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과 극소의 빵 | 모리 히로시 | 코드는 던져졌고, 프로그래밍만 남았을 뿐
SM 시리즈의 정점을 찍는 작품
실로 놀라운 발상의 창작물이다. 음악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 순간 음악을 듣는 ‘나’를 망각하듯, 『유한과 극소의 빵(有限と微小のパン)』은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망각된다.
소설을 읽고 있다는 현실적인 감각은 좀처럼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질 않고, 나의 모든 육체적 • 정신적 기능은 살코기를 갈망하는 좀비처럼 텍스트를 의욕적으로 뜯어먹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나의 지극히 유한한 사고와 그 사고가 추동하는 극소의 논리는 담판 짓듯 현실과 가상현실을, 현실과 환상을 구분 지으려는 필사적인 의지를 발동하지만, 이러한 의지 자체를 유명무실하게 하는 우아하면서도 웅장한 미스디렉션에 완패당한다.
지금까지 쌓아온 나의 사고는 모래성처럼 스르르 무너진다. 소설을 읽는 것이 ‘나’인지, 아니면 소설이 ‘나’를 읽는 것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렵다. 코페르니쿠스 같은 대담한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는 발칙한 사고의 비상은 가뜩이나 부실한 나의 지성을 마비시키고도 남는다. 이쯤 되면 ─ 진짜로 좀비가 된 적은 없지만 ─ 좀비가 되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다만 살아 있는 사람을 잡수는 대신 책을 읽는다는 점에서 좀 더 고상한 좀비라고나 할까? 그런데 책을 읽는 좀비라. 여태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참으로 평화롭고 기특한 좀비이지 아닌가? 만약 이런 좀비가 우리 사회 주변을 어슬렁거린다면, 사람들은 ─ 좀비 영화에 등장하는 무지막지한 주인공들처럼 ─ 다짜고짜 이들의 머리통을 때려 부수려고 들까?
아무튼, 이 모든 것이 요실금 환자가 찔끔찔끔 내지르는 소변만큼 약간의 찝찔한 과장이 서려 있다 하더라도 『유한과 극소의 빵』은 추리소설 애독자뿐만 아니라 독서를 즐기는 모든 사람에게 ‘무아지경’의 참된 경지를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감히 방자무기하게 외치고 싶을 정도로 추천하고 싶다.
한마디로 SM 시리즈의 완결편답게 『유한과 극소의 빵』은 많은 면에서 전편 9편을 뛰어넘는 최고 수준의 경험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더 세심한 손길과 기교적인 세련됨이 묻어나오는 문장, 긴장과 해소의 유쾌한 반복을 완만한 사인 곡선 같은 일정한 호흡으로 느낄 수 있도록 정교하게 프로그래밍이 된 텍스트, 지금까지 사용된 ‘트릭’이라는 개념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길이 없는 엄청난 스케일에서 펼쳐지는 엄청난 트릭, ‘인간 계산기’ 모에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사이카와 교수와 마가타 시키 박사와의 세기적인 사고력 매칭, 패러다임의 파괴와 창조를 추동하는 과감하고 도발적인 발상, 인간의 존재 • 삶 • 죽음 • 인간성 • 자유 의지 등 오래전부터 인류가 질문해 온 철학적 화두를 이공계적인 기술(記述) 풀어내려는 냉철한 의지 등등 『유한과 극소의 빵』은 여러 면에서 이전 작품들보다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SM 시리즈 중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수작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물론 분량도 시리즈 10편 중 단연코 최고다.
<사고하면 사고할수록 빠져드는 SM 시리즈> |
사고의 유희 속에 숨겨진 비현실성
아직도 감흥이 가라앉지 않은 난 모리 히로시(森博嗣)만큼 내공을 쌓은 추리소설 작가가 또 있을까 하는 탄성을 자아내고 있다. 이만한 추리소설 작가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이만큼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고집스레 작품에 투영시킨 추리소설 작가가 또 있을까? 한편으론 왜 그는 ‘트릭’에만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왜 그는 공상과학적인 발상을 발상에서만 그치지 않고, 인류의 미래에 의문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의지로까지 사용하는 걸까? 왜 그는 자기가 낳은 아이마저 죽이는 마가타 시키 박사 같은 사람에게 가장 완벽한 천재라는 재능을 부여한 것도 모자라 최고로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찬사까지 아끼지 않은 걸까? 마지막으로 왜 그는 트릭의 세부적인 완결성, 즉 사건을 현실의 수사 기법을 토대로 인과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증거를 적확하게 제시하기보다는 일부러 다양한 가설을 허용할 수 있도록 곳곳에 빈틈을 내버려 둔 것일까?
아마도 이 마지막 질문이야말로 모리 히로시 소설이 기존의 본격 추리소설과는 지향하는 작품 철학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는 점을 대번에 드러내는 핵심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즐겨온 본격 추리소설이란 외딴섬 같은 폐쇄적 상황, 그 안에 포함될 수도 있는 밀실, 살인과 시체, 등장인물 중 한 명은 반드시 명탐정 역할로 배정, 단서를 공정하게 제시, 범인은 반드시 주요 등장인물로 한정, 그러면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 등 이런 요소들이 서로 완벽하게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트릭을 완성하는 것에 무게를 둔다.
트릭을 구성하는 요소로 밀실이 자주 등장하고, 살인과 시체도 있고, 두 주인공(사이카와와 모에)이 탐정 역할을 맡고, 범인의 의외성만 놓고 보면 SM 시리즈 역시 기존 본격 추리소설과 크게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SM 시리즈는 단서만큼은 공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현대 과학수사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는 지문이나 머리카락, DNA 같은 증거를 포함하여 물적 증거는 단서에서 제외되거나 무시할 정도로 중요도가 떨어진다.
그런 면에서 SM 시리즈는 매우 비현실적이다. 다르게 말하면 독자는 오직 소설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불가능한 상황들과 맞닥트리게 된다. 소설에서 일어나는 범행 자체만을 놓고 범인을 물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증거가 거의 없다 보니 거의 완전 범죄 수준이다(이러한 점들이 사실성을 중시하는 독자들에겐 가장 큰 단점으로 다가올 것이다).
고로 독자는 오직 사건 현장에 일어난 현상만을 보고 모든 것을 추리해 내야 한다. 어떻게 보면 가장 원시적인 수사 기법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사고력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수사 기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건을 적합하게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이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고, ─ 아둔하게도 시리즈 초반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 모리 히로시는 이러한 관점을 시리즈 내내 철칙처럼 지켰다. 이러한 점들은 시리즈 초반보다는 후반으로 갈수록 엄격하게 지켜진다. 고로 SM 시리즈는 모리 히로시의 실험적인 의도가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한편으론 본격 추리소설의 진화로도 볼 수 있다.
앞선 리뷰에서 난 이러한 점을 ‘가설 공장’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즉, 포인트는 정답을 맞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을 적합하게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질문을 제시하고, 그 질문에 따라 자신만의 가설을 세우는 그 프로세스(과정)에 있다. 정답은 어림짐작으로 누구라도 맞출 수 있다. 하지만, 왜 답이 그렇게 나왔는지, 그리고 그 답을 도출해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면 답을 맞힌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단답식에서 논술형으로의 이행, 이것이 모리 히로시의 의지라고 볼 수 있다.
사고하는 사람, 호모 코기탄스(homo cogitans)
혹자는 명확한 결과를 헤살하는 빈약한 단서와 다양한 가설을 부추기는 허점을 두고 작가의 부족한 능력을 탓할 수도 있다. 기존 추리소설처럼 뭔가 딱 맞아떨어지는 깔끔한 재미가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는 작가만의 작품 철학이 있다. 모리 히로시가 강조하는 것은 앞뒤가 딱 맞아떨어지는 정답보다는 그 답이 나올 수 있기까지의 사고 과정에 있다. 작가의 ‘사고’에 대한 집념과도 같은 애착은 천재 중의 천재로 일컬어질 수 있는 마가타 시키 박사의 말을 통해서 진의가 드러난다.
“ ~ 인간보다 빠르게 뛰고, 높이 뛰고, 힘이 센 동물이 지구 상에는 수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고로 인간의 가치는 그런 게 아닙니다. 기억의 양과 정확도, 혹은 계산 속도도 도구를 쓰는 것으로 개선됩니다. 그렇다면 뭐가 남을까요? 바로 갈고 닦은 사고뿐입니다. 세상에서 둘도 없는, 인류에게만 주어진 최고의 기능 ~ ” (p107)
그런 면에서 오직 인간에게만 성립하는 환상이자 인간만 떠올릴 수 있는 허구로 구현된 가상현실은 현실에서 자기방어, 애정과 질투, 독점욕, 지배욕 등 그런 것들보다 더 인간성을 추구한 행위다. 사고하지 않는 인간은 ‘인간성’ 담론에서 제외된다. 인류를 지칭하는 용어는 지혜로운 사람(homo sapiens)보다는 사고하는 사람(homo cogitans)이 더 적합하다. 사고하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모리 히로시는 SM 시리즈를 통해 ‘사고하는’ 독자를 양산해내는 동시에 독자의 ‘인간성’을 극대화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편으론, 이런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사고력을 갈고닦음으로써 자신의 인간성을 마음껏 드러내고 싶은 욕심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장르가 장르이니만큼 그 ‘사고’의 대부분이 살인 사건을 분석하고 설명하려는 데만 소비된다는 점이 조금은 께름칙하다면 께름칙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점을 제외하더라도 방심한 상태로 이야기에 끌려가는 것만으로도 유쾌한 작품이니 초장부터 자신의 게으른 사고력 때문에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하물며 차갑고 쌀쌀맞게 느껴지면서도 시적인 담백함과 이성적인 냉철함이 묻어나오는 문장, 그리고 간간이 터지는 위트와 철학적인 테제로 무장한 지성미 넘치는 텍스트는 독자가 하품할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최초의 코드형 추리소설?> |
코드형 추리소설의 탄생
반 다인의 20칙(Twenty rules for writing detective stories) 중 하나를 어겼다는 점, 『차가운 밀실과 박사들』처럼 오직 밀실 트릭을 완성하고자 일반적인 설계를 벗어난 방을 따로 준비했다는 점(모에가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두 개의 방을 백화점 안의 상점들처럼 나란히 배치하여 외부에서 볼 수 있게 하지 않고, 일부러 방 하나를 밀실로 만들어 범인을 도운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것은 테스트 중인 장비이니만큼 피험자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외부인의 관찰이 필요하다고 본다면 밀실 트릭을 위한 의도성을 다분히 엿볼 수 있는 배치다) 등은 옥에 티라고 볼 수도 있지만, 패러다임이나 상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와 그에 기반한 새로운 형식의 추리소설을 개척하려는 의지가 확고하게 느껴지는 모리 히로시의 작품 세계관으로 볼 때는 굳이 꼬집어 비판할 필요성은 못 느낀다.
그렇다고 ‘추리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는 ─ 독자 나름의 ─ 방법론을 형성하는 데 일정한 이바지를 해 온 ‘반 다인의 20칙’ 같은 과거의 규칙들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처사도 지나치다고 볼 수도 있다. 다르게 말하면, 모리 히로시의 작품은 본격 추리소설이 (시미다 소지의 말을 빌리자면) 코드형 추리소설(사건이 구성하는 요소들을 기호화하여 그것이 성립하느냐에 무게를 두지 않고 망라하는 데 집중하는 것)로 진화해가는 그 과도기적인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내가 볼 때 코드형 추리소설의 특징은 사건을 구성하는 코드를 가지고 전체 프로그램을 완성하는 사고력의 상당 부분을 독자의 몫(앞에서도 언급한 ‘가설 공장’을 떠올리자)으로 남겨놨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전까지 읽어온 추리소설에서는 요구하지 않은 상당한 수준의 사고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비단 모리 히로시의 작품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의 작품을 좀 더 재밌고 알차게, 그리고 제대로 읽는 방법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무언가와 그 무언가를 가지고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내 리뷰는 이것에 얼마간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으면 하는 나의 의지가 글쓰기라는 수단을 통해 구현된 것이라 하겠다.
끝으로 증강현실에서 모에와 마주한 마가타 시키 박사는 이런 말을 한다.
“ ~ 예측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녔어요. 제게는 당신의 사고 및 감정 비약이 만화경보다 아름다운 무작위로 비쳤습니다.” (p656)
지금으로부터 무려 30여 년 전에 (참고로 SM 시리즈는 1996~1998에 완성되었다고 함) 가상현실뿐만 아니라 증강현실까지 떠올려낸 다음 그것을 자기 작품 속에 성공적으로 재현해 낸 모리 히로시의 아찔한 창의성도 탄복할만하지만, 그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마가티 시키 박사의 말처럼 ‘예측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 불릴만한 걷잡을 수 없는 사고력이 나의 방치된 지성의 밭을 일궈주는 트랙터가 되어준다는 점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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