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장하(天下长河, 2022)
삼번, 조운, 하무
<(왼쪽부터) 하무, 조운, 삼번> |
강희황제가 재위 동안 크게 중점을 둔 국정 사업 세 가지가 있는데, 삼번(三藩: 삼번 평정), 조운(漕運: 운하로 식량 운반), 하무(河務: 강이나 운하 관리)가 바로 그 세 가지다. 삼번의 난, 대만 정벌, 몽골과 티베트 원정, 러시아와의 국경 문제 등 강희황제 시절 끊임없이 이어졌던 전쟁에 필요한 식량 등의 보급품을 운반하기 위해 조운, 그리고 그 조운의 기반이 되는 치수는 천하를 통일하고 태평 성세를 열기 위한 필수 과업이었다. 중국은 예부터 우왕의 치수가 전설로 전해져 올 정도로 황하를 다스리는 것은 중화민족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대사이자 성군으로 기억되고 싶은 황제들의 필수 과업이었다.
강희 15년(1676)에 발생한 홍수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드라마 「천하장하(天下长河)」는 강희황제의 치수에 대한 열망과 치수(治水)의 능신(能臣)인 근보(靳輔)와 진황(陳潢)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역사소설 『얼웨허(二月河)의 제왕삼부곡(落霞三部曲)』이나 『강희제 평전』(「드라마 강희왕조(康熙王朝, 2001)」 ) 같은 청나라 관련 책을 즐겨 읽은 독자라면, 포스터만 보고도 어떤 내용인지 대뜸 진작이 갈 정도로 사극치곤 포스터가 상당히 역동적이다.
강희, 치하가 입국(立國)의 근본임을 깨닫다
<강희황제 역은 배우 루오진(罗晋)이 열연> |
예로부터 지방 관리들은 ‘하독(河督: 치수를 담당하는 총독)’이라는 자리를 별로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마와 태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을 때 재해 없이 넘어갔다고 해서 공무원이나 정부를 칭찬하는 사람은 없지만, 반대로 대책이 미흡해 물난리가 나서 인명 피해가 발생하면 정부나 공무원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처럼 하독 자리는 잘해도 좋은 소리 못 듣고, 잘못하면 엄청난 재난에 대한 책임과 함께 출셋길은 막히기 때문이다. 또한, 치수 공사에는 막대한 돈이 지출되기 때문에 구설수도 많다. 사정이 이러하니 웬만한 각오와 능력이 없다면 엄두도 내어서는 안 되는 자리가 하독일 것이다.
강희 원년부터 계속된 수해로 인해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 파괴, 농업 생산력 저하로 인한 세수 감소, 군량미 운송 능력 감소 등 국가 통치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통감한 강희제는 특별 조치로 새 하독에 근보를 임명하고 다른 관리들이 시기할 정도로 두터운 황은과 신뢰를 보낸다.
이후 근보와 진황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관리들이 두 사람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친다. 천하의 강희제라도 혼자서 세상을 다스릴 수는 없는 법이다. 보이지 않는 당파를 결성해 암중비약으로 대립하는 명주와 색액도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맞추고, 근보 • 진황 같은 신임하는 관리를 맹목적으로 헐뜯는 무뢰배로부터 보호하면서 황제의 뜻대로 정국을 이끌어가려는 강희제의 고심과 번민, 그리고 황제로서의 자존심과 명철함이 잘 드러난 드라마다.
자칭 환생한 하백
<진황(陈潢) 역은 배우 인팡(尹昉)이 열연> |
“절강 전당(錦塘) 사람 진황이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기사(奇士)라고 불렀는데, 대담하고 식견이 있으며 비록 남루한 거처에서 빈곤하게 생활하고 있으나 천성적으로 천문 지리와 수리 하거(水利河渠)의 책을 아주 좋아하여 하도를 다스리는 데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장자오청, 왕리건의 『강희제 평전』 중에서)
인재가 가진 비상한 재주가 세상에 이로움을 주기 위해선 적절한 시기에 태어나 재주를 능히 알아볼 줄 아는 현군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진황과 강희제의 만남이 바로 그러한 경우가 아닐지 싶다.
드라마는 얼웨허의 이야기를 그대로 빌려 철우진의 한 식당에서 강희제와 진황의 운명적인 만남을 성사시킨다. 강희제는 미복잠행으로 열 곳이 넘게 무너진 제방 근처 현장을 시찰하던 중이었고, 진황은 주변의 강 상태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곧 홍수가 닥칠 거라며 호랑이에라도 쫓기듯 도망치고 있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진황은 사람들이 남긴 음식을 유유자적 먹고 있었다. 좋은 말로 대피를 권고하는 사람들 앞에서 하백(河伯)이라고 자칭한 진황은 여기까지는 물이 올라오지 못할 거라고 호언장담한다. 강희 일행은 별 미친놈 다 봤다며 자리를 뜨지만, 강희제는 나중에야 그가 바로 근보가 입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진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황은 명나라 신종 때의 하신(河臣) 반계순(潘季馴)의 치수 방략에 몇 가지를 더하거나 개량해 현재에도 사용되는 하천 관리 이론과 기술을 발명한, 능히 환생한 하백이라 할 수 있겠다. 진황은 몇백 년에 한 명 나올만한 인재 중의 인재였지만, 황명을 거역하고 치수로 얻게 된 토지를 함부로 매각했다는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하게 된다. 드라마에선 줄곧 진황은 황제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적도 확실했다. 또한, 강직하고 올곧은 진황의 성격을 알고 있고, 그런 점을 높이 산 강희제가 별거 아닌 일이라고 넘어갈 수 있는 사건을 트집 잡아 진황을 옥사시킨다? 그보단 진황이 자신의 지식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넘었기 때문일 것이다. 치수에서만큼은 황제보다 진황의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누구라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사살이지만, 그걸 굳이 황제 얼굴에다 대고 냅다 내뱉었다는 것! 삼번 및 대만 평정 등 치세 중후반으로 갈수록 치세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해지는 황제 앞에서 목숨을 내놓지 않고서야 할 소리는 아니었다.
참고로 얼웨허의 소설에서 진황 진천일은 한 여자(13황자 윤상의 생모)를 두고 벌어지는 강희제의 질투 때문에 옥사한다.
우진갑 그는 좋은 관리인가?
<우진갑(于振甲) 역은 배우 수케(苏可)가 열연> |
우진갑은 ‘천하제일청백리’로 명성을 드날렸던 우성룡(于成龍, 「우성룡 천하제일청백리(于成龙, 2017)」 의 사촌 동생으로 이름도 같고 한자 표기도 같다. 그래서 작은 우성룡이라 불렸는데, 시청자들이 헷갈릴지 몰라 드라마에선 본명인 우성룡 대신 별칭인 ‘우진갑’을 사용하고 있다.
아무튼, 이 작은 우성룡 우진갑은 사촌 형처럼 청렴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좋은 부모관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치수 재주는 본인의 청렴만큼 따르지는 못했다. 드라마에선 근보와 진황의 정책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고집불통에 앞뒤 꽉 막힌 융통성 없는 관리로 나오는데, 실제로도 그러했다. 진황이 병사하고 근보가 토지 불하 사건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우진갑이 하독이 되는데, 그는 황제의 명령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치수했다가 많은 수해를 자초하게 된다.
그는 청렴한 관리였고 그의 우국충정도 의심할 바 없지만,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법만으로 치수를 고집한 끝에 국가와 백성에게 큰 폐해를 주고 만다. 그는 좋은 관리인가? 아니면 나쁜 관리인가?
능청스럽게 귀여운 색액도
<색액도(梁冠华) 역은 배우 량관화(梁冠华)가 열연> |
위 동영상(38편)은 정지 화면이 아니다. 강희제가 (명주와 고사기의 정적이었던) 색액도 앞에서 자신을 보필하던 중신 명주와 고사기가 뇌물 수수, 관직 매매 등의 일로 불명예스럽게 퇴직한 것을 두고 짐의 신임을 쥐새끼처럼 배신했다며 신랄하게 비난하는 장면 중 일부를 캡처한 것이다. 색액도 자기는 마치 옥수처럼 깨끗하다는 듯 강희황제에게 맞장구를 치며 두 사람을 소인배, 미꾸라지에 비유한다.
이때 강희제가 색액도를 매섭게 노려보며 ‘조조’를 언급하는데, 이것은 이미 퇴물로 전락한 명주와 고사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황태자 윤잉의 외할아버지 격인 색액도에 보내는 무언의 경고일 것이다. 이에 색액도는 이 모든 사달이 남의 일인 것처럼 능청스럽게 대처하는데, 드라마에선 색액도의 최후가 안 나오지만, 명주와 고사기보다 더 뒤끝이 안 좋았던 사람이 바로 색액도였다. 공신으로 시작해서 역적으로 마무리된 인물들이 어디 색액도뿐이었겠는가?
아무튼, 색액도를 연기한 량관화의 능청스러운 귀여운 연기가 상당히 볼만하다.
그들의 출발은 같았지만 결말은...
<왼쪽부터 서건학(배우 赵麒), 고사기(배우 陆思宇), 진황> |
드라마에서 세 사람은 의형제를 맺은 사이 좋은 친구 사이로 등장한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포부를 품고 과거 시험을 보러 상경하지만, 서건학(徐乾學)만 급제하고 고사기(高士奇)와 진황은 미역국을 마신다.
서건학은 학식은 있지만 심성이 여려 색액도, 명주 같은 대신들 앞에서 비굴해지고, 자신의 소신대로 일 처리를 못하는 나약하고 무능한 관리로 나오는데, 역사엔 명주, 고사기와 함께 탐관으로 기록되어 있다.
익살스럽고 건방지면서도 황제의 비위를 맞추는데 일가견이 있는 고사기는 경전뿐만 아니라 잡학에도 능한 만능 재주꾼이다. 고사기는 입담 하나로 황제의 총애를 얻는 데 성공해 하루아침에 명주와 색액도에 견줄만한 위치로 수직 상승한다. 이후 그는 명주와 함께 근보와 진황을 두둔하다가 명주가 추락할 때 사이좋게 같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아무튼, 두 사람은 옥에 갇힌 진황을 어떻게든 빼내 보려고 애쓰지만, 결국 진황은 옥사하고 마는데, 이를 두고 서건학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진황처럼 대쪽 같은 사람들은 자기 같은 사람들 때문에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면서
강희제는 명주와 고사기를 내치면서 썩을 대로 썩은 관리들의 목을 아무리 쳐도 나아지질 않는다며 개탄하고 있는데, 실제 역사는 그 반대에 가깝다. 즉 강희제는 탐관오리에게 관대한 편이었다. 창업에서 수성으로 진입하는 과도기였던 데다가 삼번, 조운, 치수라는 세 가지 주요 정책과 천하통일 대업에 따르는 전쟁을 다수 치르려면 관리들의 지지와 업무 수행 능력은 필수다. 다시 말해 부정부패와 업무 능력은 별개의 일. 그리고 미사일에 연료 대신 물을 주입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중국이다. 중국 관리의 부정부패 수준은 다른 국가에서 일어나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만약 강희제가 탐관오리를 발견할 때마다 목을 쳤다면, 남아나는 관리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탐관오리를 척결하는 과제는 옹정제에게 넘어간다.
근보가 파직하고 진황이 죽고 나서 치수 책임은 우진갑에게 돌아가는 데 그는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끝에 그토록 반대하던 진황의 지식을 마침내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한국 공무원이 집중호우 대비 지식이 없어서 오송 지하차도 참사가 벌어졌나? 혹은 경찰 • 공무원들이 군중 통솔 방법을 몰라서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냐? 청나라였다면, 적어도 관리 여러 명의 목이 땅에 떨어졌을 인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얼렁뚱땅 넘어갔는데, 그 개자식들의 목을 얼마나 쳐내야 관리들이 제정신을 차릴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천하장하(天下长河)」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큰 것은 진실을 따르고, 작은 것은 허구적으로’ 처리하는 창작 스타일을 적용했다. 즉, 근보와 진황의 치수 기술과 두 사람이 파직당하는 과정 등등의 굵직한 사건들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적용하고, 서건학 • 고사기 • 진황이 의형제를 맺어 과거 시험을 보러 함께 상경하는 설정 등 세부적인 부분은 각색하거나 얼웨허의 소설에서 빌려왔다. 아마도 사극의 본질은 시청자에게 단순히 역사를 가르치는 고리타분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현실을 재조명하거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데 있다는 철학을 반영한 것이리라.
이 드라마를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이유는 연기, 의상, 소품, 소리, 촬영 장소 등 모든 면이 매우 뛰어나다는 점도 있지만, 황제를 둘러싼 역사 • 정치극임에도 불구하고 정치 투쟁 • 궁중 음모 같은 개인적으로 짜증스러운 소재에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맘에 들었다. 또한, 다시 한번 헝디엔 스튜디오(横店影视城)의 위력과 장관을 감상할 기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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