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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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웃음 | 전통과 혁명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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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웃음 | 라오마 | 전통적 삶과 혁명적 삶의 수선스러운 공존

후루진 주민들의 모든 주의력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하나의 목적에만 쏠려 있었다. 후루진 주민들의 생각과 행위는 전부 돈을 에워싸고 움직였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고나 이야기는 모두 돈과 관련되어 있었다. (p134)

중국의 경제 개혁, 과연 누가 이끌었나?

역사학자 프랑크 디쾨터(Frank Dikoter)는 심혈을 기울인 자신의 역작 ‘인민 3부작’ 중 마지막 저서인 『문화 대혁명(The Cultural Revolution)』을 통해 주류 역사관을 뒤집어 엎을만한 충격적인 가설을 제시한다. 그것은 중국의 경제 개혁을 이끈 원동력은 ─ 보통 알려진 대로 ─ 개혁 • 개방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덩샤오핑(鄧小平)이 아니라 그저 우리처럼 평범하고 범용한 보통의 인민들, 그중에서도 농민들이었다는 것이다.

오로지 선전과 선동만으로도 내전과 전쟁을 뛰어넘는 대혼돈과 대파괴를 가져올 수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인류사에 남긴 마오쩌둥의 위대한 공산주의 실험의 연속조차 농민들의 순박함과 우둔함 속에 숨겨진 삶에 대한 끈질긴 애착을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마오쩌둥의 공상적 이상주의의 실현이라는 그럴싸한 이데올로기의 실체는 망령이 난 노인의 과대망상과 변덕이 곤죽처럼 섞인 혼돈 그 자체였음이 뒤늦게 밝혀지긴 했지만, 그것들이 대세를 장악하며 중국을 평정하고 있었을 땐 어느 누가 감히 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었을까?

해방 이후 혼돈과 파괴가 갈마돌며 정신없이 몰아치는 시련의 연속에서 생존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확보하고자 그 어느 때보다 전투적으로 매달려야 했던 농민들은 그러한 사실을 꿰뚫어 볼 틈도, 능력도 없었거니와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당연히 누설할 수 없었다. 위대한 조타수의 위대한 실험 속에서 수천만 명이 기아로, 혹은 그와 관련된 질병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한 점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몰렸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대다수 인민은 살아남았다.

이것은 위대한 조타수가 안내한 길은 혹독하고 가혹했지만, 그에 맞서는 인민들의 인내심과 처세술도 만만치 않았다는 방증이다. 그들의 생명력은 바퀴벌레처럼 질겼으며, 그들의 처세술은 최고의 여배우로서 아카데미상을 받은 오드리 헵번 뺨쳤다. 겉으로는 순박하고 우둔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생존을 향한 야수 같은 본능과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돈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열망이 있었다(역시 상인의 나라답다!). 이 둘에 스스로 궁색한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삶에 대한 끈덕진 애착이 더해져 모종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소리 없는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던 덩샤오핑조차 거스를 수 없었던 대세, 즉 시장 경제를 향한 조용하면서도 굳센 의지가 서린 물결이었다.

바보가 특산물인 마을

쓸데없이 거창한 서문도 봐주기 어려운데, 그것조차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으니 정말이지 면목이 없다. 그렇다고 이쯤에서 내 블로그를 떠나면 글을 쓴 내 성의가 완전히 무시되고 마는 꼴이니 내 처지에서는 당연히 곤란하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끝까지 읽어보면 내 감히 장담하건대 안 읽은 것보단 나으리라. 아무튼, 『바보 웃음(傻笑)』은 장편이 아니고 단편과 중편 사이를 오가는 작품들의 모음집이다 보니 와닿는 느낌이 약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나로서는 이런 모음집이 리뷰를 쓰기에는 가장 난감하다. 그래서 오늘의 리뷰는 횡설수설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미 시작부터 멋지게 삼천포로 빠지지 않았는가?

중국 작가 라오마(勞馬)의 중편 모음집 『바보 웃음』은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중국 현대사를 집요하게 거들먹거리는 정치적 색채가 짙은 소설은 절대 아니다. 다만, 중국의 개혁 • 개방 시기를 전후로 펼쳐지는 젊은 세대와 구세대 간의 세대 차이와 그로 말미암은 갈등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와중에서도 돈에 대한 열망만큼은 세대 차이를 뛰어넘어 농촌의 활기차고 역동적인 모습에 활력소로 작용하는 모습에서, 개혁 • 개방의 원동력을 농민에게서 찾은 프랑크 디쾨터의 책들이 생각나 몇 자 끄적거려 본다는 것이 이도 저도 아닌 서두가 되어버렸다고나 할까나.

아무튼, 남자는 마누라에게 손찌검하고, 마누라는 애를 때리고, 애는 개를 때리고, 개는 남자를 문다. 제구실을 못 하는 남편을 둔 아내는 마을 사람들 몰래 바보를 유혹해 씨를 받아 아이를 낳는다. 초등학교는 바보의 집요한 요청에 못 이겨 ‘바보증명서’를 발급한다. 돌잡이를 바라보는 가족들은 아이가 1위안짜리 지폐를 잡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린다. 농민들은 도시에서 하방한 청년이 거품을 일으키며 이를 닦는 모습도 이해하지 못한다. 바보가 집마다 한 명씩은 꼭 있는 바보가 특산물인 마을이 있다. 누군가는 도시처럼 번지르르해지는 고향의 변화를 반가워하고, 누군가는 무분별한 개발에 황폐해져 가는 고향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해방 이후 반강제적으로 주입된 혁명적인 삶 속에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관이 아슬아슬하게 기생하는 독특한 생활 풍속을 보여주는 『바보 웃음』 속에 등장하는 농촌 마을의 진풍경이다.

Smirking by Rauma
<설마 '바보 웃음'이 이렇게 뇌쇄적이지는 않겠지?>

소박하고 우직한 농민들의 수선스러운 일상

궁핍하고 외진 농촌이다 보니 도시로부터 불어오는 광풍의 직격탄은 피해갈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100% 안전한 것은 아니다. 이(李) 괴물의 첫째 아들 이스가 생과부의 유혹에 넘어가 씨를 제공하는 망나니가 되고, 나중에는 말 한마디 잘못 내뱉은 대가로 정치범으로 끌려간다. 백치가 정치범으로 둔갑한다는 웃지 못할 여정은 아무리 외진 시골일지라도, 아무리 정치적 격변 지역의 변두리라 할지라도 위대한 조타수의 실험이 내뻗는 마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해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약과라고 볼 수 있다. 최소한 『바보 웃음(傻笑)』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소재로 한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성에 대한 환멸적인 탄식을 자아내는 잔혹한 광경이나 가족끼리, 혹은 이웃끼리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는 아귀다툼은 일어나지 않는다. 소설 제목처럼 바보스러운 웃음을 절로 짓게 하는 바보들의 언동과 소박하고 우직한 농민들의 수선스러운 일상의 왁자지껄한 조합이 정치적, 사회적 격변을 애써 우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중국의 온 도시를 휩쓴 정치적 광풍이 모든 농촌을 집어삼키지는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중국이 오죽 넓으랴. 그리고 중국 농민 역시 오죽할까? 춘추전국시대부터 진시황제를 거쳐, 그리고 군웅할거의 삼국 시대와 청나라 말기의 열강 침략과 항일전과 국공내전을 거쳐 공산 혁명으로 종결된 파란만장한 역사의 산증인이자 그럼으로써 각종 재난과 풍파에 단련될 때로 단련된 그들이 아니었던가?

『바보 웃음』을 읽고 있노라면, 그런 잔혹의 시대를 견뎌온 농민들의 억척스러운 모습이 은연중에 내비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삶을 향한 순박한 의지와 애착이 의도치 않게 자아내는 해학과 풍자이다. 바보가 한 말은 모두 엉터리라 여기기에 여기저기에 얽힌 복잡한 책임 관계에서 벗어나듯 그들의 순박함과 고지지식함이 의도치 않게 자아내는 해학과 풍자 역시 변화무쌍한 정치적 격변에서 살짝 어긋나 있다. 약간은 아쉬우면서도, 약간은 더 시원하게 꼬집어주기를 원하면서도, 약간은 더 과감하게 밀어 붙어주기를 원하면서도, 그 약간의 기대감을 ‘바보 웃음’으로 하나씩 떨쳐내는 필설이야말로 이 책의 묘미라면 묘미다.

돈, 돈, 돈, 모두가 ‘돈’을 바란다

농민들의 삶을 향한 순박한 의지와 애착을 간단하게 종합해보면 ‘돈’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 아무리 무지하고 소박한 농민일지라도 그들 역시 소망하고 꿈꾸는 삶이 있다. 그것은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처럼 부자를 선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부자를 비난하고 시기하는 모순된 감정을 안은 채 자신들도 언젠가는 그런 부자가 되기를 갈망한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돌잡이 풍습에서 갓 돌을 맞은 아기가 지폐를 잡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돈을 향한 그들의 열정이 얼마나 애타고 간절한지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열망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정부와 공산당이 제대로 일을 못 하니 스스로 돈을 벌어보겠다는 농민들의 의지가 모이고 모여 시냇물을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룬 덕분에 중국 경제가 물꼬를 틀 수 있었다고 디쾨터는 해석하지 않던가.

『바보 웃음(傻笑)』에서는 바보조차 돈을 벌고자 작심하고, 부패한 관리들은 서민들 앞에서 어깃장을 놓으며 삥을 뜯는다. 계층이 다르고 사는 곳은 다를지라도 모두가 돈을 향한 열정만은 일맥상통한다. 욕을 먹든 배가 고프던 바보는 바보니까 웃고, 돈을 번 사람은 돈을 벌었으니까 웃고, 인민에게서 삥을 뜯은 관리는 체면을 차렸으니까 웃는다. 이래저래 돈을 잃은 사람도 부자가 될 내일을 기약하며 웃는다. 돈이 윤활유가 되어 군상들 사이를 뱀처럼 요리조리 헤쳐나가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듯 사람들을 자극하고, 그래서 그들을 웃음 짓게 한다. 삶이 아무리 구차하고 고단하더라도 그들은 누군가의 돈을 바라보고, 또는 언제가 내 손으로 만지게 될 ─ 한편으로는 기약 없는 ─ 돈을 상상하며 바보처럼 웃음 짓는다. 누구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갈지 모르는 돈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서로 다른 욕심과 이해로 모두 바보처럼 웃는다.

어쩌면 중국 농민들이 그렇게 숱한 역경을 겪고도 때마다 오뚜기처럼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삶에 대한 끈질긴 애착과 더불어 돈을 벌고자 하는 타고난 장사꾼 기질이 끈질기게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확실하고 뚜렷한 목적이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역경과 고난을 더 잘 이겨내는 것처럼 말이다.

태풍의 눈 같은, 하지만 가볼 수 없는 고향

『바보 웃음(傻笑)』의 이야기 대부분은 우여곡절 끝에 해피 엔딩으로 귀결된다. 아마 개혁 개방 당시 중국 농민의 현실은 그것보다는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집요하게 주요 인물들의 삶이 안정적인 궤도에 안착하는 것으로 마무리한 것을 보면 중국 농민들의 행복을 염원하는 작가 라오마의 바람이 기대 이상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비극적인 현실을 노예가 짐수레를 끌고 가듯 해피 엔딩으로 강제적으로 끌고 가버림으로써 교묘하게 풍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도 아니면 당시 중국 농민들의 실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 괜찮은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도시가 정치적 풍파로 혼란과 파괴가 불규칙하게 어우러진 몸살을 대단히 앓고 있을 때, 『바보 웃음』의 농민들만큼은 그들 특유의 소박하면서도 평온한 일상을 꽤 유지하고 있었다. 간혹 누군가 일으킨 웃지 못할 비화로 일상에 잠깐 금이 가곤 했지만, 결코 도시처럼 삶 자체가 풍비박산 나는 지경으로까지는 치닫지는 않았다. 이는 그들에게 있어선 참말로 다행이자 복이 아니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은 마치 태풍의 눈 같은 곳이라고 할까나.

도시를 무너뜨린 광풍이 언제 휘몰아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도 전통과 혁명적인 삶이 요상하게 공존하는, 그리고 고향의 옛 모습이 뜨거운 개발 열기로 녹아내리는 밀랍 인형처럼 서서히 윤곽을 잃어가는 그곳 농민들의 삶과 풍습을 작가 라오마는 마치 독자가 살아본 적 없고, 살아볼 수 없었던, 그럼에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어느 먼 고향 마을처럼 단아하게 그려내고 있다. 격정은 없지만, 대신 활기가 있고, 비극은 없지만, 대신 ‘바보 웃음’이 존재하고, 망각과 희망이 엇비슷하게 대치하는 그런 고향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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