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5

흑백 | 미야베 미유키 | 괴담은 꼭 무서워야 제맛?

흑백 | 미야베 미유키 | 괴담은 꼭 무서워야 제맛인가?

book review | おそろし~三島屋変調百物語 | 宮部みゆ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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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은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해주길 기다린다?

누군가는 이렇게도 생각할 것이다.

죽는다는 상상이 슬프고 괴로운 이유는 정든 사람들과 헤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사람들에게서 잊히는 것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이름을 남기는 일에 그토록 억척스럽게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관직에 오르고, 의를 행하고, 재산을 모으고, 선행을 베푼다. 이 모든 것이 명성을 얻는 지름길이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이름을 남길 수 없다면, 엽기적인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악명을 떨친다. 이토록 사람의 명성 욕구는 지독하다. 현대인이 SNS에 집착하는 이유 한구석에도 죽어서도 뭔가를 남기고 싶은, 죽어서도 살아 있는 사람들 입속에 오르락내리락하며 이야기되고 싶은 욕망이 꿈틀대고 있다. 내 블로그도 그런 밉살스럽지 않은 소박한 연유로 탄생했다.

공식적으론 다수로부터 위대한 인물들이라고 인정받은 이름들이 국경, 언어, 문화, 세대를 초월하여 널리 회자된다. 그렇게 그들은 문명적인 방법으로 영생을 누린다. 그리고 비공식적으론 괴담, 기담, 전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귀신이 비문명적인 방법으로 영생을 누린다. 귀신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생명력을 얻고 그 이야기 속에서 위용을 드러낸다.

귀신 이야기로 장난치면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얘기를 해주길 학수고대하는 귀신은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입에 담으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사람들 앞에 불쑥 나타나기 때문이다. 귀신은 자기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고맙고 반가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식으로 기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일지라도, 한껏 심장을 졸이며 귀신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귀신까지 본다면 자지러지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이래서 귀신과 사람은 친해지기 어렵다. 그 으스스한 모습은 둘째치고 나타나는 장소와 때가 심히 좋지 않다. 하지만, 귀신 이야기가 없는 곳에서 귀신이 나타난다면 이만큼 썰렁한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귀신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귀신을 데려오는 것이다.
귀신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사람의 가슴이고 귀신을 극락에 보내는 것도 가슴이다.

book review | おそろし~三島屋変調百物語 | 宮部みゆき
<『흑백』을 원작으로 제작한 NHK 드라마 「おそろし」 포스터>

‘괴담’이 ‘독자’와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

사람이 억울하게 죽는다. 슬픔과 괴로움, 원한과 분노로 휩싸인 원한이 남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이야기로 남아 방랑하는 나그네처럼 사람들의 입담 속을 떠돈다. 시간이 지나 이야기 속 주인공의 이름은 화자의 구미에 따라, 혹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변형되더라도 억울한 사연이 남긴 감정만큼은 감정이입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렇더라도 싫증을 잘 내는 야박한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만은 없다. 오래된 이야기는 제아무리 리모델링과 리메이크로 생명 연장을 꿈꾸어도 끝내 새로운 이야기에 자리를 내주기 마련이다. 사람들에게 새것은 언제나 좋은 것이니까.

먼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잊힌다. 이야기가 품고 있는 어두운 감정들이 사그라든다. 이야기가 통째로 잊힌다. 이야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사람들이 이야기를 잊은 것뿐이다. 이야기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쉽게 몰입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쉽게 잊는 동물이니까. 그렇게 사람들에게 잊힌 채로 세월이 흐르다 보면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가 있었던 것조차 모르게 된다. 無에서 有로 탄생한 이야기는 그렇게 다시 無로 돌아간다.

이야기를 담고 있던 형체 없는 무언가만 텅 빈 채로 남는다. 채워진 것은 없고 빠져나간 것만 있으니 그것은 진공 상태나 다름없다. 그 어마어마한 흡입력으로 『흑백(おそろし)』의 그 무시무시한 저택은 사람들을 삼킨다.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실종되고, 그 배경에는 음침한 저택이 있다는 소문이 난다. 사람들은 잊고 있던 옛이야기를 다시 꺼내 든다. 사람들 사이에서 또다시 회자되어진 저택은 뿌듯하다. 그것이 두려움을 부르고 공포를 일으키는 악명이어도 상관없다. 저택이든 그 저택 안에 기생하는 무언가든,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또다시 유령처럼 떠돎으로써 그들은 부활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들에겐 사람들이 자신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야기를 전하는 파발꾼을 자청한다면 그들은 더덩실 춤을 춘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야기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 풍선을 빼앗긴 소녀처럼 침울하다. 그들이, 그것들이 살아남으려면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어줄 독자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줄 이야기꾼이 필요하다. 바로 나 같은 성실한 독자와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 같은 능력 있는 작가 말이다.

그렇게 괴담은 우리 곁을 떠돌다가 사라지고 부활하기를 끊임없이 반복해왔다.

book review | おそろし~三島屋変調百物語 | 宮部みゆき
<드라마 「おそろし」 중 한 장면, 흑백의 방 뛰뜰에 핀 만주사화가 보인다>

진짜 무서운 귀신은 우울한 귀신?

작가 미야베 미유키에 따르면 『흑백』이라는 괴담 이야기에 저택에 삼켜진 사람 중 유일한 생존자는 오치카와 오타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내가 볼 때 한 사람 더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미야베 미유키다. 그가 저택에 삼켜진 것인지, 스스로 기어들어 간 것인지 그 자세한 사정이나 내막은 모른다. 다만, 추측하던데 그는 저택에 삼켜진 후 한껏 그들의 이야기로 세뇌당한 채 현실로 토해내어졌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우아한 괴담을 어쩌면 이렇게도 능청스럽게 잘 꾸려나갈 수 있겠는가?

요괴 전문가인 교고쿠 나쓰히코(京極夏言)의 시대물이 공동묘지 같은 엄숙하고 음침한 분위기를 풍긴다면, 같은 시대물인 『흑백』은 ‘무섭다’, ‘기이하다’로 먹고 사는 괴담에는 당치도 않게 느긋하고 차분하다. 무섭다기보다는 가엾다. 닭살이 돋기 전에 눈물이 먼저 앞을 가린다. 긴장감에 전율하기 전에 가슴이 먼저 먹먹해진다. 괴담인지 눈물겨운 드라마인지 분간이 안 간다. (귀신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할 정도로 평범해 보이는) 죽은 사람들이 여럿 등장하고, 그 죽은 사람들에겐 원혼처럼 이승을 떠돌만한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고, 한편으론 산 사람 죽은 사람 가리지 않고 집어삼키는 무시무시한 저택도 등장하니 괴담은 괴담이다. 그런데 괴담치곤 너무 구수하다. 너무 나긋하다. 너무 애틋하다. 여기에 파도가 넘실대듯 번갈아드는 단문과 장문의 감질나는 텍스트는 가라앉은 독자의 감성을 물거품처럼 부침하게 만드니, 끝까지 읽지 않고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글을 쓰다 보니 문득 『흑백』의 소재, 혹은 그 소재가 자아내는 서글프고 구슬픈 분위기가 드라마 「블라이 저택의 유령(The Haunting of Bly Manor)」과 약간은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살아 있는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잊히는 것만큼 무섭고 두려운 것은 없다. 이 우주에 나 혼자만이 버려졌다는 소외의 극치는 우울증의 시작이자 중증이다. 귀신이 사람 앞에 나타나 횡포를 부린다면, 그것은 도진 우울증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발작이자 몸부림이지 않겠는가?

불행을 고백할 수 있다면 행복도 멀지 않다

눈물을 흘리면 가슴에 얹힌 슬픔과 묵은 감정이 조금은 해소되듯, 글을 쓰면 답답한 심정이 다소간 가라앉듯, 말을 하면 막막했던 마음에 갈피가 잡힌다. 어떤 가슴 아픈 사연일지라도 혼자 삭히는 것보단 누군가에게라도 털어놓는 것이 마음의 짐을 다소나마 가볍게 하는 한 방법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미안합니다’라는 한마디 뱉는 것도 인색해 크고 작은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 사람의 소갈머리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이 겪은 불행을, 거기에는 분명 말하는 사람의 잘못도 포함되어 있을 그 이야기를 타인에게 털어놓을 땐 ‘미안합니다’ 이상의 더 큰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

오치카는 타인의 불행을 반은 예의상으로, 반은 억지로 듣게 됨으로써 자신의 불행을 토로할 용기를 얻는다. 그것은 불행을 안고 사는 사람이 오치카 혼자가 아니라는 뻔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려는 심산보다는 다른 사람의 체험담을 들려줌으로써, 오치카가 짊어진 불행의 형태를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가 더 크다. 거기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사람들의 고민이 미래라는 불확실성에서 오는 것처럼 모호한 불행보다는 명확한 불행이 극복하기가 좀 더 쉽지 않겠는가.

리뷰를 빙자한 나의 자조적 글쓰기로 오늘은 어떤 응어리를 풀어냈는지 세부 사항은 알 수 없지만, 독으로 독을 치료하듯 불행으로 불행을 치료한 오치카의 대담한 사연은 나에게 글쓰기를 계속하라는 이명처럼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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