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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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분의 1의 우연 | 공명심을 자극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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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분의 1의 우연 | 마쓰모토 세이초 | 뒤틀린 공명심을 자극하는 잔인한 사회

“카메라 애호가들의 심리도 별나거든. 누구나 「격돌」을 의식하고 있어. 하지만 의식을 해도 도저히 안 되니까 그런 위험한 연출 사진을 찍는 거야. 그런 사진을 당선작으로 뽑아서 신문에 발표해 보라고. 독자는 연출 사진인 줄 모르니까 또 시끄러운 비난이 신문사로 쏟아지겠지. 시운마루 호 사례를 들면서 사진 찍을 시간이 있었으면 왜 사람을 구하러 달려가지 않았느냐 하고 말이야.” (p185)

대가의 또 다른 평작?

『10만 분의 1의 우연(十万分の一の偶然)』을 얼마 전에 리뷰한 소설 『푸른 묘점(蒼い描点)』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마쓰모토 세이초(松本 清張)의 또 다른 소설이라고 간단하게 소개한다면, 아마도 ‘대가의 또 다른 평작’이라고 넘겨짚는 독자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 평작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물며 사회파 미스터리의 시조로 인정받는 대가의 작품이라면 아무리 평작이라도 (『푸른 묘점(蒼い描点)』이 그랬던 것처럼) 독자를 낚아 올릴 수 있는 무언가가 한두 개쯤은 준비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10만 분의 1의 우연』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10만 분의 1의 우연』의 책장을 넘기게 하는가? 『10만 분의 1의 우연』의 무엇이 (작품이 발간되고 나서) 거의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현대인의 이목을 끌 수 있는가?

우리를 경악시키는 잔혹한 동영상들

그것은 『10만 분의 1의 우연(十万分の一の偶然)』이 다루고 있는 문제의식은 문명의 이기가 양산한 병폐 중 하나라는 점에서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그것은 스마트폰의 보급이 일으킨 카메라의 보편화와 인터넷, 그리고 자기현시, 자기표현을 ‘개성’이라고 떠들어대는 대중매체가 결합한다, 그럼으로써 과도하게 공명심을 자극하는 요즘의 풍조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 사람이라면 2018년 4월 30일 광주에서 일어난 집단폭행 사건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유독 이 사건이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사건의 참혹성도 있지만, 그 참혹한 폭행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방송과 인터넷으로 유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영상을 찍은 사람이 겁이 나 싸움을 말리지 못했던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무슨 마음으로 동영상을 찍었을까? 그 동영상이 생생하게 전해준 사건의 잔혹성은 2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청와대 국민청원에 서명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했지만, 동영상을 공유한 사람이 쭉쭉 올라가는 ‘조회수’와 거기에 달릴 ‘댓글’을 의식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해당 사건 피해자의 회복되지 못한 흐릿한 시야에 그 동영상이 언제든지 눈에 띌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피해자를 여러 번 죽이는 셈이다.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지우고 싶은 과거를 반강제로 떠올리게 하는 영원한 고통이다.

한편, 2017년 8월에는 부산 구포시장 대로변에서 도망친 개를 보신탕집 종업원이 수백 미터를 쫓아가 쇠막대기 올가미로 다리를 묶은 채로 대로변에서 질질 끌고 가 도축하는 장면이 동영상으로 유포되어 물의를 일으켰다. 앞서 말한 광주 사건 동영상을 공중파 뉴스를 통해 처음 접했을 땐 ‘너무 참혹하다’라는 생각과 거의 동시에 가해자에 대한 무한한 분노가 나를 휘감았지만, 구포시장 동영상은 ‘왜 아무도 말리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가장 먼저 일어났다. 광주 사건처럼 여러 명의 가해자가 가담한 경우가 아니기에, 동영상을 찍는 사람이 한 번쯤 말릴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질책성 의구심이 들었다. 어쩌면, 동영상을 찍으면서 말리는 말 한두 마디라도 건넬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 동영상을 찍은 사람이 동물 복지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동영상은 개가 최후의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장면까지 흔들림 없이 냉혹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마치 산 제물을 바치는 종교의식을 찍는 광신도처럼 말이다.

생명과 보도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물론 이런 동영상들이 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그냥 묻힐 수도 있었던 사건을 사회에 널리 보도함으로써 관심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생명과 보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처지에 몰렸을 경우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하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라는 골치 아픈, 그러나 딱히 해답은 없는 질문을 다시금 일깨운다. 이 질문은 『10만 분의 1의 우연(十万分の一の偶然)』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기도 하지만, 고성능의 카메라가 장착된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누구나 감독이 될 수 있고,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는 요즘에도 응당 적용되는 질문이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당신이 인적 없는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다. 그때 당신은 바다에 빠진 누군가가 다급하게 구조를 요청하는 외침을 듣는다. 당신은 수영을 어느 정도 할 줄 알지만, 자신의 수영 실력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할 정도의 실력인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 할까? 아니면 이 10만 분의 1의 우연 같은 긴박한 순간을 동영상에 담아 엄청난 ‘조회수’와 ‘댓글’ 잔치를 만끽해야 할까? 상식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인 기준에 비춰보면 사람을 구해야 하는 일이 우선이다. 하지만 그것은 강제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또한 세상은 그렇게 반듯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가다가 무슨 일만 터지면, 타인의 처지는 생각지도 않고 무작정 스마트폰을 들이대고 보는 현대인의 잔인한 공명심이 우리 사회 일부를 병들게 하지만, 스마트폰 기능 중에는 오직 카메라만 있는 것처럼 과대광고하는 상업주의는 이를 더 부추길 뿐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스마트폰 카메라 성능에 열광하는 우리는 나를 전 세계에 알릴 ‘10만 분의 1의 우연’을 학수고대하며 굶주린 하이에나가 먹잇감을 찾아 사바나를 헤매는 것처럼 오늘도 거리를 방황한다.

6명의 목숨을 대가로 얻은 박력 넘치는 사진

마쓰모토 세이초의 『10만 분의 1의 우연(十万分の一の偶然)』에 등장하는 아마추어 사진가 야마가 교스케는 생명이 아니라 보도를 선택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한껏 명성을 얻는 데 성공한다. 그가 찍은 처참한 교통사고 현장 사진에는 6명의 생명을 앗아간 그 참혹함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격돌」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 사진에는 사고 현장에 아직 경찰차도, 구급차도 도착하기 전, 그러니까 곧 죽을 6명의 사람이 아직 살아있는 채로 불타는 차 속에 갇혀 있는, 그런 사고 직후 절체절명의 긴박한 상황을 완벽한 구도로 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시체라는 죽음의 결과물을 직접 보는 것보다 그 죽음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상상하게 하는 무언가를 볼 때, 그 형용하기 어려운 상상 속에서 더 크나큰 공포를 느낀다는 점을 고려하면 6명이 죽음으로 치달리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격돌」은 최상의 공포이자 최상의 충격이다. 이 사진을 <독자 뉴스사진 연간상> 최고상으로 선정한 심사위원장 후루야 구라노스케는 10만 분의 1의 우연으로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했다고 격찬한다. 한마디로 ‘박력’이 넘치는 사진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6명의 생명을 담보로 탄생한 사진이니 충격과 박력이 굉장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격돌」을 보면서 자동차 안에 갇혀 오도카니 죽어가는 피해자를 상상해야만 했을 가족들의 심정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다. 많은 사람이 「격돌」을 보며 사진 찍을 시간이 있으면 한 명이라도 더 구출하는데 애써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분노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물며 「격돌」을 보며 사랑하는 약혼녀가 뜨거운 불 속에 갇혀 죽어가고 있다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 악몽을 쓰디쓴 눈물을 머금으며 밀어내야만 하는 누마이 쇼헤이의 기분은 어떠할까? 더군다나 그 사고가 단지 굉장한 ‘사진’을 찍기 위한 누군가의 연출로 일어난 것이라면?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면? 아마 죽고 싶을 정도로 답답하고 억울할 것이다.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분노와 억울함을 이겨내지 못한 누마이 쇼헤이는 복수를 결심한다.

1 / 100,000 coincidence by Seicho Matsumoto
<‘추리’와 ‘트릭’으로 승부하지 않는 이상한 추리소설>

‘추리’와 ‘트릭’으로 승부하지 않는 추리소설?

어느 독자가 『10만 분의 1의 우연』을 읽어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야마가 교스케가 단 한 장의 박력 넘치는 사진을 위해 일부러 사고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방법이나 사용된 도구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은 굳이 범인을 꼭꼭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마치 대단한 업적이라도 쌓은 양 기고만장하는 야마가 교스케와 정확한 사고 원인을 차근차근 추리해가면서, 한편으로는 침착하게 야마가 교스케에게 접근해 가는 누마이 쇼헤이와의 대비되는 구도가 상당한 흡입력을 발산한다. 전반적으로 격하지 않고 묵직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이 추리소설이 아니라 마치 논픽션을 읽는 것 같다. 한마디로 ─ 이 작품이 추리소설이 맞는다면 ─ ‘추리’와 ‘트릭’으로 승부하지 않는 이상한 추리소설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점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적인 기교와 치밀함으로 무장한 요즘의 추리소설을 상상하면서 이 소설을 선택했다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실망감에 털썩 주저앉다 못해 그만 책장마저 덮는 크나큰 우를 범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시간이 갈수록 야마가 교스케도 누마이 쇼헤이가 자신에게 접근하는 숨은 의도를 짐작하게 되고, 두 사람은 원수가 외나무다리 위에서 만나듯 한밤의 크레인 위에서 단둘이 있을 기회를 얻게 된다. 야마가 교스케에게는 누마의 쇼헤이의 의중을 꿰뚫을 기회이고, 누마이 쇼헤이에게는 야마가 교스케가 사고를 일으키게 한 트릭을 증명할 기회이다. 하지만, 증거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과연 야마가 교스케는 유족 앞에서 순순히 자신의 죄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발뺌할 것인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상대가 자신의 죄를 인정했건 하지 않았건 이미 시작한 복수는 완성해야 했다. 그러나 누마이 쇼헤이의 표정에서는 복수를 성공시켰다는 희열감이나 기쁨, 만족감 같은 것은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패자처럼 맥없이 고개를 숙이며 서글픈 표정을 짓는다. 줄곧 미워해 오던 야마가 교스케처럼 자신도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이 복수에 성공했다는 쾌감을 억누르는 데 성공한 것을까? 아니면 그동안 복수에 정신이 팔려서 미처 깨닫지 못한 한 가지 자명한 사실, 즉 살인자를 죽인다고 해도 이미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복수를 완성하고 나서야 문득 깨달았던 것일까? 아니면 야마가 교스케를 굴복시키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에 실망한 것일까? 이도 아니면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야마가 교스케의 교활함이 회의와 허무감을 불러일으켰을까?

무심코 올린 동영상과 사진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추리소설이지만, 범죄를 뒷받침하는 완벽한 증거는 없다. 완전범죄다. 그리고 범인은 초장부터 명백하게 드러난다. 대형 자동차 사고를 일으킨 트릭도 크게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참으로 미스터리한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쓰모토 세이초 작품에서 미스터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보다는, 온갖 군상이 판을 치는 사회와 접목될 때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10만 분의 1의 우연』은 한 사람이 섣부른 공명심에 휘둘릴 때 일으킬 수 있는 범죄적 요소와 사회가 어떻게 그 공명심을 교묘하게 부추기는지를 통해 현대 문명의 잔인한 일면을 ‘박력’이 넘치는 정도는 아니지만, 긴장감 있게 포착해내고 있다. 하물며 그 섣부른 공명심이 ‘자기표현’의 한 방식이자 한 사람의 ‘개성’이라고까지 당당하게 인정받는 요즘의 세태를 떠올리면 마쓰모토 세이초의 메시지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정말 놀라운 예견이다.

마지막으로 아직도 우리 사회는 보도 사진, 보도 동영상이 가지는 긍정적인 의미, 혹은 자극적인 감상에 너무 쏠린 나머지 피해자와 그 가족을 종종 외면하게 된다. 세상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는 좋은 취지에서 공유한 사진과 동영상일지라도 피해자와 그 가족에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통의 순간을 되새기게 하는, 영원히 반복되는 끔찍한 악몽이나 다름없다. 피해자나 그 가족이 굳이 인터넷을 뒤져가며 그러한 것들을 찾아보지는 않겠지만, 그러한 자료를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피해 본 사고를 담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누군가 재미 삼아 보고 있다는 상상이 이들을 더 고통스럽고 슬프게 한다. 다수의 저속한 오락적 감상을 위해 소수가 지속적으로 고통받아야 하는 것이 옳은가? 한 사람의 자기표현, 공명심을 위해 피해자와 그 가족의 삶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나는 이에 대해 답할 수가 없다. 정확히 말해서 잘 모르겠다. 나도 그런 사진, 동영상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재미 삼아 본 적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10만 분의 1의 우연』을 읽은 한 사람으로서 진지하게, 그리고 건방지게 감히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어 몇 자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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