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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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혹의 죽음과 용도 | 추리소설의 마술화?

환혹의 죽음과 용도 | 모리 히로시 | 추리소설의 마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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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는 사람을 고려해야만 하는 트릭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는 ‘사람은 속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이라면 대단히 좋아한다’(한 가지 더 조건을 추가한다면 물질적 손해는 없다는 한해서)‘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여기서 ‘아주 조금’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 이 정량적일 수 없는 트릭의 수위(혹은 속인 정도?)에 따라 속는 사람은 불쾌할 수도 있고, 유쾌할 수도 있다. 이 수위의 미묘함이 속고 속이는 관계에 있는 마술사와 관객, 그리고 추리소설 작가와 독자 사이의 보이지 않는 긴장감을 쫄면처럼 팽팽하게 유지해주는가 하면, 반대로 푹 삶아진 국수처럼 힘없이 끊어트리기도 한다. 사기를 쳐도 적당히 치라는 말이 있듯 아무리 잘 꾸미고 신중하게 계획한 트릭이라도 정도가 지나치면 박수는커녕 반감을 사는 일이 더 많으며, 정도가 부족하면 당연히 시시하다는 불평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한마디로 속이려면 적당히 잘 속여야 하는데, 내가 볼 땐 이 ‘적당히’를 조절하는 것이 ─ 마술사보다는 ─ 추리소설 작가에게 있어서 트릭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 같다.

정답을 맞히든 못 맞히든 왕성한 호기심으로 문제에 골몰할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트릭이나 수수께끼는 완전히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관객이나 독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무도 그것이 수수께끼임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것은 수수께끼가 아니다. 고로 트릭은 마냥 유유자적할 수는 없다. 누군가가 트릭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하고, 그래서 그 사람이 트릭을 향해 호기심의 더듬이를 곤두세우는 순간 밑도 끝도 없는 무아지경의 추리 세계로 기꺼이 빠지도록 장치를 준비해야 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자 작가의 재능이다. 트릭이 너무 난해하면 호기심의 더듬이가 발기하기도 전에 흥미를 잃고 고개를 숙일 테고, 트릭이 너무 쉬우면 작가가 애써 준비한 장치들은 도루묵이 되면서 독자는 김빠진다. 트릭을 준비하는 사람은 속는 사람의 처지까지 철저하게 계산해야 하니 참말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더군다나 이것은 속는 사람의 지적 수준이나 그날그날 바뀌는 기분이 의외의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딱 들어맞는 ‘정답 같은 트릭’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 비록 수학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정답은 없지만, 다수의 관객이나 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최적의 근사치는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고의 트릭은 존재할 수 있다. 다만, 시대, 문화, 국가, 나이, 직업 등의 요소에 따라 무차별적으로 변하는 독자의 성향은 오늘은, 혹은 오늘날에는 기꺼이 즐겁게 속아줄 수 있는 트릭일지라도 내일에 가서는 터무니없이 알량한 속임수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트릭의 세계는 매정하다. 따라서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 혹은 최고의 트릭이란 평판 역시 매우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속아도 맘껏 웃을 수 있는 추리소설의 재미>

증거에 의존하지 말고 기발한 발상으로 문제를 풀어라

그렇다면, 모리 히로시(森博嗣)가 『환혹의 죽음과 용도(幻惑の死と使途)』에서 선보인 트릭은 정도가 지나친가? 아니면 부족한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그 순간만의 감정을 논하면 뭔가 속았다는 느낌이 압도적이었다. 사실 최고의 트릭은 속은 사람이 속았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해야 한다는 점에서 『환혹의 죽음과 용도』의 트릭은 ─ 최소한 내 처지에서는 ─ 그렇게 성공작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일단 반 다인의 20칙(Twenty rules for writing detective storie) 중 하나이기도 한 범인의 설정이 그러하다. 반 다인의 20칙은 범인은 소설 중에서 어느 정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이어야 한다고 기술한다. 그렇게 해서 독자가 관심을 끌게 해야지 전혀 관심이 없던 인물이 막판에 범인으로 깜짝 등장하여 독자의 모든 사고를 수포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녹스의 10계(Knox's Ten Commandments) 중의 하나를 범했다. 이 자리에서 어떤 계를 범했는지 얘기하면 트릭을 푸는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굳이 밝히지는 않겠지만, 이 두 가지 이유로 ─ 사이카와가 아닌 ─ 눈꼴사나운 모에의 사건 강의를 들으면서 느낀 감정은 놀라움보다는 배신감이다. 범인을 유추하기 위한 직접적인 증거는 전무후무한 상황에서 ─ 여러 설명이 가능한, 그래서 충분히 함정에 빠지기 쉬운 ─ 몇 가지 정황 증거에 의지한 상상력으로 구현되는 무수한 가능성 중에서 사건을 가장 적합하게, 그리고 오컴의 면도날처럼 가장 경제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아내는 것이 『환혹의 죽음과 용도』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읽은 S & M 시리즈 전반에 걸친 특징이었는데, 이번은 좀 도가 지나쳤다고 할까나?

등장인물에 마술사를 여러 등장시켜 독자를 환혹시키는 미스디렉션(misdirection) 장치로 활용했다는 점은 높이 사줄 만하나, 트릭을 해체하는데 힌트가 될만한, 그리고 범인을 지목할만한 물적 증거는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단 하나도 없었다는 점에서 명백히 독자를 속인 셈이다. 사이카와의 솔직한 고백처럼 증거는 불충분했고, 트릭은 비현실적이었다. 사건을 가장 그럴듯하게, 그리고 가장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최적의 가능성을 오직 상상력만으로 쥐어짜 내야 한다는 점이 가혹하기는 하나, 한편으론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는 뇌세포들을 풀가동시킬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이기도 하다. 증거를 부지런히 긁어모아 차근차근 퍼즐을 완성해 나가는 추리 본연의 맛은 확실히 부족하지만, 번득이는 사고력 한 방을 노려볼 수는 있으니 스스로 기지가 남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싶다. 물론 난 시원하게 낙방했지만, 그렇다고 당신이라고 별수 있겠는가 하는 시건방진 말은 하지 않겠다. 로또처럼 단 한 방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물증보단 기발한 발상으로 문제를 풀자>

동기, 드디어 사건을 이해하는 열쇠로 등장

범죄 동기는 사이카와의 말처럼 그저 우리 자신의 정신 안정을 위해 자신을 이해시켜줄 적당한 논리를 구축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혹은, 교고쿠도의 말처럼 동기는 나중에 가서 범죄를 범죄로 만들기 위해 편의상 타인이, 혹은 사회적 통념이 갖다 붙인 이유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환혹의 죽음과 용도』 이전 작품까지 S & M 시리즈에서 범죄의 동기는 매우 부차적이었다. 동기는 몰라도 사건이 물리적으로, 그리고 시간상으로 일어난 자초지종을 풀어내는데 문젯거리가 될 것은 없었다. 동기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었으며, 이러한 점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매우 둔감한 사이카와와 모에라는 특별한 준비된 ‘이공계 캐릭터’에겐 매우 잘 어울리는 설정이기도 하다. 즉, (인문학적인) ‘왜’보다는 (이공계적인) ‘어떻게’에 치중하는 것이, 그래서 지근덕거리고 때론 불쾌함을 초래하는 사람의 감정적인 분위기에 시달리지 않고 오로지 사건의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추리에만 몰두할 수 있다는 점이 S & M 시리즈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이런 얘기를 꺼냈다고 해서 『환혹의 죽음과 용도』가 이전 시리즈와는 달리 동기를 보는 관점을 달리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환혹의 죽음과 용도』 역시 이전 시리즈처럼 동기는 몰라도 번득이는 아이디어 하나, 혹은 무수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사고력의 혹사 속에서 제대로 된 것 하나만 건진다면 수월하게 트릭을 풀어낼 수 있다. 다만, 이전 시리즈와는 달리 『환혹의 죽음과 용도』에서 동기는 사건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가장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즉, 동기를 알고 있다면 시시각각 뇌로 공급되는 소중한 산소를 쓸데없이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언급한 것은 『환혹의 죽음과 용도』이 앞의 다섯 편과 비교해서 뭔가 느슨해졌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기 때문이다. 확실한 증거도 없고, 트릭은 비현실적인 반면에 그동안 소홀해 오던 동기가 트릭을 뒷받침해주는 유일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이 영 개운치 않다. ‘아주 조금’ 속이려고 한 것이 의도치 않게 빗나간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내가 제대로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전작과의 호흡을 잃어버린

이뿐만이 아니다. 『환혹의 죽음과 용도』의 사이카와는 ‘이 사람 사이카와 맞아?’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완전히 딴 사람 같다. 서먹서먹하다.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사람이 변했다. ─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면 ─ ‘─다’라고 끝나는 딱딱하고 건조한 말투는 마치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을 앉혀놓고 문답 테스트를 하는 것 같다. 사이카와 특유의 무게감과 진중함이 사라졌다. 대신 아이처럼 유치해졌다. 천재 초등학생이 사이카와 대역을 맡은 느낌? 말괄량이에서 점잖은 어른으로 변해가는 것 같았던 모에는 ─ 마치 반전이라도 선보이려는 듯 ─ 다시 호들갑스러운 여자로 회귀하려는 듯하다. 이런 점들이 앞의 다섯 편과의 호흡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있다. 컴퓨터를 포맷하고 전에 사용하던 운영체제를 그대로 설치했지만, 이전 설정을 제대로 복구하지 못해 뭔가 잘 맞지 않고 어색한 느낌이다. 그동안 웬만해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의식적인 방어망 속에 꼭꼭 숨어있던 사이카와 내면의 인격을 표출하기 시작한 점은 ─ 이러한 설정이 다음 시리즈를 아직 읽지 않은 상태라 본격적인지 일시적인지 알 수는 없지만 ─ 한 사람을 완벽하게 까발리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비밀스러움을 남겨두는 것이 매력의 여지가 더 크다는 점에서 조금은 실망스럽다.

아마도 이런 이유는 다섯 번째 작품인 『봉인재도』에서 S & M 시리즈를 끝을 낼 처음의 계획이 틀어지면서 순서가 바뀌고, 그래서 전체적인 구조를 다시 설정해야 하는 애로사항이 낳은 부작용이 아닐까 싶다. 물론 주인공들의 개성이 1기에서 ─ 『환혹의 죽음과 용도』를 그 첫 번째로 하는 ─ 2기로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오해이자 착각일 수도 있다(혹은 번역의 문제?).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로 끝나는 사이카와의 말투는 심히 거북하다.

<우리가 본 망상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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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면서...

본의 아니게 아주 사소한 불평 • 불만을 토로하고 말았는데, 이것은 『환혹의 죽음과 용도』를 이전 시리즈처럼 작가와 두뇌 대결을 펼친다는 ─ 그렇다고 비장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치는 않은 고만고만한 ─ 각오로 읽었기 때문에 초래한 결과다. 퀭한 두 눈에 이성의 불을 켠다. 그렇게 시동이 걸린 초췌한 사고력의 멱살을 잡아 반강제적으로 일으켜 세운 다음 작가의 트릭을 멋지게 깨부술 기세로 이야기 속으로 침잠한다. 이것이 내가 『환혹의 죽음과 용도』를 대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추리소설을 포함한 모든 책을 어떻게 어떤 식으로 읽느냐는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자 성향이며,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이 책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는 정답은 없으며 정답이 없기에 다양한 감상평이 존재할 수 있다. 참고로 누가 어떻게 읽든 비슷한 감상평이 나올 수밖에 없는 책은 독자를 지극히 제한적인 상상력 속에 가둔다는 점에서 최악이다. 진짜 잘 쓰인 소설은 같은 사람이 두세 번을 읽더라도 매번 다른 감상이 나온다.

『환혹의 죽음과 용도』를 마치 마술 관람하듯 읽는다면 매우 다른 감상이 나올 수 있다. 즉, 마법 같은 마술이 실존한다는 것을 믿는 사람처럼 기꺼이 유쾌하게 속아 줄 마음으로 편안하게 읽는다면 모리 히로시의 이번 트릭은 ─ 트릭 자체만을 놓고 보면 ─ 미스디렉션까지 적절하게 가미됨으로써 지금까지 S & M 시리즈가 보여준 트릭과는 색과 멋이 다른 새로운 시도다. 추리소설에 마술적인 기법을 도입했다는 사실 자체는 신선하고, 그 마무리를 한때를 풍미한 대마술사의 최후답게 비장하면서도 신비한 여지를 은은하게 남겨둔 점도 나쁘지는 않다.

트릭이라는 것이, 정교하게 제작된 기계를 하나하나 분해하듯 그 구조를 낱낱이 분해하며 뭔가를 깨우치는 재미도 있지만, 완성된 기계가 너무나 아름답게 작동한 나머지 그것을 분해할 엄두조차 안 날 정도로 매혹당하는 재미도 있다. 분명히 『환혹의 죽음과 용도』는 후자에 속하지만, 이것은 기존 추리소설의 작법과는 차원이 다른 시도라는 점에서 호불호가 꽤 갈릴 것 같다. 나처럼 속았다는 느낌이 먼저 들면 그 독자에게는 실패한 셈이고, 독자 역시 작가의 의도대로 제대로 읽었다고는 볼 수 없다. 반대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정말 한 편의 멋진 마술이었다는 탄사를 절로 쏟아낸 독자가 있다면 그 독자야말로 작가의 의도대로 제대로 읽은, 그리고 가장 재밌게 읽은 독자다.

마지막으로 소설 끝부분에 사이카와와 모에의 인간적인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이 하나 나온다. 범인이 불구덩이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을 때, 그를 구출한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이미 늦은 상황이긴 하지만, 사이카와는 질식의 위험을 무릅쓰고 불을 끄려고 온 힘을 다하지만, 모에는 사이카와를 말리며 그런 그의 행동은 불합리하다고 딱 잘라 말한다. 정말 매정하고 쌀쌀맞기 그지없다. 이래서 모에는 정이 안 간다. 설령 이것이 그녀가 부모를 갑작스러운 사고로 잃은 트라우마에서 기인했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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