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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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옹정황제(雍正王朝, 1999)

Drama Review | 옹정황제(雍正王朝,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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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옹정황제(雍正王朝, 1999)

작가 얼웨허(二月河)의 제왕삼부곡(落霞三部曲) 시리즈 중 두 번째인 『옹정황제(小說 雍正皇帝)』를 원작으로 한 TV 역사 드라마.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와 아들 건륭제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재위 기간인 13년을 황제로 있었지만, 역대 황제 중 가장 근면 성실한 모습과 절제의 미덕을 보여준 황제이다. 또한 그는 강희제가 남겨 놓은 숙제인 국고 환수 운동과 부정부패 척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섬으로써 훗날 아들(건륭제)이 맞이하게 될 극성시대(極盛時代)의 재정적 기틀을 마련한다.

옹정제는 자신이 직접 선발하고 극구 칭찬한 ‘천하제일순무’ 낙민(諾敏, 드라마에선 ‘약민’으로 호칭)이 기군죄(欺君罪)를 범하자 황제의 체통이 깎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죽음을 내림으로써 반부패 개혁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드러내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는 반부패 개혁에 있어서 만큼은 교과서 같은 존재가 되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겸 총서기가 공식 석상에서 공공연하게 밝힌 반부패 개혁의 롤모델이 왜 옹정제인지를 원작 소설뿐만 아니라 드라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만큼 중국의 부정부패가 손 쓰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좋지 않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드라마 강희왕조(康熙王朝, 2001)

‘냉면왕(冷面王)’ 옹정제

Drama Review | 옹정황제(雍正王朝, 1999)

24명의 황자와 비열하고 냉혹한 황위 다툼에서 살아남은 옹정제가 44세에 즉위했을 때 청나라의 은 보유량은 570만 량이었다. 그렇게 간당간당했던 국고가 13년 후 건륭제가 즉위할 땐 무려 4,250만 냥으로 불어나 있었다고 한다(소준섭의 『중국사 인물열전』), 드라마에선 700만 냥에서 5,000만 냥으로 증가했다고 설명).

반평생을 황자들 간의 피 말리는 암투와 죽을 때까지 형제들과의 불화에 시달렸기 때문인지, 혹은 늦은 즉위와 얼마 남지 않은 재위에 압박감을 느껴서인지 그는 의심 많고 고집스러운 독재자 같은 성정을 종종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가 남긴 업적을 보면 그런 집요한 성정이 반부패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강력한 의지력으로 전환된 것은 아닐까 싶다.

중국 관리들의 탐관오리 근성이 얼마나 끈덕지고 집요한가 하면, 아버지의 반부패 개혁이 너무 과했다고 생각한 건륭제는 즉위하자마자 관대한 정치를 표방하는데, 소설 『건륭황제』 8권에서 건륭제는 강남성 전체 부현 관리 중에 소행이 바르고 청렴한 관리가 십분의 일에도 못 미친다는 유통훈(劉統勳)의 보고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한마디로 탐관오리는 중국의 특산품 같은 고질병이다.

옹정제는 반부패 및 조세 개혁을 독불장군처럼 밀어붙였다는 이유로 관리와 유신, 지주 등 지배 계급으로부터 온갖 원망 • 불평의 소리를 들어야 했고 이 때문에 옹정제는 죽는 그날까지 외로운 황제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청나라 백성은 어느 황제 치하 때보다 살기 좋은 극성시대(極盛時代)을 맞이하게 된다.

‘팔현왕(八賢王)’ 윤사(胤禩)

Drama Review | 옹정황제(雍正王朝, 1999)

강희제의 여덟째 황자이자 아홉째 윤당(胤禟), 열째 윤아(胤䄉)와 함께 팔황자당(八皇子黨)의 중심인물인 윤사는 옹정제의 반부패 • 조세 개혁 등의 이치(吏治) 쇄신 정책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옹정제 즉위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나중엔 역모까지 꾀하는 등 죽을 때까지 反옹정제 기치를 버리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소설도 그렇고 드라마도 마찬가지지만, 황제를 중심으로 고관들이 모여 어떤 의사를 진행할 때 논리정연하게 개진하는 윤사의 주장을 듣다 보면 확실히 지식과 두뇌 회전은 옹정제보다 윤사가 한 수 위다. 하지만, 윤사는 매사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관대하고 너그럽게 임하기 때문에 (그래서 여덟째 부처(八佛爺), 혹은 팔현왕이라는 별명이 생겼겠지만), 만약 그가 황제가 되었더라면 반부패 개혁 • 국고 환수 운동 같은 개혁은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윤사 말년이나 다음 황제 때쯤엔 민란으로 몸살을 앓았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가 불운한 말년을 보낸 것은 결단코 자업자득이지만, 만약 그가 황자 시절에 당파를 만들지 않고 인맥을 쌓는 데만 몰두하지 않고 주어진 임무에 소신껏 노력했더라면 강희제의 선택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그는 24명의 황자 중 나름 재능을 가진 인물임은 틀림없었으니까 말이다.

옹정제의 구원 투수, 윤상(胤祥)

Drama Review | 옹정황제(雍正王朝, 1999)

24명의 황자 중 유일하게 넷째 황자 윤진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황자가 열셋째 황자 윤상(胤祥)이다. 비록 9살이나 차이가 나지만, 둘 사이의 우정은 가없이 돈독했으며 옹정제는 자신의 부족한 점인 무예와 병법에 능통했던 윤상 덕분에 몇 번의 위기를 넘기게 된다.

원작에서 충동적이지만 의협심 강하고 정 많은 사람으로 묘사되는 윤상은 강희 47년(1708) 태자 윤잉이 폐위된 이후 10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학자들은 이 기록의 진위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으며, 만약 그가 감금되었더라도 그 기간은 채 1년이 안 되었으리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얼웨허는 왜 그를 10년 동안이나 연금시킨 것일까?

역사에 윤상이 감금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얼웨허는 윤상이 무예로 단련된 튼튼한 신체에도 불구하고 45세라는 이른 나이에 병사한 근원을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에 불의의 사고처럼 닥친 10년의 연금 생활로 설명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보통 사람도 그렇게 오랜 시간 갇혀 지내면 자연스럽게 미쳐 버릴 것이 자명한데, 성질이 불같은 윤상이 그 10년 동안 받아야 했던 스트레스는 골수에 사무쳤을 것이다.

옹정제의 양팔, 전문경(田文境)과 이위(李衛)

Drama Review | 옹정황제(雍正王朝, 1999)

옹정제의 이치 쇄신 운동은 탄정입무(攤丁入畝: 세금을 균등하게 하는 법), 화모귀공(火耗歸公: 지방세의 공용화, 즉 관리들의 수입 증대 효과), 관신일체납량(紳一體納糧: 관리와 토호들도 전원 세금을 내는 제도)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계급의 상관없이 모두에게 부역/세금의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당연한 조세제도지만, 당시로서는 관례와 상식을 깨는 엄청난 변혁이었다. 이런 청천벽력 같은 일을 특권 계층의 반발에 맞서 단호하게 밀어붙인 사람이 바로 옹정제이고, 그 선봉에서 이치 쇄신 운동의 총대를 멘 관리가 바로 전문경과 이위다.

당연히 전문경은 임기 내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탄핵 상소로 두들겨 맞다시피 했는데, 그런데도 그는 오직 옹정제의 지지 하나에 의지해 개혁 일선에서 꿋꿋하게 버틴다. 옹정제처럼 독불장군 같은 기질이 있는 그는 개혁을 인정사정없이 밀어붙이는 바람에 몇 가지 폐단을 남기기도 했지만, 방안에서 막대기를 휘둘러도 걸리적거릴 것 하나 없을 정도로 청렴했다. 한마디로 그는 옹정제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개혁의 표상 같은 인물이었다.

이위 같은 경우는 거지에서 고속 승진한 건달로 묘사되지만, 실제 이위는 비교적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 남은 이위의 성격과 공적은 얼웨허가 묘사한 이위와 매우 흡사하다. 도둑 잡는 데 탁월한 공적을 세운 것, 불의를 보면 쉽게 칼을 뽑아 든다는 것, 권력자 앞에서도 겁 없이 할 말 다 했다는 것, 그리고 관직을 돈으로 샀기 때문에 못 읽는 글자가 꽤 많았다는 것 등등 귀신도 시끄러워 비껴가는 입담 거친 귀신 아닌 귀신이 바로 이위였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융과다(隆科多)

Drama Review | 옹정황제(雍正王朝, 1999)

넷째 황자 윤진에게 대권을 승계한다는 전위 유조(遺詔)를 대신과 황자들 앞에서 당당히 낭독했던 융과다의 처참한 말로는 정치판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흥망성쇠의 덧없음을 절감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처럼 권력 투쟁의 아수라장 속으로 뛰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 같은 소심한 사람으로선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마치면서...

원작 소설이나 드라마나 겉모습은 ‘냉면왕(冷面王)’이라는 별명답게 차갑고 냉정한 태도로 일관하는 무뚝뚝한 사람으로 보여도 그 속엔 흉악한 소문과는 달리 누구보다 백성의 평안을 근심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가 옹정제였음을 묘사하고 있다. 그가 ‘폭군’, ‘독재자’ 등의 오명을 뒤집어쓴 것은 기득권자들의 특혜를 가차 없이 박탈하고,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들을 엄중하게 처벌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백성의 처지에선 이만한 황제도 없다.

아무튼, 옹정제의 13년이라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재위는 ‘개혁’이라는 단어로 압축할 수 있으며 그가 보여준 성과는 시대를 막론하고 개혁은 기득권층의 큰 반발을 어떻게 무마하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결정됨을 시사한다.

장편 소설을 드라마로 각색한 작품들이 그러하듯 이 드라마 역시 원작 소설의 수많은 줄기가 잘려 나갔고, 등장인물들의 역할도 대폭 수정되었다. 그래서 이야기의 흐름이 막연하거나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꽤 있겠지만, 강희 • 옹정 • 건륭 3대 134년에 걸친 ‘강건성세(康乾盛世)’에서 옹정제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정도는 명확하게 알 수 있을 정도의 해상력은 충분히 갖춘 작품이다. 요즘 드라마처럼 화사하고 세련된 멋은 없지만, 오직 친민(親民)과 근정(勤政)에만 몰두한 풍류 제로 황제 옹정의 진중한 정치에 새삼 빠져드는 맛도 나쁘지 않다.

끝으로 원작 소설에선 정사(情事)와 얽히고설킨 뜬금없는 죽음을 맞이했던 옹정제였지만, 드라마에선 (역사에 부합하게) ‘단약 과용 및 과로사’라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다. 5년이라는 짧은 재임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출퇴근 시간 및 휴일을 칼 같이 챙기려 하고 평소 좋아하던 술도 끊지 못하는 무사태평한 대통령이 있는가 하면, 13년을 한결같이 금주와 소식(所食), 부족한 수면 등 철저한 자기 관리와 절제로 사직을 걱정했던 근면한 황제가 있었다. 청나라가 잠시나마 흥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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