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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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민중의 해학

추천하는 책

구덩이 |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민중의 해학

이 작품의 작가가 구사하는 언어는 독특했다. 그리고 난해했다. 인물들이 사건을 구성하고 작품의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것 정도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는 있었지만, 거기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옮긴이 해설을 보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후기는 왠지 횡설수설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뭐 지금까지의 모든 후기가 나만의 쓸쓸한 횡설수설임에는 부정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냥 뭔가를 읽었으니, 뭔가를 써야겠다는 어느 한 인간이 가진 건전한 욕망의 분출이라 봐주면 다행이다.

손을 잡으라고까지는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겠다. 싫더라도 인내심을 발휘해 나와 함께 안드레이 플라토노비치 플라토노프의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보자. ‘구덩이’라고 하니까 왠지 못 갈 곳을 억지로 끌고 가는 것 같긴 하지만, 이 작품은 구소련 스탈린시대의 실상을 꾸밈없이 작가가 본 그대로 독자에게 보여준, 보기 드문 소재의 작품이니 인내의 가치가 충분히 있을 것이라 약속한다.

Котлован(The Foundation Pit) by Андрей Платонов

첫뚜렷한 주인공 없는 이 작품은 여러 인물이 등장하여 서로 만나 섞이고 부딪치면서, 희망이 솔솔 솟아나는 듯하면서도 쉽게 깨지는 구소련 민중의 삶을 담고 있다. 잉고 슐체의 『심플 스토리』처럼 특정한 주인공이 아닌 동네 주민이 작품 전체를 이끌어 가듯 『구덩이』에서도 몇몇 인물들을 중심으로 사건이 발생하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이야기의 시작은 노동 중 사색에 빠지는 이유로 기계 공장에서 해고된 보셰프에서부터 시작된다.

보셰프는 방황하며 거리를 떠돌아다니다 변두리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를 듣고는 "개도 지쳤구나, 단지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거야, 나처럼." 라고 혼잣말하는가 하면, 마른 잎을 주워 자루에 담으며, ‘넌 인생의 의미를 갖지 못했구나.’, ‘여기서 쉬어라, 네가 왜 살고 죽었는지 내가 알아낼 테니. 넌 아무에게도 필요하지 않고 온 세상 안에서 혼자 시들고 있으니, 내가 너를 간직 하고 기억해 주마.' 등 이 세상에 버려진 모든 사물에 빈약한 동정심을 느꼈다.

이런 보셰프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세상에서 살며 고생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그는 삶의 의미를 찾아 고민하고, 헤매다가 도착하는 곳이 노동자들을 위한 집을 짓는 건설 현장의 ‘구덩이’이다. 보셰프는 이렇게 노동자들 무리에 합세하여 노동자들과 같이 ‘구덩이’를 파게 된다. 그리고 이 노동자들의 우두머리 격인 굴착기 기사 치클린이 등장한다. 치클린은 젊었을 때는 그의 우람한 육체적 매력 덕분에 뭇 여자들의 가슴속에 사랑의 불씨를 지피고 그들 모두에게 안식처를 제공해 주려다 그녀들의 질투 때문에 상처를 받았었고, 결국 행패를 부리다 감옥까지 간 과격한 성정이 숨겨져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나중에 엄마를 잃은 소녀 나스탸의 안락한 잠자리를 위해 아빠처럼 자신의 배를 제공해 주기도 하고, 죽은 소녀의 엄마에게는 애도의 입맞춤을, 살해당한 동료의 차가운 손을 잡아주는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이런 치클린에 의해 이야기가 ‘구덩이’를 파는 현장인 노동자 막사에서 ‘조직의 뜰’, ‘조직의 집’이 있는 집단농장으로 이동되는데, 치클린은 집단농장 건설 현장에서 대장장이 곰과 함께 부농들의 집을 습격하는데 앞장서고, 당의 지령에 의해 축출당한 집단농장 책임자인 활동가를 한 방에 죽이게 되면서 과거의 험한 성정을 다시 보여준다.

보셰프가 ‘구덩이’ 현장에서 만난 또 다른 노동자들로는 사프로노프와 코즐로프가 있다.

사프로노프는 삶의 아름다움과 교양 있는 지성을 사랑하면서, 사회주의가 곧 과학이라고 믿는 인물이니만큼 그는 무가치와 무지를 배척했다. 그리고 야윈 보셰프보다 더 허약한 코즐로프는 그 자신이 터득한 지혜와 식견, 배경 지식으로 여러 정부•공공 기관의 종업원들을 겁주는 방식으로 만족과 이익을 얻는 비열한 기회주의자이다. 그는 건축기사 프루솁스키가 노동자들 틈 속에 섞여 있는 모습을 불평할 정도로 확고한 계급주의자이기도 하다.

여기에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고등교육을 받은 건축기사 프루솁스키가 있다. 그는 긍정적인 사회주의 인물상인 치클린의 반대편에 서 있는 나약한 지식인이다. 그는 나이 스물다섯에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자신이 이 세상에 필요한 인물인지 의심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한 인간적인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비록 시체지만 치클린이 프루솁스키가 잊지 못하는 여자 앞에 데려다 준 장면을 보면 건축기사는 따뜻한 인간적인 마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러 가지 죽은 사물이 그녀를 지켜 주게 내버려 두세요. 죽은 것도 결국 살아 있는 생물만큼 많으니 그들끼리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치클린은 벽의 벽돌을 쓰다듬고, 알지 못할 오래된 물건들을 몇 가지 집어서 죽은 여인 곁에 놓았고, 두 남자는 밖으로 나왔다. 여인은 그곳에 누워 그녀가 죽었던 그 영원불변의 나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가, 치클린은 되돌아가서 부서진 벽돌 조각과 오래된 돌과 다른 무거운 물건들로 죽은 여인에게 통하는 문을 막았다. 프루솁스키는 그를 돕지 않았고 나중에 물었다.
“왜 힘을 낭비합니까?”
“왜라니 무슨 뜻입니까?” 치클린은 놀랐다. “죽은 사람도 사람이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요,”
“그녀는 필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난 그녀가 필요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뭔가 아껴 두고 싶어요. 죽은 사람의 슬픔이나 그들의 유골을 볼 때면, 언제나 이런 느낌이 들어요. 나는 왜 살까!" (『구덩이』 중에서)

치클린의 인간적인 모습이 돋보이면서 그 누구보다 지식을 많이 배웠지만, 아직도 따뜻한 인간이 되지 못한 건축기사의 모습은 가정교육 부족과 과다한 경쟁, 대학 입시로 진정한 교육의 방향을 상실한 학교로 말미암아 인간적인 배려가 부족해진 어린이와 학생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남 얘기 같지가 않다. 작가 자신도 공과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었지만, 지식인으로서 살면서 겪어야 했던 탄압과 억압 때문에, 프루솁스키를 통해 작가가 경험했던 허무한 지식인의 삶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이러한 치클린의 인간적인 배려는 그를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을 동정할 줄 모르는 기사는 죽기로 마음먹고 하나뿐인 가족인 누이동생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다짐도 하지만, 결국 그는 죽지도 못하고 동생에게 편지도 못 보내는, 나약하고 나태한 인물로 비추어진다. 오히려 그는 사회적 지위상 자신의 아래인 치클린에게 보호를 받게 된다.

여기에 치클린의 오랜 동료로서 제국주의 때문에 불구가 됐다고 생각하는 자체프를 빼놓을 수 없다.

자체프는 툭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때리고 넘어뜨리는 폭력적 묘사로 적지 않은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그만의 원칙으로 사회주의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다. 또한, 치클린처럼 소녀 나스탸에게는 꼼짝 못하는 부드러운 인간적인 면도 있다. 자체프는 특히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삥을 뜯으며 사는데, 그의 주 목표가 지역 노동조합 자문 위원회 회장 파시킨이다. 파시킨은 전형적인 부패 관료이다. 그렇다고 악한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자체프에게 대책 없이 뜯기기 때문이다. 또한, 마누라에게 잡혀 사는 파시킨은 소심하고 나약한 관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보통 부패관료를 만날 때면 으레 솟아오르는 분노와 불만은 파시킨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무기력하게 자체프에게 강탈당하는 모습은 우습고 불쌍하다. ‘구덩이’ 현장의 노동자 막사 쪽 책임자가 파시킨이라면 지역 집단농장 책임자로는 활동가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잠도 자지 않고 당을 위해 개인적인 모든 기쁨과 행복을 멀리하면서까지 온 힘을 기울이는, 출세에만 눈이 먼 관료이다. 그는 부농들을 뗏목에 태워 바다로 보내는 등 과잉 활동, 과잉 달성, 과잉 열성 탓에 당 지령에 의해 지도자의 위치에서 제거된다. 그리고 치클린에 의해 맞아 죽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모든 노동자의 중심에 소녀 나스탸가 있다. 소녀는 옛 타일 공장에서 부르주아였던 엄마의 죽음을 목격하고는 치클린에 의해 노동자 막사로 오게 된다. 막사의 노동자들은 소녀를 건설 중인 인민들을 위한 집에 거주할 실체로서 떠받든다. 그러나 소녀는 "전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부르주아일까 봐 두려웠거든요.", "그럼 왜 관이 필요해요? 부르주아들만 죽어야 하잖아요, 가난한 사람들은 아니고요!” 등 당의 과격한 선전 구호를 남발하는 등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설 속 깜찍한 소녀의 이미지는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돌봐주는 아저씨들에게는 어리광도 부리고 투정을 부리는 등 나스탸는 그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생각하기보다는 먼저 따라 하고 보는 아직 철들지 않은 보통 소녀일 뿐이다.

이 작품엔 사람만이 아니라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을 연상시키지만 조금은 다른, 반(半)인격화된 동물이 등장한다. 바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상징인 곰 미하일이다. 곰은 노동자들을 이끄는 지도자 치클린과 함께 부농 탐지곰으로 활약한다. 곰은 부농들 앞에서 과거의 그들에게 받았던 고통을 떠올리며 부르짖는 ‘으르렁’거리는 부농 발견신호로 탐지곰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낸다. 하지만, 등장하는 모든 노동자가 그러하듯, 소녀 나스탸 앞에서는 한쪽 눈도 찡긋해 보이고, 부농들 때문에 겨울에도 없어지지 않고 날아다닌다는 파리를 소녀에게 잡아주기 위해 길거리를 뛰어다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곰에게서조차 소녀는 노동자들의 희망이라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처럼 이 작품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극히 인간적이기에 보통 소설의 주요 이야기가 되기도 하는 선과 악의 대립은 없다. 누구나 착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보셰프나 건축기사처럼 끊임없이 고민하고 행동하는 사실적인 등장인물의 모습은 염상섭의 『무화과』에 등장하는 김홍근처럼 독특한 개성 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내가 보기엔 마이클 코넬리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형사 해리 보슈처럼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진다. 고민하며 절망에 빠지다가도 다시 희망을 발견해 희미한 미소와 함께 행복을 꿈꾸는, 아니면 자신만의 일을 발견하고 그 순간만은 모든 고민을 잊고 일에 몰두하는, 이렇게 살아가는 마냥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언제나 착한 사람도 아닌, 악마와 천사를 동시에 가진 지극히 인간다운 인간을 이 작품에서 독자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평범한 인물들을 통해 작품은 당대 구소련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비판한다. 서구를 따라잡으려는 스탈린의 무리한 욕심으로 영문도 모른 채 국가정책에 휩쓸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농민들의 고통과 슬픔을 작가가 그 시기에 직접 본 그대로 생생하게 이 작품에 담아 놨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 작품에서 보여준 스탈린 시대의 민중의 삶은 공포 그 자체다.

의무적으로 음식을 섭취하며 즐기지는 않는 일꾼들, 미리 자신들의 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눕는 연습까지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유 재산이 있는 농민들, 노동자들의 대표 치클린에게 한 방 먹고도 치클린에게 자신이 순종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줄까 봐 겁이 나서 쓰러지지도 못하는 교회의 신부, 빈농들이 아무 죄책감 없이 부농의 집들을 습격하고 약탈하는 모습, 그렇게 당하는 부농들은 한 개라도 덜 빼앗기려고 자신의 가축을 먹거나 죽이는 모습, 마지막으로 스탈린이 민중에게 선사해 준 공포 정치의 압권은 활동가 계획에 의해 부농들을 뗏목에 태워 바다로 보내기 전에 부농들이 가족과 이웃들에게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다.

“용서할 게 없소, 니카노르 페트로비치. 나도 용서해 주시오.”
모두 줄지어 선 사람들 전체에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고, 이제까지 낯설었던 몸을 껴안았으며,모든 입술은 슬프고도 정답게 모든 다른 입술들에 입을 맞추었다.
“안녕히 가세요, 다리야 아줌마. 제가 아줌마네 곡식 창고를 불태워 버린 거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하느님이 용서하실 거다, 알료샤. 이제 그 창고는 어차피 내 것도 아니란다.”
그때까지 그들은 서로 기억하지도 않고 동정하지도 않으며 살아왔으므로, 많은 애처로운 입술들이 서로 이런 감정을 느끼며 그들의 새로운 친척을 영원토록 기억하기 위해 서 있었다.
“자, 이제 형제가 됩시다, 스테판.”
“잘 가시오,예고르. 우린 서로 적대하며 살았지만 떳떳한 마음으로 헤어지는구려.”
입맞춤이 끝나고, 사람들은 모두에게 몸을 낮게 숙여 서로 절을 했고, 자유롭고 텅 빈 마음으로 일어섰다. (『구덩이』 중에서)

이들은 마음껏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그렇게 뗏목을 타고 강물 위에서 남은 농민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그러나 작가는 이렇게 사회주의의 부조리한 모습을 고통과 슬픔으로만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씁쓸한 웃음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자체프가 프루솁스키에게 질문을 던졌다. “프루솁스키 동무! 더 발달한 과학을 성취하면 썩어 버린 사람들을 부활시킬 수 있을까요,없을까요?”
“없을 거요.”
프루솁스키가 말했다.
“거짓말. " 자체프가 눈을 뜨지 않고 꾸짖듯이 말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레닌이 멀쩡한 몸으로 모스크바에 누워 있겠어?……." (『구덩이』 중에서)

보셰프와 치클린이 집단농장 변두리에 있는 ‘조직의 뜰’ 근처를 돌아보다 사회화된 말들을 발견했다.

말들은 고른 발걸음으로, 머리를 낮추어 땅에서 자라는 음식을 뜯어 먹지 않고, 단결된 집단을 이루어 거리를 지나 물이 있는 산골짜기로 내려갔다. 정상적인 양의 물을 마시고 나서 말들은 청결을 위하여 물속에 들어가 한동안 서 있다가 물가의 마른 땅으로 올라가 대열과 단결성을 흩뜨리지 않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 번째 집에서 말들은 흩어졌다. 한 마리는 초가지붕 앞에 멈추어 서서 지푸라기를 물어뜯기 시작했고, 또 한 마리는 고개를 숙이고 빈약한 건초 찌꺼기를 입 안에 그러모으기 시작했으며, 더 불량한 말들은 농장으로 들어가 오래되고 친숙한 장소에서 곡물 다발을 물어다가 거리로 내갔다.

동물들은 각자 능력에 맞게 자기 몫의 식량을 집어 들고 모든 말이 전에 나왔던 문쪽으로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처음에 나왔던 말들은 공용 출입구에서 나머지 마집단(馬集團)을 기다렸고,모두 함께 모여서자 앞에 있는 말이 머리로 문을 밀어 열고, 대열 전체가 식량과 함께 뜰로 들어갔다. 말들은 뜰에서 주둥이를 열었고, 건초는 가운데에 한 무더기로 떨어졌으며, 그러자 사회화된 가축들은 건초더미 주위에 모여들어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람의 보살핌 없이도 조직적으로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보셰프와 치클린이 사회화된 말들을 발견하고 그 뜰 너머에 있는 낡은 오두막을 찾아 들어갔다.

말을 조직에 빼앗기고 누워서 멈춰 버린 남편과 우는 그의 아내. 또 한 집에는 관 속에 누워 반쯤 죽은 채로 있었다. 농부는 스스로 죽어가고 있었고, 죽음의 슬픔 탓인 소리를 질렀다.
“죽은 사람은 소리를 내지 않소.”
보셰프가 농부에게 말했다.
“내지 않겠소.”
남자는 동의하고는 정부 시책을 따랐다는 사실에 행복해 하며 누워서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구덩이』 중에서)

해학도 보통의 해학이 아닌 사회주의적 해학이었다.

플라토노프가 보는 현실은 같은 구소련 작가인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창시자 고리키의 소설과는 바라보는 관점이 사뭇 다르다. 고리키가 프롤레타리아를 보는 시선에는 사회주의 사회의 인정과 긍정을 바탕으로 한 노동자들에 대한 각각의 개인적 삶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담겨 있다. 반면에 플라토노프는 이 작품에서 사회주의가 만들어낸,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갈증과 의문에 지쳐가는 민중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차분하게 분노 없이 바라보고 있다. 고리키의 작품에는 민중 개개인의 개인적인 고민은 있지만, 그 민중 전체가 함께 고민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작품에서는 각자 나름의 고민거리를 가진 개인이 모여, 집 없는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건설에 동참하여 함께 구덩이를 판다. 이때부터 그들은 이 구덩이가 그들의 이상과 미래, 희망, 곧 그들의 존재와 삶의 이유가 된다. 거기에 엄마를 잃은 소녀 나스탸가 이들의 무리에 동참하여 그들의 마음은 더욱 부풀어 오른다. 집 없는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집을 짓기는 하지만, 과연 거기에 누가 살지는 그들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때 소녀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남으로써 그들이 완성할 미래의 집에서 살아가면서 사회주의 이상을 완성할 실체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 희망의 구덩이에 아이러니하게 소녀의 시체를 묻어버림으로써 그들의 이상과 희망은 무너진다. 그것은 곧 사회주의의 종말과 다름없다.

두 작가 다 같은 사회주의에서 살아가는 노동자, 농민들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렇게 서로의 시점은 정반대이고, 작품의 분위기도 사뭇 다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고리끼는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었고, 플라토노프는 공과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토지 개발 기술자로 일했던 지식인 출신이라는, 시대가 만들어 낸 불협화음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Котлован(The Foundation Pit) by Андрей Платонов

이렇게 이 작품에는 1920년대 말 구소련 스탈린 독재 시대에 독단적인 경제정책의 여파로 고달프고 처참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민중들의 삶을 여과 없이 작가가 보고 느낀 그대로 담겨 있다. 내가 『알라무트』에서 인간이 오만을 넘어 신이 되고자 할 때 생겨나는 그 파장은 주변에 엄청난 불행과 고통을 준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치클린이 부농들을 근절하는 과정에서 한 부농이 그에게 소리치는 말로 끝을 맺으려 한다.

“근절했다고?” 그는 외친다. “오늘은 내가 사라지지만, 내일은 당신이 끝장날 거 요. 그리고 결국은 당신들 우두머리 한 사람만 살아서 사회주의를 맞이하게 될 거요!” (『구덩이』 중에서)

이것은 몇 년 후에 '당신들의 우두머리’인 스탈린이 실제로 자행한 대숙청을 무서울 만큼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다. 내가 예전에도 누누이 말했지만, 좋은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미래를 예견한다. 그의 예견은 적중했다. 다름 아닌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당신들의 우무머리’가 된 것이다.

참고로, 이 후기를 작성하는 데에는 옮긴이의 해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물론 다른 작품의 후기를 작성할 때도 작품 맨 뒤에 있는 해설을 참고할 수밖에 없지만, 이번처럼 난해한 작품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의 내공으로는 작품을 이해하는데 더더욱 해설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시기의 러시아 문학으로 고리키의 작품과 솔제니친의 『암병동』, 『수용소군도』, 그리고 러시아 내전을 다룬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디스토피아 문학으로는 조지 오웰은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추천한다. 우리나라의 그 시기의 작품으로 이기영의 『고향』을 추천한다.

“근절했다고?” 그는 외친다. “오늘은 내가 사라지지만, 내일은 당신이 끝장날 거 요. 그리고 결국은 당신들 우두머리 한 사람만 살아서 사회주의를 맞이하게 될 거요!” (『구덩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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