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7

나 제왕의 생애 | 쑤퉁

나 제왕의 생애 | 쑤퉁 | 줄을 탄다, 앞으로 두 걸음, 뒤로 세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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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타기 인생

외줄을 탄다. 앞으로 두 걸음, 뒤로 세 걸음. 지나가던 사람들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멀지 않은 하늘 위에서 벌어지는 놀랍고 신기한 광경에 입이 딱 벌어진다. 그 벌어진 입속에서 간간이 희미한 탄성이 실개울처럼 흘러나오고 크고 작은 술렁임이 여진처럼 일어난다.

하늘을 탄다. 앞으로 두둥실, 뒤로 두둥실. 사람들은 땅도 놀라자빠지고 하늘도 경탄할 만한 절기 앞에서 숨이 막힌다. 순간 침묵이 급살처럼 세상을 지배하고, 누군가의 벌어진 입에서 떨어진 침방울이 지면을 박차는 소리에 지나가던 개미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바람을 탄다. 위로 훌쩍, 아래로 출렁. 아뿔싸! 어느 처자의 잘 익은 복숭아 두 개를 이어 붙인 것처럼 탐스러운 가슴에 한눈을 파는 순간 발을 헛디디었구나. 하늘이 멀어지고 땅이 쏜살같이 달려온다.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아련한 통증이 밀려온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마치 끙끙 앓는 아픈 개라도 마주친 듯 불편하고 불쾌한 표정을 완연히 숨기지 못한 채 볼 장 다 봤다는 듯 뿔뿔이 흩어진다.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발걸음을 가속한다. 그들은 오늘 저녁에 무얼 먹을지를 해결 못 하면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심각하게 궁리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모두 외줄을 탄다. 앞으로 두 걸음, 뒤로 세 걸음. 지금 당장 곤두박질쳐도 하나도 이상한 것 없는 아찔한 인생.

줄타기 인생

앞으로 두 걸음, 뒤로 세 걸음

외줄을 타본 적은 없지만, 외나무다리를 건넌 적은 있다. 그 외나무다리를 건널 땐 자신도 모르게 육체와 정신을 오직 다리를 건너는 일에만 집중하게 된다. 한눈을 팔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눈을 팔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가 누군가의 괴팍한 음모로 팔자에 없던 제왕이 된 순간 외줄을 타게 된 건지도 모른다. 앞으로 두 걸음, 뒤로 세 걸음. 왕관을 쓴 것은 그였지만, 그의 실권 없는 거짓 제왕의 삶은 호시탐탐 찬탈을 노리는 형제들과 왕족들에 의해 위태로운 줄타기 인생으로 고착된다. 앞으로 두 걸음, 뒤로 세 걸음. 그가 저잣거리에서 구경한 한 광대의 줄타기를 넋 놓은 채 보고 나서 제왕의 삶과 줄타기 광대의 삶을 두고 곰곰이 저울질하고 있을 때 그의 타고난 예민함은 무의식 속에서 그의 숙명을 눈치챈다. 앞으로 두 걸음, 뒤로 세 걸음. 그가 제왕의 줄에서 떨어지고, 평민의 줄에서도 떨어지고, 마침내 광대의 줄에 안착했을 때, 그래서 이제야 새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만족했을 때, 그는 외줄에서 또다시 추락한다. 앞으로 두 걸음, 뒤로 세 걸음.

우리는 몇 번을 추락하고 또 추락해야 인생의 고된 여행은 끝이 없다는 것을 깨우치게 될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세 걸음.

황제의 웃음

남가일몽(南柯一夢) 일장춘몽(一場春夢)

도서관 출입 초반엔 난생처음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지적 호기심과 방구석 폐인 위치에서 벗어나 뭐라도 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때는 초심의 순박함과 관대함이 살아있었다. 아마 그때 추리소설 다음으로 우연히 관심을 가지게 된 장르가 중국 문학이었고 그렇게 특별한 것 없는 사연으로 옌롄커와 더불어 쑤퉁의 책 몇 권을 읽게 되었다.

양적으로 따지면, 한국에 소개된 중국 문학 일본, 영미, 프랑스 등에 비하면 턱도 없이 적다. 마음만 먹으면 도서관에 있는 중국 문학 정도는 이미 오래전에 섭렵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초심이 오래된 고무줄처럼 탄성을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상하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름의 지식과 경험이 쌓여서 그런지 오만하게도 ‘취향’이라는 이름의 편견이 생긴다. 한마디로 나의 요구 사항이 높아진 것이다. 특히 문장력에 대해.

쌀(米)』, 『다리 위 미친 여자(紙上的美女)』, 『화씨 비가(菩萨蛮)』를 재밌게 읽었음에도, 이중 에서 ‘쌀’ 같은 경우는 원작을 각색한 중국영화의 한국어 자막까지 제작할 마음을 한때 먹었을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았음에도 쑤퉁(蘇童)의 또 다른 작품 『나, 제왕의 생애(我的帝王生涯)』을 앞에 두고는 꽤 머뭇거렸다. 그 머뭇거림이란 이 여자가 과연 돈값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가난한 난봉꾼의 머뭇거림이랄까? 나의 경우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높아질 대로 높아진 나의 눈높이를 과연 쑤퉁의 문장력이 만족시켜 줄 수 있을까 하는 시건방진 의심이 머뭇거림의 주요 원인이었지만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모든 것은 한낱 '방구석 전문가’의 쓸데없는 기우였다. 쑤퉁은 역시 ‘쑤퉁’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읽은 쑤퉁의 작품은 참으로 가혹했다. 독자의 가슴을 짓이기다 못해 분쇄기로 갈아버리려는 듯한 그의 작품엔 ‘낭만’, ‘다정’ 같은 포근한 감정은 사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어렵다. 마치 인간이란 누구나 이 세상에서 힘들고 고된 여행을 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운명을 각인시키려는 듯 비통함과 신산함과 허무함으로 독자를 질식시키는 쑤퉁의 작품은 얼떨결에 내뱉는 탄식마저 집어삼킨다. 하지만, 왜 그렇게도 재밌게 읽히는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구경거리로는 남의 운명을 들여다보는 것만 한 것이 없다’라는 사람들의 얄궂은 심리에 꼭 들어맞기 때문이다.

아무튼, 제왕 같은 삶을 살았던 거지 같은 삶을 살았던 마지막으로 두 눈이 감기는 그 찰나엔 지금껏 살아왔던 그 모든 것이 남가일몽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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