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경 | 넌 지리서냐? 아니면 요괴서냐?
<청나라 컬러판에 실린 아홉 머리의 새(좌, 출처: wikimedia)> |
‘요괴’니 ‘괴물’이니 하는 것들의 시초?
대충 흩어보면 영락없이 지리서지만, 마음을 다잡고 차근차근 읽어보면 요괴 도감 같기도 하고 신화서(神話書) 같기도 한 것이 『산해경(山海經)』이다.
『산해경』에 소개되는 무수히 많은 산은 서로 다른 신들이 관장하고 있고, 이외에 해, 달, 비, 바람 등 자연에서 일어나는 주요 현상들을 관장하는 신들도 있다. 그들의 생김새는 제각각이지만, 요괴나 괴수를 연상시키는 그들의 외모는 만약 마주치면 털썩 주저앉아 오줌을 질질 싸게 할 정도로 ‘친근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신들의 외모만큼이나 『산해경』에 소개된 여러 나라 사람들의 외모 또한 평범한 것이 없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사람들이 사는 나라도 있고, 머리 하나에 몸을 셋이나 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도 있으며, 창자가 없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도 있다. 이들만으로도 괜찮은 공포영화 두세 편은 후딱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기괴하지만, 다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약과다. 기굉지국(奇肱之國) 사람들은 팔이 하나며 눈이 셋이며 한 몸에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를 다 갖추었다(아마도 이들은 성적 욕구불만에 시달릴 것 같지 않으니 왠지 모르게 평화로운 사회일 것 같다).
사정이 이러하니 『산해경』은 요괴 이야기로 가득한 교고쿠 나쓰히코(京極夏彦) 소설에도 간혹 언급될 뿐만 아니라 구미호를 비롯한 동아시아 설화 문학 속에 등장하는 요괴들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끄트머리에서 만나게 되는 고전이다.
<貫匈人(관흉인)> |
‘요괴’로 묘사된 대상들의 정체는?
신이고 동물이고 사람이고 『산해경』에 등장하는 피조물들은 공평하게도 모두 기상천외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외모에 대한 묘사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삽화를 보고 있노라면, 흉측하고 기괴하다는 인상이 지나가기 바쁘게 뒤를 쫓아 따라오는 의식은 어쩌다가 이런 피조물을 만들어낼 생각을 했을까, 혹은 만들어야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누군가 (수달이나 물개 등 당시엔 명명되지 않은) 희귀한 동물이나 낯선 외지인(또는 사고나 병으로 일부 신체가 불구가 된 사람들)을 타인에게 구전으로 전하는 과정을 여러 번 거치면서 와전되고 살이 붙고 하면서 지구상에 존재했던 동물을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로 거듭나게 했을 수도 있다.
이런 이치로 따지면, 물고기의 몸에 개의 머리를 하고 있으며 갓난아기와 같은 소리를 낸다는 지어(鮨魚)는 물개나 수달을 묘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의 몸에 네모반듯한 얼굴을 하고 세 개의 발이 있다는 ‘섭타’라는 신은 성기가 큰 남자(아마도 외지에서 온 흑인?)를 모티브로 했을 수도 있다. 우연히 중국에 발을 딛게 된 백인이나 흑인이 아예 없었다고는 볼 수 없다는 점에서 피부가 검은 사람이나 흰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오히려 이해하기 쉽다. 흑치국(黑齒國) 주민들의 이가 검다는 것은 『홍위병(Gang of One: Memoirs of a Red Guard), 저자 션판(Fan Shen)』에 등장하는 탕구(塘沽)의 주민들처럼 오염된 물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인어는 수영을 잘하는 부족민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약간 과장이 곁들여진 결과일 수도 있으며, 동굴에 사는 털이 있는 사람들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온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에 관한 기록(혹은 그때까지 겨우 살아남아 있던 이들의 후손?)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피조물을 양산하는 해체 • 조립 문화
『산해경』에는 (앞에서 주절주절 나열한 것처럼) 억지로라도 설명이 가능한 경우보다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피조물이 더 많이 등장한다. 여우 꼬리가 아홉 개라는 것은 돌연변이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사람 혹은 동물 머리가 아홉 개 달린 피조물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엉덩이가 있을 곳에 머리가 달린 피조물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정말 그런 기이한 생명체가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이런 얼토당토않은 피조물도 무언가를 본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그 엄청난 비약은 정말이지 놀라 뒤로 자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혹은 옛사람들은 외계인을 따라 영화 스타워즈에나 나올법한 은하계의 여러 행성을 두루 여행 다니며 만났던 다양한 외계 생명체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고 한 것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독자의 허를 찌르는 비상한 트릭이 묘미라고 할 수 있는 추리소설이나 기발한 상상력으로 독자를 압도하는 공상과학소설뿐만 아니라 게임, 영화, 만화 등의 문화 콘텐츠, 그리고 우리 곁을 지배하는 갖가지 생산품 중에서 우리는 간간이 사람의 놀라운 창의력에 혀를 내두르곤 하는데, 이런 기질이 『산해경』이 창조되고 전해지는 과정에도 넉넉하게 발휘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그럴싸하다. 논리와 이성을 유명무실하게 하는 피조물을 애써 만들어 낸 이유만큼이나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할 의도 역시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그냥 누군가의 유별난 취미에서 시작된 일인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그 당시엔 그런 이야기나 그림을 생산하는 것이 일종의 오락거리일 수도 있겠다. 누가 더 괴상망측한 피조물을 만들어내는 대회라도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가볍게 넘기기에는 심상치 않은 점도 있다. 『산해경』에 나오는 상상 속 피조물들을 만들어내는 조합법(예를 들어 여러 동물을 부위별로 해체한 다음 이것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다른 문명권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들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유니콘 같은 경우는 『산해경』 속에 등장하는 박(駮)이라고 부르는 짐승과 흡사하며, 그 밖에 미노타우로스, 그리핀 등도 실존하는 동물의 해체된 부위들을 조합해서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만약 이런 방식의 창조 놀이(?)의 기원이 한 뿌리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막 뻗어 나갈 때쯤엔 이미 이런 상상 속 동물들을 막대기로 땅이나 동굴 벽에 그리는 놀이가 유행하고 있었고, 그것이 구전으로 전승되어 『산해경』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된 셈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일종의 문화적 수렴진화이거나 지역에서 지역을 거친 수평적 전파로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순전히 내 추측이고 어쩌면 인터넷이나 책 등에 이에 대한 답이 벌써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듯 『산해경』의 글을 읽고 글 속에 간간이 박힌 그림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조상들의 뭔가 잡다하면서도 한편으론 왠지 소름 끼치는 상상력에 기가 질린다. 사실 지루한 지리서이기도 한 이 책을 읽게 되는 가장 큰 재미가 이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중국 창조신 중 하나인 여와(출처: wikimedia)> |
요지경 속에 숨은 옛사람들의 삶
『산해경』은 사람인지 짐승인지 괴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기괴한 피조물을 감상하는 이상야릇한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먹으면 무엇에 걸리지 않는다는 식의 민간 처방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경계하고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듯, 산해경이 저술된 시기(춘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 양식을 가늠해볼 수 있는 단서들도 꽤 있다.
지금은 민간요법이라 불리는 이런 처방을 통해 옛사람들도 치질, 악몽, 피로, 편집증, 기타 이런저런 정신질환에 시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아기를 못 가지게 하는 피임약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옛사람들도 쾌락을 목적으로 성생활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무리 베어내도 고기가 줄지 않는다는 소(牛) 시육(視肉)은 소고기를 실컷 먹고 싶은 식탐과 그것을 충족시킬 수 없는 현실의 어려움이 결합하여 나은 상상 속의 동물로 추측된다. 그 밖에 상서롭거나 상서롭지 않은 징후를 암시하는 짐승들은 옛사람들이 장수, 풍년, 평안에 대한 염원과 전쟁,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을 품었음을 은유한다. 반면에 엉덩이가 있을 곳에 머리를 붙이거나, 창자가 없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생리학에 대한 지식은 상상력만큼 뛰어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여호라는 새가 나타나면 그 지방에 토목공사가 많아진다는 징조에는 군인들이 사역을 싫어하듯 백성들이 토목공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목에 생기는 혹을 치료하는 처방이 몇 번이나 등장하고, 깊은 산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혹이 많이 생긴다는 《회남자(淮南子)》의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이 혹은 어쩌면 개체 수가 적은 고립된 집단에서 나타나는 유전자 병목 현상에서 기인한 유전 질환일 수도 있다.
한편 최상위 포식자로 알려진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먹는 짐승뿐만 아니라 사람도 잡아먹는 짐승도 종종 등장한다.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가 간혹 있을 수 있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지만 이 둘을 잡아먹는 짐승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호랑이나 표범 같은 경우는 마주치면 두려움에 떨게 했을 뿐만 아니라 종종 잡혀서 먹히기까지 했기에 나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나쁜 친구들을 혼내줄 영웅 같은 존재를 상상하는 것처럼 그런 육식동물을 없애 달라는 소망에서 호랑이를 잡아먹는 피조물을 만들어낼 법도 하다. 그럼, 사람을 잡아먹는 짐승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람이 다른 짐승들에게 빈번하게 잡아먹혔다는 것을 의미할까? 인구 과잉으로 먹고살기가 어려워지자 참다 참다 못해 나온 맬서스식의 해결책일까? 아니면 사람을 잡아먹는 몇몇 짐승이 갓난아이의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낸다는 것으로 보아 시끄럽게 우는 아이를 겁주어 진정시키려는 방편일까(자꾸 울면 호랑이가 온다고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이도 아니면 날카로운 이빨 자국이 선명한 뼈만 남은 송장을 바라보며 탐정이 시체를 보고 범인을 추리하듯 사건의 인과 관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상상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세상도 요지경이지만, 『산해경』은 더더욱 요지경이다.
<1597년 목판 산해경(출처: wikimedia)> |
자연과 우주를 이해하는 열쇠, ‘신’
『산해경(山海經)』 속에 등장하는 많은 신은 무엇을 의미할까? 내가 볼 땐 ‘신’은 자연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일들을 모순 없이 이해하려는 조상들의 지적인 노력의 산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그리스 신화, 로마 신화, 그리고 『산해경』에 등장하는 동양 신화를 포함한) 인류의 크고 작은 문명이 남긴 신화는 인류가 주변에서 일어나는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시도의 산물이다. 적어도 당시로서는 ‘신’의 존재로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노력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경계를 벗어나는 행위는 아니었다.
지금의 인류가 자연과 우주를 설명하고 이해하는데 ‘과학’을 사용하듯, 신화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겐 ‘신’이 ‘과학’이었고, 그것도 당시의 지식과 앎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던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유능한 도구였다. 조상들이 하늘을 가르는 번개가 치고, 심장을 멎게 할 것 같은 천둥이 천하에 울려 퍼지고, 대지를 적시는 비를 퍼붓고, 나부끼고 쓸어버리고 부러트리기도 하는 바람 등의 자연 현상들을 각각을 관장하는 ‘신’의 의지나 행위로써 이해하는 것 말고는 무슨 다른 수가 있었겠는가!
놀라운 것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어떻게든 설명하고 어떻게든 이해하려는 지적 호기심과 집념이다. 아마도 이런 집념은 인지 부조화 이론과도 관련이 있을듯싶다. 내가 아는 것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인지 모순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인간은 ‘신’을 창조해 그 모순을 해결했다. ‘신’을 내세우면 태양계니, 공전이니, 자전이니 하는 복잡한 행성 운동 법칙을 들먹이지 않고도 일몰과 일출, 그리고 달이 뜨고 지는 것을 단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우주의 물리 법칙을 멋들어지게 설명하는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것만큼이나 멋지고 우아한 일이다. ‘신’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내는 인류의 지적인 창의성과 놀라운 상상력의 결과다.
이런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과학도 없었을 것이다. 고로 그땐 가뭄, 비, 바람, 해, 달 등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이 나름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의 결과, 혹은 적어도 그 과정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신의 기원이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신’이 문명마다 공통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어느 신화를 막론하고 바람, 비, 해, 달, 번개, 천둥, 바다 등 자연 현상의 요소요소를 관장하는 신들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렇다면, 현재 인류가 아프리카 이브의 후손이듯, 각 문명의 신들도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것일까? 아니면 수렴진화나 늑대가 개로 진화한 것처럼 여러 개의 기원, 즉 다계통발생적(polyphyletic)일까? 이것은 언어의 기원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문제다. ‘신’의 역할과 그 존재론적 의미는 구전으로도 충분히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형이하학적인 고찰에서 시작한 신의 존재 의미는 인류의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면서 지역과 문화의 특색을 반영하는 다양성을 띤 채 좀 더 고상한 형이상학적인 고찰로 넘어왔다. 또한, 문명이 발전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신은 예술, 철학, 문화, 정치, 경제, 인문, 과학, 종교 등 인간 사회의 여러 요소요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그 기원만큼은 자연과 우주의 현상을 인류의 지식으로 품으려는 그 당돌한 의지와 그 의지에서 태동한 경이로운 상상력을 빼놓고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을까 싶다.
고전을 읽는 맛
『산해경』은 많은 부분을 중국 지리를 설명하는데 할애하고 있기에 독자의 취향이 아주 특별하거나, 아니면 하늘을 찌를 정도로 고상하지 않다면 당연히 지루한 책이다. 농담으로라도 권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하지만,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처럼 요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책을 좋아한다면 언젠가 한 번 정도는 읽어야 책이 아닐까 싶다. 『산해경』이 묘사하는 기괴한 피조물들과 그것을 그린 기괴한 그림들을 음미하다 보면 현대인이 상상하는 요괴가 그렇게 새로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큰 시간은 필요치 않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쯤이면 옛사람들의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론 허무하기도 한 상상력에 대한 찬탄과 탄식이 반반 섞인 한숨이 절로 흘러나오기도 한다. 느긋하게 감상하기 좋은 책이라기보다는 뭔가 기괴하고 요상한 콘텐츠를 계획하고 있는 사람의 의기소침한 창의력을 분발시키는 데 꽤 도움이 될 책이다. 특히 게임 속에서 사용자들에게 무수히 죽임을 당하는 몬스터를 하염없이 구상하고 있는 게임 기획자라면 이만한 참고 도서도 없을 듯싶다.
산업 시대 이후에 『산해경』 같은 전설적이고 신비하면서도 한편으론 황당한 이야기가 탄생하지 못했다고 해서 현대인의 상상력이 『산해경』을 저술한 옛사람들보다 떨어진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지금의 문명은 그 차이가 실로 엄청나다고 자부하고 있지 않은가? 다만, 그때의 사람과 지금의 사람은 문명의 양적 • 질적 차이만큼이나 서로의 관심사가 다를 뿐이다. 하지만, 『산해경』 같은 책은 그 다름과 차이를 조금은 줄여줌으로써 옛사람과 현대인 사이에 거대한 장벽으로 존재하는 시공간을 비롯한 문화, 문명, 언어, 가치관의 차이를 일시적으로나마 허물어트리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문화 속에 존재하는 옛사람들의 미세한 흔적을 되짚어볼 수 있고, 그럼으로써 그들과 우리가 아주 가느다란 무언가로 느슨하게나마 연결됐음을 자각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나마 그들은 우리 안에 살아 있고, 그렇게 우리는 미래의 후손 안에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비단 『산해경』뿐이겠는가? 내가 볼 땐 고전을 읽는 맛이 다 이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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