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당쟁사 | 이성무 | 당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과 식민사관의 기원
신봉승의 『조선 정치의 꽃 정쟁』, 이덕일의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에 이어 이성무의 『조선시대 당쟁사(1, 2)』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정도가 동네 도서관에서 ‘당쟁’이라는 단어로 검색해 나온 결과물의 어림잡아 반은 되는 것 같다(이 리뷰를 작성한 2012년 기준). 이제 도서관에서 당쟁 관련해서 내가 읽어볼 만한 책은 이이화와 이한우의 책, 이렇게 두 권 남았는데 그것들도 때가 되면 읽어볼 계획이다(하지만, 네이버에 작성했던 리뷰들을 틈틈이 구글 블로거로 옮기는 2017년 지금까지 아직 읽지 못했다).
일단 이 책은 두 권이라 그런지 당연하게도 앞의 두 책보다 더 많은 사료와 의견이 담겨 있다. 그 중 특기할 만한 것은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일본 학자들과 조선 실학자, 그리고 광복 이후 학자들의 견해가 자세히 소개된 점이다. 그리고 앞의 두 책, 즉 신봉승과 이덕일의 책이 정조대에서 순조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끝난 것에 비해 이 책은 명성황후 살해 시점까지의 당쟁과 권력 투쟁을 다루고 있다. 고로 세도정치의 진행과정과 그 배경을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그동안 식민사관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왔지만, 식민사관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학자들과 조선 학자들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소개된 책은, 내가 접해본 여러 책 중에서는 이 책이 처음이다. 어찌 보면 내가 책을 많이 안 읽어서 인제야 읽게 된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최소한 이덕일의 책, 신봉승의 책, 그리고 이주한의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과 그전에 읽었던 조선시대 관련 역사책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일본 학자 아무개가 뭐라고 했다는 주장 정도였다. 그래서 이 리뷰에는 『조선시대 당쟁사』 중 특기할만한 주제이자 식민사관의 정착 과정까지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는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 소개한 한국학자들과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학자들의 견해를 흩어볼 생각이다. 본문에는 이외에도 흥미로운 자료들이 많이 있으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우선 일제학자들의 견해부터 간략하게 살펴보자. 다음은 조선시대 당쟁을 처음 정리한 일본인 학자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의 견해이다(이하 인용문들은 『조선시대 당쟁사』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한국의 정치는 사권(私權)의 쟁탈에서 유래한다. 정가(政家)는 한 번 정국을 담당해 일을 행하려 하면 여러 의론이 백 가지로 나오고 유언(流言)이 떠들썩하게 퍼지며, 음모를 꾸미면 암살을 꾀하고 한 번 집권하면 정적을 일망타진하는 참화를 불사한다. 대신(大臣)의 교체가 주마등(走馬燈)과 같으니 국정의 개혁을 기할 수 없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 이조 500년의 현상순치(現狀酬致)의 주원인 중 하나가 정쟁인 만큼 이에 관해 누군가는 그 연원을 천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반도의 정치와 역사에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일고(一顧)를 얻으면, 내 바람은 그것으로 족하다. …… 조선인의 오늘날 작태를 이해하려면,그 원인을 과거의 역사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 역사적 사실의 근원으로 고질적인 것은 당쟁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 대저 당쟁의 원인을 밝히는 것은 정쟁의 문제를 해결하든 데 가장 편리하고,또 국정(國情)의 심사(審査)에 가장 유익하다. (『韓國政爭志』(한국정쟁지) 敍言,1907)
시데하라는 당쟁의 기원을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로 올려잡고, 그때의 사화를 유파(儒派)와 비유파의 대립으로 보았다. 그리고 동인 서인, 노론 소론의 갈림을 김효원과 심의겸, 송시열과 윤증의 개인 간 감정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당쟁이 한국인의 심성에서부터 생긴 것이라고 보기 위해서다.
가와이 히로다미(河合弘民)는 당쟁의 원인을 경제생활의 곤란, 사회 제도의 문란에서 생겼다고 주장했다. 가와이에 의하면, 조선은 자족(自足) 경제를 벗어나지 못해 생활필수품을 각자의 손으로 생산하여야 하였고 교환의 방법도 발달하지 못했다. 양반들조차 생활난을 극복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한집안에 40~50인의 대가족이 모여 살았고,그들을 부양하는 것이 문장(門長)의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활난을 극복하기 위해 양반들은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해야만 했다. 그들에게는 충군애국(忠君愛國)과 같은 관념은 희박했고, 오직 사우(師友) 관계와 자기 집안의 이익만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와이는 조선 후기 당쟁의 원인은 유파나 예론 혹은 개인감정 때문이 아니라 경제생활의 곤란과 사회 제도의 문란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한 마디로 조선 문화의 낮은 수준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나가노 토라타로(長野虎太郎)와 호소이 하지메(細井肇)가 편저한 『붕당사화의 검톤』에서 인용한 것이다.
조선에 있어서 정권은 곧 생활이다. 정권을 잡지 못하면 생활을 확보하지 못한다. 권력을 잃는 것은 곧 굶어 죽는 것이다. 아사(餓死) 앞에서는 이(理)도 비(非)도 없고,의리도 인정도 없고, 대의도 없고,명분도 없다. 물러나서 굶어 죽느니 적당(敵黨)과 싸워서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정권을 빼앗아야 했다. 그리하여 이 싸움에 이기기 위해 집단적으로 당파를 조직해 군중심리에 책임 회피와 자기 최면으로 당쟁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들은 생활하기 위해 생활을 불안의 정점에 두는 것을 후회할 줄 몰랐다.…… 이것이 당시의 가와이 씨의 논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탁견이라고 생각해 지금도 이 의견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나는 혈액이 굳어 버린 채 흐르지 않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 사람의 혈액에 이처럼 특이한 검푸른 피가 섞여 있다는 것도 조선의 사물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시비(是非)를 함께 궁구해 둘 필요가 있다. 여하간 대 영웅도 하룻밤에 그 국민의 피부나 머리카락의 색,눈동자의 빛을 바꿀 수는 없고,수천 년 수백 년에 걸쳐 육성된 인격 또는 국격(國格)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바꾸기가 용이한 일이 아니다. (『朋黨·士禍의 檢討』 自由討究社, 1921) (붕당·사화의 검토, 자유토구사)
오직 생활을 위해 당파를 만들어 상대 당을 여지없이 몰아쳐 죽인다는 것이다.
미지나 쇼에이(三品彰英)와 시카다 히로시(四方博)의 견해이다. 당쟁이 한국의 민족성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이론은 미지나 쇼에이와 시카다 히로시에 이르러 한층 심화하였다. 미지나는 지리적 결정론이 근거를 둔 한국사의 반도적 성격론을 주장한 장본인이다. 그에 의하면, 한국은 반도로서 북쪽으로는 중국·만주,남쪽으로는 바다 건너 일본과 같은 대국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중국의 전례(典禮) 주의적·주지(主知)주의적 지배를, 만주와 몽골의 정복(征服)주의적·주의(主意)주의적 지배를, 일본의 공존(共存)주의적·주정(主情)주의적 지배를 번갈아 받아 왔다. 그러므로 한국의 역사는 타율적인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사의 타율성 때문에 한국인은 독립성이 없는 대신 의타성(依他性)·당여성(黨與性)·뇌동성(雷同性, 줏대 없이 남의 의견에 따라 움직임) 등의 민족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타율적 권위에 의존해 자기를 주장하는 정신은 독립성을 결여화하고 그곳의 사람이 서로 의존하는 당여적(黨與的) 성격이 육성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력한 권위 아래 모이고 혹은 특수한 사회 결합에 의존해 당벌(黨閥)을 결성하는 것은 조선의 국민성으로서 정치·사회 면에서도 다 같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이 당여성은 경제생활을 비롯해 제반 사회생활을 통해 금융조합 및 각종의 상호 원조조직을 발달시키고, 혹은 사회의 기본적인 결합력인 혈연관계에 의존해 씨족적 도덕을 발달시키는 등 효과적 측면도 절대 적지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 많은 폐해를 남기고 민족적 결함으로 간주하는 측면도 적지 않다. 저 이조 500년간 대부분을 점하는 붕당정쟁사, 혹은 사회생활에서 소위 일문일족에 의뢰하는 동족의뢰주의와 같은 것은 그 폐단의 대표적이다. 붕당의 다툼은 스스로 생활 의식의 대립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주자학의 원리,특히 예론에 의한바 일종의 의식적 대립인 까닭에 종합되어 진전되는 때가 없고,언제까지나 의미 없는 대립으로서 성과 없는 항쟁을 계속한다. 그 항쟁의 시간적 길이에는 세계적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실로 놀랄 만하다. 또 이 당벌성(黨閥性)이 임기적(臨機的)인 열정을 수반해 나타날 때, 그들의 민족적 특성의 하나인 뇌동성으로 되고,조선의 정치적·사회적 사건이 획기적·조직적인 것보다 오히려 저반(這般, 이와 같음)의 성격에 의해 특색 지어지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 장의 격문, 교묘한 연설이 강한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 국민이다. (『朝鮮史槪說』 弘文堂, 1940) (조선사개설, 미지나 쇼에이, 홍문당)
시카다 히로시도 “파벌성이 조선 민족의 특성”이라고 전제하고,당쟁은 주자학의 결벽성을 기계적으로 강조한 데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舊來(구래)의 조선 사회의 역사적 성격」,『朝鮮學報』2, 1951, 조선학보) 시카다의 견해는 광복 후에도 그대로 계속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시이 가즈오의 견해이다. 일제 학자 중에 유일하게 당쟁의 긍정적 측면을 거론한 인물이다.
지금까지는 당쟁을 지나치게 혹평해 그것을 이기적·물욕적 관점에서만 판단하고 의리라든가 학문이라든가 하는 것은 표면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의 근거는 대부분 당쟁이 고정되고 부패한 후대인들의 붕당관으로 거기에는 오히려 그 필자의 주관에 시대적 제약이 작용하고 있어 그 시대 당쟁의 시대적 특색이 나타나 있다고 할 것이다. 붕당 300년을 통해서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하는 관념을 부지 불식 간에 하나의 전제로 깔고,곧 그것을 붕당 원인론의 전부로 삼으며,나아가 그것으로 초기 당쟁시대를 다루려 하는 데에는 찬성할 수 없다. (「後期李朝黨爭史에 대한 一考察」,『社會經濟史學』10-7·8,1940, 후기이조당쟁사에 대한 일고찰, 사회경제사학)
조선시대를 귀족주의적 전제정치 국가사회로 본 이시이는 귀족 세력과 전제 왕권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에만 건전한 국가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는 붕당이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에서 출현했다고 보았다.
사화(士禍) 시대에는 귀족 세력이 우월했기 때문에 왕권은 쇠약해져 양자의 조화가 깨졌다. 지방 하층 귀족 세력인 이학파(理學派, 이학: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철학’을 이르는 말, 성리학)가 새로운 혁신 세력으로 신장해 간 것은 바로 이러한 혼란을 수정한 것으로 붕당은 그 결실이다. 붕당의 출현에 의해 고정·침체하였던 사회의 신진대사가 활발해지고,귀족 간에는 대립적인 여러 세력이 형성되어 서로 각축하였다. 여기서 저절로 일종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져서 귀족 세력과 전제 왕권은 다시 모습을 바꾸어 이전의 조화를 되찾는 것은 아닐까? 당쟁의 출현은 대외적으로 국력의 신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내적 측면에서 보면 확실히 역사상 봉건주의적 지배 원칙 - '민중을 분열시켜라! 그리고 지배하라!’ - 은 아니었을까? 조선 후기 300년이 드물게도 태평 시대였던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앞의 글)
그런데 그는 논문 끝에 다음과 같은 사족을 붙인다. 민중 봉기에 의한 귀족주의의 패퇴를 중세 동양적 국가로부터 민족 국가로 발전하는 과도기로 보고 “이것이 조선으로 하여금 황국 일본의 일군만민 정치(一君萬民政治)의 은택을 입을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중계 역할을 담당했던 점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광채를 발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조선 후기 이학지상주의 국가사회의 붕괴를 알리는 애처로운 전주곡이야말로 실로 신생의 환희가 넘치는 행진곡 바로 그것이었다".
이번에는 조선실학자들의 견해들을 살펴보는 시간이다.
이익(李瀷)의 견해부터 살펴보자. 이익은 관직 수는 적은데 관직을 차지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은 것에 당쟁의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이익은 이러한 폐단을 없애려면 과거를 줄이고,고과(考課)를 엄정히 하며, 좋은 관직을 아무렇게나 주지 말고,승진시키는 것을 신중히 하며,인재를 적재적소에 쓰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체제 자체를 혁파해야 한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이익 자신이 양반 체제에 속해 있는 인물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유수원(柳壽垣)의 견해다. 관직 수는 적고 관직을 바라는 사람은 많아서 당쟁이 심해졌다는 유수원의 견해는 이익의 주장과 흡사하다. 그러나 그 해결 방법으로 문벌을 타파하고 사·농·공·상의 사민(四民)이 각각 본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하여 신분제 타파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이익보다는 좀 더 진보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이중환(李重煥)의 견해다. 이중환은 이조전랑(銓郞)이 자기 후임을 추천할 수 있는 자대권(自代權)과 3품 이하의 엘리트 관료인 청요직의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는 당하통청권(堂下通淸權) 때문에 당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이조전랑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의 여론과 공론 시스템에 대해서는 본문에 자세하게 나와있다.
박제형(朴齊炯)은 서원 때문에 당쟁이 생겼다고 보았다.
이건창(李建昌)의 견해다. 이건창은 당쟁의 원인으로 도학태중(道學太重)·명의태엄(名義太嚴)·문사태번(文詞太繁)·형옥태밀(刑獄太密)·대각태준(臺閣太峻)·관직태청(官職太淸)·벌열태성(閥閱太盛)·승평태구(承平太久)의 여덟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도학태중이란 도학을 지나치게 높이다 보니 자격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도학을 핑계 삼아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려고 해서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요, 명의태엄이란 명의에 가탁해 상대방을 깔아뭉개려 하니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며,문사태번이란 남의 글을 흠잡아 상대 당을 타도하려 하니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고,형옥태밀이란 상대방을 난적(亂賊)으로 몰아 득세를 하려 하니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다. 또 대각태준이란 대간의 언론이 지나치게 준엄해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요, 벌열태성이란 문벌 가문이 패거리를 지어 관직을 독차지하려 하니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며,승평태구란 임진·병자란 이후에 200년간 밖으로 대규모의 외적이 쳐들어온 적이 없어 정신을 못 차리고 당쟁만 일삼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광복 이후 학자들의 견해들을 살펴보자.
이태진의 견해다. 그는 일제 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당쟁'이라는 용어는 한국임을 깎아내리기 위한 오염된 용어이니 써서는 안 되고, 그 대신 '붕당 정치'라는 용어를 쓰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붕당 정치라는 용어가 조선 후기 정치사를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정쟁'은 그 의미가 너무 넓다. 또한, 그는 학연성을 바탕으로 하여 공도(公道)를 실현하려는 사림계의 '붕당 정치'를 16세기 이후에 필연적으로 나타난 역사적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 외에도 김용덕, 정만조의 견해가 나온다.
이상으로 아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제 대체로 당쟁이라는 용어 자체는 어느 정도 인정되는 것 같다. 신봉승처럼 ‘정쟁’이라는 말은 예송논쟁 이후 벌어진 당쟁의 치졸하고 무자비한 싸움을 표현하기에는 그 의미가 긍정적이고, 좁은 것이 아닌가 싶다. 붕당 정치의 틀에서는 정쟁이라는 단어가 적합하겠지만, 그 틀에서 이탈하여 상호협력과 공존을 기반으로 한 붕당 정치가 무너진 당쟁의 역사에서는 정쟁이라는 말은 설 자리가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지은이는 붕당 정치를 유발한 조선의 문치주의를 무치주의에 비교하여 너무 좀 크게 띄운다는 느낌이다. 꼭 이럴 때 비교되는 나라가 일본이다. 그런데 일본이 아시아에서 일찍 근대화에 성공하고 힘을 키울 수 있던 것도 무치주의의 영향력이 컸다. 조일전쟁(임진왜란) 후 조선의 유교가 포로로 잡혀간 강항, 이진영 등에 의해 일본에 전파되었지만, 현명하게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유교를 새로운 막부를 창건하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도덕적 지렛대나 엘리트층이 익혀야 할 교양이나 학문으로만 사용했지, 조선처럼 맹신적으로 유교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무사들에 의한 메이지 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다. 조선은 두 번의 큰 전쟁을 겪고도 정신을 못 차렸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조일전쟁 같은 큰 불행을 겪었다면 정신을 좀 차릴 만도 했다. 여기에 문치주의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무치주외와 문치주의를 비교해서 어느 것을 우위에 둘 수는 없다. 어느 한 쪽을 우위에 두려고 하다 보면 결국 두 주장 간에 다툼만 유발할 뿐이다. 힘에만 의지하다 보면 백성의 생활이 낙후되고 잦은 전쟁으로 고달플 것이다. 반대로 붓만 가지고 다스리려고 하면 외부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양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균형이다. 하지만, 여운형 선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 역사에서 중도주의는 기회주의로 몰려 비난받고 매장되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 ‘완벽’이란 단어의 그 존재 자체가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증거이다. 중요한 건 장점과 단점을 파악할 줄 아는 지혜와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통찰력, 그럼으로써 깨우친 단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이다. 이 중에서 조선시대 선비들의 가장 큰 단점을 꼽는다면 당연히 포용력의 부족이다. 특히 학식과 덕을 갖추었다는, 각 당파 간의 화해와 협력을 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명망이 있는 학자들이 독선과 독단으로 나아가 나라와 더불어 자신의 위기를 자초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송시열이다. 그들은 반대당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을뿐더러 다른 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학자로서의 기본적인 배움의 자세도 안되어 있었다.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의 저자 이주한의 말을 빌리면 즉, 학문(배울 학 學, 물은 문 問)의 기초도 몰랐던 것이다. 배우고 물어서 발전해 가는 것이 학문의 기본인데, 주자를 의심하면 사문난적으로 몰아 배척했으니 이는 중세 마녀사냥의 다름없으며, 배움이 교조적인 믿음으로 변질하여 종파를 이룬 것이다.
한편, 본문에 일본 학자들은 조선인의 단결력 부족을 조선시대 때 시행된 과거 시험으로 관리를 뽑았던 조선시대의 능력주의 때문이라고 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본 학자들은 이 능력주의는 계승해야 할 정신적 자산이라 했는데, 양반 사대부들을 위한, 즉 소수 권력층을 위한 능력주의가 과연 진정한 능력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능력주의는 최소한 모두에게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었을 때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 다수인 백성이 보기에는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능력주의의 표방이라기보다는 자기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다름없었다. 능력주의는 지나치다 보면 엘리트주의를 낳고 엘리트주의는 소외를 불러온다. 이런 사회는 서로 대함에 있어 배려와 협력을 구하기보다는 상대를 밝고 올라가야 할 계단이자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혹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선택적이고 일시적으로 협력하고 필요 없어지면 떨어내 버리는 정떨어지는 사회가 될 위험이 있다. 아마도 지금 그렇게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 하이델베르크인을 물리치고 지구의 주류 생명체로 진화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협력이었다. 곧 인류의 역사는 협력의 역사였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양반들에게서 배울 점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전문 정치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오로지 관직을 위해 매진해왔고, 또 그것밖에는 가질 직업이 없었다. 그리고 조정의 주요 관직에 등용되려면 학문뿐만 아니라 도덕적 수양도 필요했다. 지금처럼 돈, 줄 서기, 번지르르한 말로 정치에 뛰어드는 인물들과는 수준부터가 달랐다. 우리가 양반을 명분과 의리만 내세운다며 비난하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신이 죄가 있건 없건 일단 탄핵을 받으면 관직에서 물러날 줄 아는 염치가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비리를 저지르고 부패를 일삼고 선거 공약이나 자신의 주장을 박쥐처럼 줏대 없이 번복해도 어찌 된 것이 고개는 더 뻣뻣해진다. 이젠 그 의리조차 찾아볼 수 없고, 명분은 곧 눈앞의 실리일 뿐이다. 그 실리를 좇아 중상모략을 일삼고 배신과 음모가 판을 치는 사회가 21세기 정치인의 기본자세다. 조선의 붕당 정치가 당쟁으로 변질하면서 나라를 좀먹고 결국 망국으로 이어졌듯이 지금의 정치도 안정을 찾지 못하면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파국을 가져올지 모른다. 정치는 널리 다스리고 어루만져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단으로 권력을 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렸다. 요즘의 정치인들은 과연 정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지은이 이성무는 명성황후를 민비라고 시종일관 깎아내리고 있다. 나라인포테크의 우리말 사전에서는 “'민비'는 일제 강점기에 '명성황후'를 낮추어 부르던 명칭입니다. (2009.6.11)”라고 표기된다. 책을 잘 보다가 ‘민비’라는 단어를 보고 책을 던져 버리고 싶은 ‘욱’하는 뭔가가 가슴 밑바닥에서 솟았지만, 내 책이 아닌 시민의 재산임을 내 머리보다 먼저 눈치챈 존경스러운 나의 손과 사랑스러운 팔에 의해 책이 파손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사 당한 장옥정도 희빈 장 씨라는 어엿한 호칭이 있는데, 억울하게 외국인에게 암살당한 황후에 대한 지은이의 호칭을 보면서 역사학자로서 가져야 할 객관성이 빠진 것 같아 아쉬웠다. 출판은 여러 검증을 거치는 걸로 알기에 ‘민비’라는 호칭은 무의식적이라기보다는 지은이의 의도된 표기일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당쟁사』는 읽어볼 만한 역사책인데, 이것은 옥에 티라고 해도 너무 치명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내가 뭔가 잘못 아는 거라면 꼭 누구라도 좋으니 지적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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