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린 여자 | 홍잉 | 낭만화될 수 없는 괴물, 가난
기아는 나의 태교였다. 우리 모녀가 살아오는 동안 기아는 나의 뇌리에 선명한 낙인을 남겼다. (『굶주린 여자』, 66쪽)
난 큰 의미는 없고 그저 재미로 중국 출신 작가를 크게 국외 거주 작가, 국내 거주 작가 두 부류로 분류한다. 분류의 기준점은 체제에 대한 작가의 태도다.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한 논리적 비약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책을 통해 만난 중국 작가 중 반체제적이고 폭로적인 수위가 높은 작가 중 상당수가 국외에 거주하고, 체제에 순응하거나 옹호적이며 중국 정부나 공산당이 받아들일 만한 선에서 비판하는 작가는 국내에 거주한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릴 것이고 또한 내가 접해본 몇 안 되는 중국 작가들에 한정된 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공산당의 집단영도 체제만이 중국의 번영을 이끌 수 있다는 고집스러운 신념으로 언론의 완전한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중국에서는 전혀 황당한 논리는 아니다.
홍잉(虹影)은 10여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굶주린 여자(飢餓的女兒)>는 100% 자전적인 나 자신의 체험이자 내 연배 중국 여성들의 삶의 역정을 대표해서 그린 작품이기도 하다. 삶이 비록 힘들지라도 끝내는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으며, 나아가 시대의 흐름과 역사의 진행도 바꿀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민의 삶을 향상시키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라고 『굶주린 여자』를 설명했다. 자신이 비록 영국 국적을 가졌지만, 여전히 중국어로 생각하고 중국어로 말하는 중국인이며 중국 인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변함없다는 것을 밝히는 은연중에 중국의 민주화 바람을 드러낸 것이다.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대학까지 마쳤음에도 영국 국적을 획득한 홍잉은 여전히 중국인이며 여전히 중국 인민을 사랑한다. 그럼에도, 그녀가 영국에 거주하는 것은 개인적인 이유가 더 많겠지만, 앞서 설명한 나의 중국 출신 작가 분류 기준에 따라 중국 정부와 그녀 사이에 모종의 갈등이 존재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홍잉의 『굶주린 여자(飢餓的女兒)』는 주인공 류류가 열여덟 살 생일을 계기로 자신의 출생 비밀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한 가족사를 통해 공산당 간부들의 사회주의 건설을 빙자한 횡포가 어떻게 인민의 육체를 짓밟고 인성을 말살했는지를 폭로하는,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이다. 정확한 아사자 수를 집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최악의 재난이었던 ‘대기근’이 사실은 공산당 간부들의 아첨과 거짓된 보고로 유발된 인재였고, 아무리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아도 국가의 양곡창고는 항상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기아의 시절에도 간부가 굶어 죽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이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다. 또한, 노동자가 권력을 잡고 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나라에서 실제로 인민들은 너무나도 무력했으며, 기득권을 지닌 특권층이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유지하려 필살의 노력을 기울이며 모든 것을 독점한 채 호의호식하고 있을 때 인민은 고작 해야 공중변소에 똥구덩이가 하나 더 있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인민은 굶주림과 냉혹함으로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는 재난의 시대를 살아야 했다.
풀뿌리도 구하기 어려운 대기근에 만두소의 고기를 과연 어디서 구했을지 의심하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먹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인륜은 철저하게 무너졌고, 이들의 육체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된 노동과 가혹한 착취로 무참히 짓밟혔다. 혁명 후 30여 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기초적인 생리적 욕구도 해결하기 어려운 열악한 환경에서 인민은 굶주렸고, 이런 가혹하고 고된 환경은 그들의 생존 본능만을 곤두세울 뿐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수치심, 체면 따위는 존재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한때 유순했던 인민을 바퀴벌레처럼 징그럽고 생존력만 강한 벌레로 만들었다.
홍잉은 밥에 굶주리고 정에 굶주리고 성(姓)에 굶주린 류류의 황폐한 삶을 통해 당시 인민의 비참한 삶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그 책임에 대해 진중하게 물음으로써 인민에 대한 냉철한 애정과 지독한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진정성에도 굶주림에 말라비틀어진 창자와 푸석푸석해진 심장을 쥐어짜 내는 듯한 소름끼치면서도 우울하게 독자의 가슴 속을 메아리치는 류류의 고백은 따스한 방에 앉아 배부른 배를 두드리며 『굶주린 여자』를 읽는 사람에겐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작품이 가지는 진실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라, 문학일지라도 이처럼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겨운 가난을 목격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서리치게 우울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엮어가는 홍잉의 문장은 읽는 독자의 심정과는 다르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가난과 갖은 시련에 단련된 인민답게, 그때의 고역이 마치 영원히 그녀의 피를 차갑게 식혀버린 것처럼 냉혹하기 그지없다. 마치 딴 세상 일을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한 문장 한 문장을 이어갈 뿐이다. 때론 약간의 위트까지 곁들일 정도로 여유마저 넘친다. 홍잉은 중국의 가난한 서민의 생활은 절대로 낭만화된 괴물이 될 수 없는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일부 중국 작가들에 대한 비판이자 자신을 담금질하기 위한 채찍질일 것이다. 또한, 가난과 억압이 만성으로 굳어져 운명론에 빠져 무기력해진 중국 인민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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