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증거 범죄 | 쯔진천 | 뒤바꾼 출판 순서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가장 인간적인 장르, 추리소설?
나의 추리소설 읽기, 나의 추리소설 더듬이는 모리 히로시(森博嗣)의 SM(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를 읽은 후로 뭔가 업그레이드된 것 같다. 상식에 얽매인 (또는 얽매일 수밖에 없는) 현실과는 확실하게 경계를 긋고 오직 사고(思考)만을 위해 마련된 그 모든 것이 나의 잠자는 뇌세포를 자극한다. 사고의 세계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는 그 유연함과 기발함이 막 기지개하려는 나의 뇌세포를 각성시킨다. 그리하여 나 같은 범인(凡人)도 순수하게 사고의 유희를 즐긴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래봤자 아주 얄팍한 경지의 사고지만, 건방지게도 평범한 발상이나 지극히 상식적인 사고는 시시하게 느껴진다. 한편으론 작가의 개성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너무나도 평범한 문장은 유치하고 시시하다. 한마디로 이전과 비교해서 좀 더 눈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최신 3D 게임에 익숙해진 눈으로 옛 3D 게임을 해보면 밋밋해 보이는 사정과 비슷하다고 할까나).
모리 히로시만큼이나 지울 수 없는 깊고 선명한 인상을 남긴 작가를 또 만나게 된다면, 나의 줏대 없는 지각 체제는 또 한 번의 격동을 겪게 되면서 이전과는 또 다른 시선으로 추리소설을 바라보게 될 것이지만, 앞으로 모리 히로시 같은 추리소설 작가, 혹은 그를 뛰어넘는 작가를 만날 기쁨을 누리게 될지는 어림짐작으로도 모르겠다.
적당한 트릭과 봐줄 만한 반전에 약간의 재미만 있으면 그만인 추리소설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냐고, 혹은 너무 높은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아니냐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다. 현실을 고려하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추리소설이 언제까지나 문학의 변두리에 머무르라는 법은 없다. 그곳에서 만족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또한, 추리소설은 범죄라는 비일상적이면서도 실재하는 사건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천착하고, 그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비일상적인 심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진화심리학적으로 해명해야 할 여러 문젯거리를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추리소설은 어떤 장르의 소설보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논리적인 사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적이다. 왜냐하면, 마가타 시키 박사의 말대로 세상에서 둘도 없는 인류에게만 주어진 최고의 기능이 바로 ‘사고’이기 때문이다.
<‘사고’ 없는 추리소설은 팥소 없는 찐빵?> |
뒤바뀐 출판 순서, 그 이유는?
역시 오늘도 쓸데없는 서두를 주절주절 잘도 늘어놓는다. 이젠 나 자신도 나의 장광설에 감탄사가 절로 터질 지경이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할 이야기와 완전하게 무관한 것도 아니다. 크게는 아니지만, 아주 약간은 은유적으로 상관이 있다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쯔진천(紫金陳)의 『무증거 범죄(无证之罪)』를 논하기에 앞서 그런 장광설을 내뱉은 것은 『무증거 범죄』는 독자의 잠자는 사고력을 마냥 자게 놔두는 ‘무사고(無思考)’적인 유형의 추리소설이기 때문이다(내가 볼 땐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자발적인 지적 노동이기는 하지만, 『무증거 범죄』는 독자가 그 책을 읽지 않는 시간에, 혹은 책 읽는 중간중간 사이에도 소설 속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궁리하고 사고하게 만드는 그 어떠한 수수께끼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미건조하다. 연쇄살인범이 누구인지는 초반부(나 같은 경우는 종이책 기준 24페이지)에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 쉽게 정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애초에 설정 자체가 ‘범인 맞추기’를 지향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연쇄살인범이 범죄 현장에 뚜렷한 몇몇 증거만 일부러 남겨놓고, 나머지 흔적은 싹 지우는 이유에 대해서라도 독자의 추리 근성을 자극해야 할 것인데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 또한 쉽게 추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생각하고 자시고가 없다. 『동트기 힘든 긴 밤(長夜難明)』에 비하면 형편없다는 말을 들어도 전혀 동정이 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연 두 작품의 작가가 같은 사람인지 의심도 간다. 그래도 읽는 재미조차 아주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어서 무협지처럼 아무 생각 없이 읽기에는 적당하다.
이런 혹독한 리뷰를 남기는 이유는 아마도 『동트기 힘든 긴 밤』을 먼저 읽었기 때문이다. 『동트기 힘든 긴 밤』(참고로 모리 히로시를 알기 훨씬 전에 읽었다)의 숨 막힐 듯한 치밀한 구성과 탄탄한 플롯에 비하면, 『무증거 범죄』의 플롯은 엉성하고, 구성은 느슨하다 못해 무너져내릴 지경이다. 아마 이런 이유로 출판사는 작가의 실제 집필 순서와는 달리 『동트기 힘든 긴 밤』을 먼저 번역했는지도 모르겠다. 즉, 쯔진천의 「추리의 왕(推理之王)」 시리즈 중 첫 번째는 『동트기 힘든 긴 밤(2017)』이 아니라 『무증거 범죄(2014년)』라는 것, 그리고 쯔진천은 『동트기 힘든 긴 밤』 이전에 이미 9편의 소설을 집필한 다작 작가였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출판사는 작가의 집필 순서대로 한국에 소개하는 모험을 감행하기보다는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을 먼저 한국에 소개해 인지도를 넓혀보겠다는 상업적 전략으로 한국 독자에게 『동트기 힘든 긴 밤』을 먼저 소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이러한 사정은 쯔진천의 작품 중 『동트기 힘든 긴 밤』이 가장 작품성이 높다는 점을 역설한다. 비록 (『무증거 범죄』를 읽었던 시점을 기준으로) 지금까지 한국어로 번역된 쯔진천 소설이 달랑 두 권뿐이지만, 이 두 권 사이의 작품 특성이나 완성도의 차이가 현격하다는 점에서 앞으로 한국에 소개될 쯔진천의 작품에 얼마나 호감을 느껴야 할지 심히 걱정스럽다. 이런 점을 보면, 일본 추리소설 작가와는 달리 중국 추리소설 작가는 기복이 좀 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풀 수 없는 난제, ‘정의’에 대해서 묻다
『동트기 힘든 긴 밤』으로 무척 깊은 감명을 받고 『무증거 범죄』를 찾은 독자라면 당연히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지만, 사회파 미스터리를 추구하는 작품 특성만큼은 그런대로 봐줄 만하다. 특히 소설 마지막 페이지의 ‘결국은 이렇게 될 일이었다’라는 한 줄은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이야기를 되씹고도 남을 만큼 의미심장한 한마디다. 이 한마디에는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도 무한한 인과관계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그리고 사람의 의지와 이성을 조롱하는 무수한 우연으로 점철된 사회 속에서는 모든 것을 제 뜻대로 관철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철학이 담겨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적 정의를 실현하려는 한 개인의 욕구가 철벽처럼 버티고 서 있는 사법 체계 앞에서 어떻게 무너지고 왜 무너질 수밖에 없는가 하는, 영원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정의 구현’에 대한 난제도 담겨 있다.
쯔진천은 어처구니없는 상황까지 연출해 가면서 (개인적 정의를 실현하려는) 범죄자가 아닌 법의 손을 들어준다. 범죄자가 사법 체제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현실적으로 이치에 맞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론 소설에만 기대할 수 있는 도발적인 결말을 기대한 나로선 현실의 벽과 금기를 허물어트릴 수 있는 허구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 것 같아 조금은 아쉽다.
아무튼, 뭔가 미적지근한 결말은 아무리 피치 못할 사정에서 살인을 저질렀더라도 폭력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법의 관점을 그대로 반영한다. 왠지 작가가 중국 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아 비굴해 보이기도 하지만, 작가로서도 결말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를 나름 고심했을 것임을 고려해보면, 나의 비판은 그저 설익은 감상일 뿐이다.
<진정 법은 ‘정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
현장 분석가 vs 정보 분석가
끝으로 현장에서 찾을 수 있는 정보를 분석하는 사람 뤄원과 정보 이면에 숨은 의미를 분석하는 사람 옌량, 즉 현장을 탐색하는 사람과 안락의자 탐정의 대결이라는 점은 그것이 소설 속에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떠나서 꽤 흥미진진한 주제다. ─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대충 추려보면 ─ 전자는 아멜리아 색스나 니시노소노 모에 같은 사람이고, 후자는 링컨 라임이나 사이카와 소헤이 같은 사람이라 볼 수 있다.
경찰이 범죄를 해결할 때 어느 분야가 더 중요하고 더 크게 이바지하는지 우위를 가리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두 분야가 시계태엽 돌아가듯 매끄럽게 잘 맞물려 돌아가야 사건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무증거 범죄』에서는 뤄원이 패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정정당당한 승부에서 패했다기보다는 뤄원이 우연히 마주친 두 청춘남녀의 범죄 은닉을 도와주려는 변수가 부작용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뤄원뿐만 아니라 뤄원을 쫓던 옌량도 과거에 같은 경험이 있다. 그러하기에 옌량은 뤄원이 지금까지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무너질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도움을 준 두 청춘남녀가 잡혀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 개가 꽁무니를 빼듯 현장을 떠난다.
그렇다. 뤄원과 옌량 모두 범죄자를 도왔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범죄자를 도운 것 역시 범죄다. 그런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위치에 있는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범죄자를 도왔다. 그것은 단순히 동정이나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뭔가 다른 우여곡절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뤄원과 옌량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충분히 동정받을만한 안타까운 상황에 있었다. 한 사람은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사람들, 또 한 사람은 불량배에게 시달리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경찰에게 신고하지 않았다. 왜 신고하지 않았을까? 왜 사회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왜 사회는 그들을 모르는 체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누구보다 우리 자신이 잘 안다. 그런 면에서 뤄원과 옌량이 법을 어기면서까지 범법자를 도운 그 의지와 용기만큼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구현된 미완성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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