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 거미의 이치 | 교고쿠 나쓰히코 | 교묘하고 놀랍고 환상적인 다차원 미스터리
“진범은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물을 주기는 하지만 무엇이 열릴지, 누가 베어낼지까지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게 적의 방식입니다. 무용수는 흥행주를 모른 채 춤추고, 배우는 무슨 연극인지도 모르고 연기하지요. 소설 등장인물의 대부분은 그 소설의 제목을 알 수 없어요— 우리는 무용수이고, 배우이고, 등장인물입니다.” (『무당거미의 이치(絡新婦の理)』 下, p119)
가장 범인 같지 않은 인물이 범인이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라고 했던가. 밥도 지을 줄 몰랐던 새색시가 어느 날 문득 저녁 찬거리를 손수 장만하면서 알뜰한 주부로 거듭나듯, 나는 도서관에서 열심히 장을 보며 나만의 직감을 발달시켰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불평등의 역사』 리뷰에서도 밝혔듯 읽을만한 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믿을만한 실력을 발휘하는 직감이다.
왜 오늘도 초장부터 되먹지도 않은 직감 이야기를 꺼내 들었는가 하면, 비슷한 이유로 추리 소설에서 범인을 지목하는 직감도 꽤 믿을만하기 때문이다. 세키구치처럼 정신이 흐리멍덩한 독자에겐 이론물리학의 정수 ‘양자역학’을 접하는 것만큼이나 난해하고 아리송하기 그지없는 것이 『무당거미의 이치(絡新婦の理)』지만, 나의 날렵한 두뇌는 꼬일 대로 꼬인 복잡한 사건 구성에서 진짜 범인인 ‘거미’를 단박에, 그것도 초장에 알아봤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순전히 내 직감(친숙한 말로 표현하자면 답을 ‘찍은’ 것?)에 의존한 것이기에 그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한 것에 대한 자질구레한 설명이나 논리적인 과정을 밝힐 수는 없다. 굳이 변명하자면, 신이 내린 명탐정 에노키즈가 타인의 뒤통수 너머로 과거를 보는 신비하면서도 버르장머리 없는 눈으로 진범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으면서도 그가 왜 진범인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고나 할까나?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내가 운이 좋게도 진범을 대뜸 알아맞힐 수 있었던 것은 추리소설을 좀 읽어본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진리, 즉 진짜 범인은 가장 범인 같지 않은 인물이라는 원칙을 충실하게 따른 직감에서 온 것이다. 그에 따라 보통은 평범하거나 나약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존재감 없는 인물이 마지막에 ‘짠~’하고 반전의 팡파르를 올리며 등장하는 진범일 확률이 높다. 교고쿠 나쓰히코(京極 夏言)의 『무당거미의 이치』 는 전체적으로 보면 지금까지 내가 읽어본 추리소설이나 미스터리소설 중에서는 결코 만나보지 못했던, ‘치밀함’이라는 말이 왜소하게 보일 정도로 거미줄처럼 완벽하고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범죄 구성에 ─ 내가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는 처음이라 할 수 있는 ─ 다차원 미스터리를 환상적으로 접목한 실로 놀랍고도 엄청난 소설이다. 읽은 내내 ‘추리 소설도 이렇게 훌륭할 수가 있구나’하는 감탄을 절로 자아내게 한다. 그럼에도 사건의 진짜 범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거미’는 등장인물 중 가장 범인 같지 않은 인물이라는, 기존의 판에 박힌 원칙을 크게 빗겨나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물론 이 아쉬움은 작품의 놀라운 내용에 비하면 깨알처럼 작은 흠이지만, 그래도 굳이 걸고넘어지자면 흠이라면 흠이다.
실로 교묘하고 놀랍고 환상적인 다차원 미스터리
『무당거미의 이치(絡新婦の理)』에서 사건은 크게 두 개의 차원으로 분리된 채, 그러나 미묘하게 병행된 상태로 진행된다. 눈알 살인마 사건과 교살마 사건이 그것이다. 두 사건은 언뜻 보면 별개 사건처럼 듯 보인다. 사실 속을 파 보아도 두 사건의 연관성은 딱히 찾아보기 어렵다. 두 살인마 역시 별개의 인물이며, 살인 동기 역시 제각각이다.
구조는 똑같은데 구성요소가 다르다. 교차하고 있는 것 같은데 괴리되어 있다. 점으로 엇갈리는 것 이외에는 전혀 겹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마 이 두 사건은 같은 뿌리를 갖고 있을 것이다. (『무당거미의 이치(絡新婦の理)』, 中, p452)
이것은 마치 평행우주의 서로 다른 현실에서 같은 사건이, 등장인물과 배경만 약간 바뀐 채 그대로 재현되는 것처럼 보인다(마치 영화 「평행이론: 도플갱어 살인(Coherence, 2013)」에서 벌어진 일처럼?). 두 사건은 거미줄의 나선실처럼 중심으로부터 동심원을 그리며 서로 약간 떨어진 채 존재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거미줄을 친 거미가 유유자적하게 거미줄 사이를 오가며 그물에 걸린 먹이를 여유만만하게 노려보고 있다.
세상을 창조한 신만이 세상의 이치를 통달할 수 있듯, 두 차원의 사건을 창조한 거미만이 그 이치를 알 수 있다. 그러하기에 모든 이가 그물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심지어 세 치의 혀로 세상을 말아먹듯 현혹하는 교고쿠도도 그것이 거미가 친 그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걸려든다.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거미가 친 그물은 견고하고 예상을 뛰어넘으며 완벽할 정도로 치밀하고 조조처럼 교활하기 짝이 없다. 교고쿠도의 주술도 두 차원을 그리며 교묘하게 병행하던 두 사건에 씐 사악한 기운을 떼지는 못한다. 하물며 폭주하는 형사 기바와 모난 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에노키즈 탐정은 무기력하게 거미로부터 부여받은 각자의 역할을 다 할 뿐이다. 무려 15명의 희생자를 낸 이번 사건에서 교고쿠도는 그저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무성영화의 변사 노릇 정도밖에는 못 하고 만 것이다. 물론 그 어떤 변사보다 뛰어난 현학적인 언변을 갖춘 달변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무당거미의 오싹한 아름다움> |
등장인물이 작자(作者)를 지탄할 수는 없다!
어찌 되었든 거미는 추리소설에서 소위 말하는 ‘진범’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거미는 구체적인 범죄 계획에는 일절 가담하지 않았고, 법률에 저촉되는 행위에도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그저 거미는 덫에 걸린 자를 몇 마디의 정보 조작으로 조종하고, 범죄를 저지르도록 유도해서 자멸로 몰아넣을 뿐이다. 그런 거미를 ‘범인’이라고 지목할 수 있을까? 거미가 과연 ‘범인’이기는 한 것일까? 교고쿠도의 주술이 이번에는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은 아닐까? 이 모든 사건을 꾸미고 덫을 놓았다고 하는 거미 같은 것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고, 두 사건은 정말 말 그대로 별개의 사건이었던 것은 아닐까? 두 사건에서 약간의 접합점이 발생했던 것은 억지이자 우연이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어떤 일로 복수심에 불타는 친구에게 화를 좀 식히라면서 시원한 배와 배 껍질을 깎는데 쓸 사시미칼처럼 날카로운 과도를 건네준다. 이때 친구의 원수가 우연히 친구 앞을 지나간다. 나 외에는 이 둘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한 친구는 과도로 원수를 찌른다. 친구가 원수를 찔러 죽인다, 이것이 내가 노린 것이다. 과일 껍질을 과도로 깎으려는 그때 때맞춰 원수가 나타난 것도, 그 자리에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도 모두 우연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하더라도 법적으로 난 아무 잘못이 없다. 나의 음흉한 계획을 모르는 이상 도덕적으로도 날 지탄하기 어렵다.
그래도 이 구성은 거미가 친 그물에 비하면 매우 단순한 구성이다. 거미는 이런 구성을 거미줄처럼 이중, 삼중, 사중으로 쳐놓는다. 거미는 운명의 신처럼 우연도 연출한다. 거미는 사람의 존엄성으로 상징되던 자유의지도 무력화시킨다. ‘무당거미의 이치’가 통하는 차원에서만큼은 거미는 신이나 진배없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듯, 거미는 ‘무당거미의 이치’로만 이해할 수 있는 범죄 비슷한 것을 창조했다. 교고쿠도를 비롯한 인물들은 그저 연극 무대에 올려지는, 혹은 소설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일 따름이다. 이들은 대본 없는 즉흥극에 출연한 배우들처럼 작자(作者) 거미가 연출한 큰 줄기를 빗겨나가지 않으면서, 하지만 무슨 연극인지는 모르고 소설의 제목도 알지 못한 채 시종일관 애드리브로 제 몫을 다한다. 이들은 격류에 휩쓸린 사람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발버둥 치듯 이야기에 휩쓸려 자유의지라고 착각한 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듣기 좋게 말해 노래와 춤이지, 그것은 때론 살인이고 죽음이 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 그 이야기를 쓴 작자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예는 없었다. 이 말은 거미의 계획을 아무도 저지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 그 모습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범죄소설에서 진범이 끝내 법망에 잡히지 않는 경우는 종종 볼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죗값을 치르기 마련인데, 이처럼 진범의 계획이 깔끔하게 마무리될 뿐만 아니라 의젓하게 살아있는 채로 끝나는 당혹스러운 경우는 이번이 참말로 처음인 것 같다.
그렇지만, 진범의 놀라운 수완이 기가 막힐 정도로 흥미롭고 놀라운 다차원의 미스터리로 안내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왠지 밉지는 않다. 어떤 면에서는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소설에 흠뻑 취해 있을 땐 진범의 조종을 받는 괴물이 될지라도 세상을 미련 없이 내던지고 작품 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싶어진다. 교고쿠도도 어찌하지 못하는, 세상을 유린하고 농락하는 뛰어난 지성과 추진력을 갖춘 인물을 주인으로 받드는 것은, 그저 그런 삶을 사는 것보다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치’라는 것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이치는 하나가 아니다. 하나의 사상도 각각 다른 이치로 해석할 수 있다. 반대로 하나의 이치도 다른 사상으로 풀어쓸 수 있다. 자신이 아는 이치 몇 가지로 잘난 척하며 넘겨짚으려다가 망신을 당한 경험은 없는가? 한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지식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듯, 한 사람이 터득할 수 있는 이치에도 한계가 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혼재하는 이치들을 전부 이해하기는 벅찰 뿐만 아니라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한 사람이 터득한 이치만으로 무리하게 세상만사 온갖 일에 들이대면, 세상은 이치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무당거미의 이치’ 역시 세상에 혼재하는 수많은 이치 중 하나다. 죽을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버려져야 할 사람은 버려야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당거미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하니까 인정할 수가 없다. 인정할 수가 없으니까 반발이 생기고 반발이 생기니까 억지로라도 사건에 개입한다. 하지만, 사건에 개입함으로써 거미줄에 걸린 셈이 되고, 거미줄에 걸린 이상 옴짝달싹 못 하게 된다. 결국, 자신이 아는 이치대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된다.
거미줄에 걸려들었으니, 응당 거미줄의 이치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교생활과 군대 생활의 이치가 따로 있듯, 거미줄에 걸린 그들은 ‘무당거미의 이치’에 순응해야 했음에도, 사건에 개입한 이상 어떻게 해서라도 사건을 장악하려는 객기를 부렸으니 응당 그 대가를 치렀다. 그것은 무참히 살해된 15명의 희생자다. 그렇다면, ‘무당거미의 이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거치적거리는 것은 제거해서라도 내 자리를 찾겠다는 의지의 발로인가? 하지만, 교고쿠도의 말을 빌리자면, 그 이치를 발동시킨 거미 그 자신조차 몰랐기 때문에 멈출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교고쿠 나쓰히코 소설 중 최고의 작품으로 남을
오늘까지 읽은 교고쿠 나쓰히코 소설 중 가히 최고의 작품이자,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추리 소설 중 (기억나는 순서대로)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 찬호께이의 『기억나지 않음, 형사』, 류츠신의 『삼체 2』,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와 더불어 최고로 꼽고 싶은 작품인 『무당거미의 이치』는 재밌게도 거미줄의 중심을 둘러싼 동심원처럼 이야기의 끝부분과 시작 부분이 이어지는 구성이다.
上권 첫 장은 만개한 벚꽃 나무 아래서 펼쳐지는 교고쿠도와 거미와의 대화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대화에서 알 듯 모를 듯한 ‘무당거미의 이치’가 설명된다. 처음 읽었을 땐 이 두 사람이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세 권을 다 읽고 나면 누군가를 이해시킬 정도로 도통하지는 못하더라도 ‘아하~’하는 짧은 감탄사 정도는 내뱉을 수 있을 정도로 머리를 순식간에 강타하고 지나가는 뭔가는 느끼기 마련이다. 이쯤 되면 만개한 벚꽃 나무 아래서 펼쳐진 교고쿠도와 거미와의 대화가 매우 의미심장했다는 것을, 다시 눈앞에 펼친 上권을 읽으면서 무한한 감개와 더불어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만개한 벚꽃 나무 아래서 펼쳐진 교고쿠도와 거미와의 대화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이 대화에서 짤막하게 언급된 ‘무당거미의 이치’를 부연 설명하는 부록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대단하고 대범한 소설이다.
어떠한 이치도 내세우지 못한, 쓸데없이 길기만 하고 지루한 리뷰였다. 그래도 여기에 마지막으로 몇 마디 덧붙이자면, 사악한 교고쿠도, 철없는 에노키즈, 험악한 기바, 덧없는 이사마, 못생긴 이마가와, 바보 원숭이 세키구치(이번 사건은 너무 어려워서일까? 이번 편에서는 아쉽게도 마지막에만 잠깐 등장하는) 등 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악의 없는 말장난은 틈틈이 실소를 자아내며 ‘무당거미의 이치’의 난해함으로 말미암은 긴장뿐만 아니라 현실의 삶에 엉겨 붙은 찌든 때도 시원하게 털어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오랜 친구와 농을 주고받는 것처럼 정겹다.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묘한 악담을 주고받는 그들이 정말 부럽다.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비록 세키구치처럼 완전한 바보 취급을 당하고 매 일분일초 구박을 당하더라도 그들의 세계로 뛰어들어 그들과 합세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아무튼,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을 전부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무당거미의 이치』는 그의 최고의 작품으로 남을 것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추리소설을 애독하는 독자라면 응당 경험해야 할 대작 중 하나임을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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