나름대로 격려해주었다. 그리고 레이의 늘 같은 외침, "어째서? 레이, 어째서?"
3학년 3반 담임은 국어 담당인 중년의 남자 쿠보데라 선생, 그리고 부담임은 미술 담당인 아리따운 미카미 선생이었다. 두 담임은 코이치에게 계속 뭔가를 얘기할 듯 보였지만, 끝내 말을 걸지는 않았다. 수업이 시작하고, 코이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너무나 조용한 수업시간. 딴 짓 하는 녀석들은 있었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리고 코이치는 교정에 접한 창가 맨 끝자리에 매우 낡은 책상과 의자에 앉아 있는 미사키 메이를 보았다.
점심을 먹고 성실한 반장 스타일인 카자미와 경박한 기분파인 테시카와라의 안내로 학교를 둘러보는 중 이 새 친구 둘은 코이치에게 재앙이나 영, 초자연현상을 믿느냐고 물었다. 코이치는 공포 마니아이긴 했지만, 그런 걸 믿지 않았다. 그런 얘기를 하며 걷다가 10년쯤 전까지는 3학년 교실로 사용했다는 오래된 2층짜리 건물인 0호관 앞을 지났다. 두 친구는 2층은 안 쓰고, 1층엔 미술실, 제2도서실, 동아리 부실이 있다고 했다. 그때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메이를 발견한 코이치는 메이에게 달려갔다. 새로운 두 친구는 매우 난감해했다. 메이도 결코 반갑게 맞이하지는 않았다.
“어째서?……괜찮아 이렇게 하는 거? …… 조심하는 편이 좋아.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몰라.”
그렇게 쌀쌀하게 말한 메이는 코이치 앞을 떠났다. 체육 시간에는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코이치는 쉴 수밖에 없었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 운동장 북쪽 3층짜리 C호관 건물 옥상에 있는 메이를 발견하고 코이치는 옥상으로 뛰어올라갔다. 코이치는 스케치북을 안은 메이에게 지난주 병원에서 온 일에 대해 물어봤다.
"그날은, 슬픈 일이 있었거든."
그러면서 메이는 자기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고 충고했다. 말을 마치고 까마귀 울음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계단으로 향한 메이의 첫 걸음은 오른발이었다.
다음날 목요일 5교시 미카미 선생의 미술 시간. 코이치는 뭉크를 좋아한다는 예쁘장한 남학생 모치즈키 유아를 알게 되었다. 낯가림은 심해 보였지만 이야기해보니 꽤 재미있는 녀석이었다. 녀석은 미술부원이기도 했다. 활동 정지 상태에서 올해 4월부터 부활한 미술부의 담당 선생인 미카미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모치즈키는 미카미 선생에게 반해있었다. 문득 코이치는 오전 수업 때는 있었던 메이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불안’에 대해 얘기하다 테시카와라는 갑자기 “3학년이 됐는데 하필이면 저주받은 3반이 되어버렸으니까.”라고 말했다. 복도를 걷다 오래된 제2도서실 입구의 작은 문틈 사이로 메이를 발견한 코이치는 테시카와라와 모치즈키의 만류를 무시한 채 제2도서실 안으로 들어갔다.
도서실에는 메이 혼자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인형 같기도 한 연필로 그린 아름다운 소녀가 미완성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6교시 시작 종소리와 함께 도서실 구석 사서용 책상 너머에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었던 사서가 나타났다. 전에는 이 학교의 선생이었지만 지금은 사서로 있는 치비키는 수업에 가라고 울림이 좋은 낮은 목소리로 충고했다.
5월 9일 둘째 토요일은 학교가 쉬는 날이라 코이치는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갔다. 결과는 아무 문제 없음이었다. 혹시나 해서 코이치는 입원 시절 친하게 지냈던 같은 공포 마니아인 미즈노 간호사에게 지난주 월요일 4월 27일 그날 이 병원에서 죽은 여자애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간호사는 한동안 입원해 있던 젊은 환자가 갑자기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며 조사하고 나서 휴대전화로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코이치는 병원과 외가의 중간쯤 되는 곳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서 허기를 때우고 무작정 작은 번화가를 걸었다. 그러다 미사키초라는 마을에서 ‘요미의 해질녘의, 공허한 푸른 눈동자의’라는 색다른 간판이 눈에 띄었다. 그 간판 아래에는 ‘들렀다 가세요. - 공방m’이라고 적힌 낡은 나무판자가 걸려 있었다. 호기심에 가게의 진열장을 가까이 들여다보니 검은색 원형 테이블 위에 검은 베일을 뒤집어쓰고 두 손으로 얼굴 쪽의 베일을 들어 올린 여성의 상반신이 있었다. 아주 기인한, 매우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의 소녀의 상반신만 있는 구체관절인형이었다. 그때 간호사에게 전화가 왔다.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서 죽은 여중생이 있었는데, 그 소녀 이름이 미사키가 아니면 마사키일 거라고 전해주었다.
코이치는 다음 주 금요일 저물녘에 다시 미사키초의 그 이상한 가게를 찾아갔다. ‘이곳은 뭐 하는 곳일까?’, 가게 안에는 크고 작은 다양한 인형들이 있었고 주름 가득한 노파가 코이치를 맞아주었다. 노파는 반은 가게이고 반은 전시관이라 말하면서, 코이치는 중학생이라 반값 입장료 250엔을 내라고 했다. 그리고는 다른 손님은 없으니 천천히 둘러보라고 말했다.
가게에 흐르는 조명만큼 어두운 현악 곡조가 흐르고 있었다. 대부분이 아름다운 소녀 인형이었고, 인형들은 다양한 자세와 표정을 가졌다. 싸늘하고도 매혹적이지만, 비현실적인 존재이면서도 사람과 닮은 미묘한 인형들을 뒤로 한 채 코이치는 지하로 가는 계단을 발견하고 조용히 내려갔다. 지하는 또 1층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저 멀리 속세를 벗어난 듯한 광경. 지하라서 그런지 냉기가 스며드는 차가움.
사실 여느 때처럼 오후 수업시간부터 종적을 감춘 메이를 하굣길에 발견하고 같이 있던 친구들의 핀잔도 무시한 채 코이치는 그녀를 미행했었다. 메이가 이번 주에는 결석을 많이 해서 코이치는 걱정되었다. 메이를 따라가면서 거리가 좁혀지면 말을 걸려고 했는데 전혀 그렇게 되지 못했고, 해 질 녘 메이를 놓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가게 앞이었다. 코이치의 앞에 서양식 커다란 관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메이와 머리 길이나 색깔만 다른 인형이 푸르스름한 얇은 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 관 안의 인형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메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그때 관 뒤에서 교복을 입은 메이가 소리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여기에 가끔 내려오곤 한다고 말하면서 안대를 벗고 왼쪽 눈을 코이치에게 보여주었다. 관 속의 공허한 푸른 눈동자의 인형과 똑같은 눈이 메이의 왼쪽 눈 자리에 있었다. 오른쪽 검은 눈동자와는 달랐다. 그녀는 왼쪽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될 것이 보이기도 해서 평소에는 가려둔다고 했다.
메이와 1층으로 올라와 보나 노파는 보이지 않았고 음악도 멈춰 있었다. 메이는 2층은 인형을 만드는 공방이라며 키리카 씨가 그곳에서 인형을 만든다고 했다. 그녀는 지난번 병원에서 '전해줄 물건'이 인형임을 시인했다. 그러나 코이치가 인형을 가지고 간 곳이 영안실이었느냐는 질문에는 외면했다. 언니나 여동생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간호사가 전해준 얘기로는 죽은 소녀는 외동딸이라 했는데’. 메이는 자기한테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다고 말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도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고 솔직히 고백하면서 26년 전 요미야마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쇼와 47년, 1972년, 26년 전, 요미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에 성인지 이름인지도 모르는 미사키인지 마사키인지가 있었어. 1학년 때부터 좋은 외모와 성격, 공부도 운동도 잘해서 인기가 많았던 미사키가 3학년 1학기 때 비행기 사고로 급사하는 바람에 담임과 반 친구들이 모두 충격에 빠져버렸어. 그 아이의 죽음으로 반 학생들이 슬퍼하고 있을 때 문득 누군가가 이런 말을 꺼냈어. "그 애는 죽지 않았어. 봐, 지금도 저기 있잖아."라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던 친구들은 미사키의 책상을 보며 그가 살아있다고 믿기 시작한 거야. 물론 선생도 협력했고. 그런데 졸업식이 끝나고 교실에서 찍은 단체 사진에 미사키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웃고 있었데.
코이치는 메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학교 괴담치고는 아주 치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는 시종일관 기묘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무표정했다. 메이는 이 이야기는 서론에 불과하다며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지만, 외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오는 바람에 코이치는 그 뒷이야기는 듣지 못하고 외가로 귀환해야 했다.
5월 20일 수요일. 교실 게시판에 다음 주 중간고사 일정표가 붙었다. 코이치는 6교시 끝나고 테시카와라와 카자미에게 어제 메이에게서 들은 26년 전 얘기를 꺼내 보았다. 두 친구는 당황하며 난감해했다. 지나가던 미카미 선생도 코이치가 26년 전 이야기의 그것이 시작되던 해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니까 역시 동요를 보였다. 코이치는 외할머니에게도 물어보았다. 옆에 있던 외할아버지는 26년 전에 코이치의 어머니 리츠코는 지금의 코이치와 같은 중학교 3학년 3반이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1학기 때 일어난 미사키라는 학생의 사고에 대해서는 대답하는 것은 피하는 것 같았다. 침묵을 깨고 여전히 "어째서?"를 연발하는 구관조 레이의 짧은 외침만 들렸다. 코이치는 술에 취해 들어온 레이코에게도 ‘그다음 이야기'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녀도 소문으로만 알았다며 역시 자세한 대답은 피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레이코는 코이치에게 타이밍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다음날 목요일에도 역시 메이는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다. 다음 주가 시험인데. 그러고 보니 코이치는 수업 시간에 메이가 지명되어 지문을 읽거나 문제를 푸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
5교시 미술 수업을 위해 0호관으로 가다가 옥상에 메이의 모습을 발견한 코이치가 후다닥 달려가 옥상에 도착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테시카와라였다. 그는 코이치에게 없는 것을 상대하면 위험하다고 충고했다. 그리고 26년 전의 일은 다음 달 되면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아카자와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말도 남겼다. 짜증이 난 코이치는 휴대전화 전원을 끄고 옥상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다음날 메이는 평소처럼 교실에 나타났지만, 그녀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못했다. 테시카와라도 그 뒤로는 가까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주말 밤에 시립병원의 간호사 미즈노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사키가 아니라 미사키이고 이름이라고 했다. 후지오카 미사키.
5월 26일 화요일 중간고사 마지막 과목인 2교시 국어시험 시간. 시작한 지 삼십 분쯤 지났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가는 학생이 있었다. 메이 같았다. 코이치도 답안지를 책상 위에 덮어놓고 나가려고 일어났다. 하지만, 메이가 나갔을 때와는 다르게 담임이 한 번 더 답안을 검토하라며 만류했다. 교실도 웅성거렸다. ‘메이가 나갈 때는 그냥 내버려두고 왜 나만?’
코이치가 교실을 나와 보니 메이는 복도 창가에 창문을 열어놓고 비를 구경하고 있었다. 코이치는 간호사가 들려준 사실을 메이에게 물어보았다. 메이는 후지오카 미사키는 사촌이라고 말했다. 자신과 이어져 있었던 사촌이라고. 코이치가 “왜 그런 거야? 친구들이, 선생님까지도 어째서 너를 …….”라고 묻자 메이는 “없는 존재니까.”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메이는 코이치 외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때 체육 담당인 미야모토 선생이 다급하게 3학년 3반으로 뛰어들어갔다. 쿠보데라 선생에게 뭔가 얘기했고 곧 여자 반장인 사쿠라기 유카리가 허둥대며 교실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사쿠라기는 가까운 동쪽 복도에 있던 코이치와 메이를 보고는 멀리 서쪽 복도로 돌아 달려갔다. 미야모토 선생은 사쿠라기 가족이 사고를 당했다고 말했다. 그때 요란한 소리와 짧은 비명이 복도에 울렸다. 코이치가 달려갔을 땐 이미 손 쓸 방도가 없었다. 사쿠라기는 우산 중앙의 뾰족한 부분에 목을 깊숙이 찔린 채 계단에 쓰려져 있었다. 사쿠라기의 어머니와 이모가 찬 자동차가 원인 불명으로 가로수를 들이받아 이모만 살아남았고, 사쿠라기도 구급차에 실려 가던 중 어머니처럼 사망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 두 사람이 이번 1998년도 요미야마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에 관계하는 '5월의 망자'가 되었다.
6월 2일 토요일. 의사는 지난주 사고 목격 후 가벼운 기흉이 일어난 코이치에게 이상은 없지만, 체육 수업은 아직은 무리라고 좀 더 지켜보자고 진단했다. 그래서 일주일간 학교를 쉬어 3반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코이치는 잘 모르고 있었다. 테시카와라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6월 5일 화요일. 비 오는 날 진료를 마치고 코이치는 약속대로 미즈노 간호사를 만났다. 미즈노와 코이치는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미즈노는 코이치와 같은 3반에 다니는 남동생 미즈노 타케루에게서 뭔가를 들었는데 자신의 남동생은 겁을 먹고 있었고 지난번 그 일은 단순한 사고로 보지 않는 것 같다고 코이치에게 말했다. 코이치는 간략하게 미즈노에게 그동안의 메이에 대해 알게 된 것을 설명했다. 메이는 코이치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고 26년 전 이야기도 아는 대로 말해주었다. 미즈노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동생에게 물어보기로 코이치와 약속하고 다음 만남은 돌아오는 토요일이 좋겠다고 말했다.
코이치는 집에 가는 길에 그 가게에 들렸다. 지난번과 같은 분위기, 지난번과 똑같은 말로 코이치를 맞이하는 노파, 지난번과 똑같이 지하의 관 뒤에서 나타난 메이. 그런데 노파는 지난번에도 오늘도 "다른 손님은 없으니…."라고 말했었다. ‘다른 손님이 없다고?, 그럼 메이는?’
메이는 코이치에게 그것이 시작되어버렸다고 말하며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그리고는 관 뒤로 사라졌다. 코이치는 관 뒤를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코이치는 다시 레이코와 마주 앉았다. 그녀도 3학년 때 언니와 같은 중학교의 같은 3학년 3반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15년 전의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다음 날인 6월 3일 수요일. 아침부터 메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사쿠라기 모녀의 죽음을 화제로 꺼내지 않았다. 그녀의 책상엔 꽃도 없었다. 코이치가 보기에 모두 애써 그녀의 죽음을 외면하는 듯했다. 테시카와라에게 전화로 불러내어 학교 안에 있는 연못 앞에서 만났다. 상황이 변해서 지난번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다고 태시카와라는 대화를 피했다. 그때 코이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미즈노였다. 미즈노는 어제 동생은 자기 반에 메이란 여자애는 없다며 메이가 정말 존재하냐고 코이치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미즈노가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전화통화가 힘들어졌다. 그때 굉음과 함께 미즈노의 놀라는 소리, 그 뒤에 이어진 크고 이상한 잡음, 마지막으로 들린 미즈노의 괴로움에 찬 신음.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다음 날 코이치는 미즈노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레스토랑에서 헤어지면서, "서로 조심하자. 특히 보통은 일어날 리 없을 것 같은 사고에는 더."라고 말했던 그녀가 엘리베이터 사고로 죽은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어릴 적부터 심장이 약했다던 3햑년 3반 남학생 타카바야시가 집에서 심장 발작으로 죽으면서, 이렇게 3학년 3반의 올해 '6월의 망자'는 두 사람이 되었다.
마침내 코이치는 메이에게서 이 저주라기보다는 어떤 현상 같은 일의 26년 전의 ‘뒷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메이의 3학년 3반에서의 이상한 학교생활에 대한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곧 자신에게도 닥칠 ‘꼭 지켜야 하는’ 3반의 결정사항에 대해 듣게 된다. 코이치도 이제 메이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상 전반부 정도만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내가 마지막에 ‘망자’가 드러나는 순간에 ‘속았다.’라는 느낌을 받은 건 ‘이모가 들려준 요미키타에서의 마음가짐’의 네 번째 사항이 처음 언급된 작품의 앞부분에서는 외할머니의 방해로 그냥 넘어가고, 마지막 ‘망자’가 밝혀지는 순간에서야 작가가 말해주기 때문이었다. 작가의 ‘의도적인 숨기기’였기에 순간적으로 ‘속았다.’라는 실망감이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의도적인 숨기기’에는 책의 흥미와 전율을 증폭시킬 깊은 뜻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 ‘네 번째 사항’은 작품을 관통하는 커다란 흐름으로 볼 수 있고, 독자는 ‘네 번째 사항’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유추해 보고 그와 관련하여 망자를 찾는 것이 『어나더』의 묘미였다는 걸 나는 좀 늦게 깨달았다고 볼 수 있다. 그 ‘네 번째 사항’을 앞에서 공개했더라면, 망자를 찾는 독자에게 쉬운 힌트가 될 수 있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확실히 작품의 스릴과 긴장감은 ‘네 번째 사항’을 숨겼을 때에 비해 꽤 많이 떨어졌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그리고 망자를 추리하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단서는 작품에 숨어 있다. 나 같은 둔감한 사람이 아니라 눈썰미가 매서운 독자라면 분명히 찾을 수 있으리라.
더불어 아야츠지 유키토의 『어나더』에 등장하는 3반 학생이나 3반 학생 근친들에게 연달아 나타나는 우연한 사고처럼 보이는 죽음의 배경에는 저주라고 부르기에는 그 원인이 되는 증오나 악의, 복수 같은 죽은 자의 원한은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그 어두운 그림자에는 26년 전 3학년 3반에 있었던 어떤 일이 원인이 된다. 하지만, 그 결과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에는 저주 이상의 더 거대한 뭔가가 그들의 죽음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추리소설에 괴기소설 적인 요소가 보태진 것이라기보다는, 괴기소설에 추리소설 적인 요소가 더해진 것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이렇게 아야츠지 유키토의 『어나더』는 본격 추리물적인 요소와 공포 미스터리, 그리고 어수룩하지만, 정감이 가는 중학생 코이치와 ‘공허한 푸른 눈동자’의 기묘한 소녀 메이와의 운명적인 만남과 그 둘이 차츰 서먹함을 이겨내고 함께 뜻을 모아 저주 같은 어떤 ‘현상’ 풀어나가는 청춘물적인 요소가 혼합된 아주 다양한 맛과 느낌의 작품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여름에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또한,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영화로도 나올 예정이라니, ‘공허한 푸른 눈동자’의 메이를 화면으로 볼 수 있는 그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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