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부메의 여름 | 교고쿠 나쓰히코 | 짬뽕 같은 추리소설
“원래 이 세상에는 있어야 할 것만 존재하고, 일어나야 할 일만 일어나는 거야.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주 작은 상식이니 경험이니 하는 것의 범주에서 우주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상식에 벗어난 일이나 경험한 적이 없는 사건을 만나면 모두 입을 모아 저것 참 이상하다는 둥, 그것 참 기이하다는 둥 하면서 법석을 떨게 되는 것이지. 자신들의 내력도 성립 과정도 생각한 적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나?” (p23)
추리소설 + 괴기소설 + 범죄소설
‘범죄소설’, ‘괴기소설’, ‘추리소설’ 등 세 장르의 특징을 비빔밥 버무리듯 뒤섞어놓으면서도 결말만큼은 마치 루빅 큐브 완성하듯 아귀가 잘 맞아떨어질 정도로 빈틈없고 논리적인, 뜻을 알 수 없는 제목만큼이나 요상한 소설이다. 사실 지난번 『망량의 상자(もうりょうの匣)』 리뷰에서 현학적인 교고쿠도의 화술에 농락당하다 보면 거북한 그의 논리가 궤변인지 정론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냥 압도당하고 마는, 그래서 독자의 취향에 따라 희비가 엇갈릴 수 있다는 말을 남겼었다. 그런데 인제 보니 그것이 뜻밖에 중독성이 있다. 악의 없는 진실한 꾸짖음이 때론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처럼, 경지에 이른 듯한 교고쿠도의 연설은 누군가에게 설교를 듣는 일이 이렇게도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한마디로 마약 같은 장광설이다. (나처럼?) 교고쿠도에게 늘 바보 취급당하는 세키구치의 깨달음처럼 뭔가 고차원적 사기술에 걸려든 듯한 기분이다. 애초부터 그의 주장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의 장광설, 혹은 공들인 궤변을 넋을 놓고 듣노라면 고개를 힘없이 주억거리며 얼떨결에 수긍하고 말 것이다. 세 치의 혀만으로 대중을 압도한다는 점에서 교고쿠도는 히틀러를 연상시키지만, 과학적 합리성과 논리적 연속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히틀러를 뛰어넘는다. 교고쿠도가 대중 앞에 첫선을 보이는 계기이자 교고쿠 나쓰히코(京極夏言)의 첫 작품이기도 한 『우부메의 여름(姑獲島の夏)』은 첫 활약이니만큼 교고쿠도가 조금은 미숙한 점을 드러낼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도 않다. 첫 작품이지만, ‘논리 덩어리’ 다운 엄밀함과 ‘지식 덩어리’ 다운 현학성이 사이좋은 자매처럼 다정하게 공존하는 매우 보기 드문 추리소설이자 괴기소설이며 범죄소설이다. 한마디로 추리소설처럼 논리적이면서 괴기소설처럼 섬뜩하면서, 그리고 범죄소설처럼 술술 읽히는 그런 요상한 소설이다.
이 세상에는 이상한 일 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
『망량의 상자』처럼 『우부메의 여름』 역시 범인(凡人)들에겐 초자연적인 현상처럼 보이는 괴상한 사건을 교고쿠도의 박학다식함이 시종일관 매끈한 강철판처럼 번득이는 추리로 하나하나 격파해 나간다. 그것은 과학적인 합리주의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논리와 추리만으로 ‘미신’과 ‘저주’로 둘러싸인 기괴한 사건의 마뜩잖은 겉껍질을 벗겨 낸다. 그리고 그 겉껍질을 형성하는 주원료인 편견과 선입관을 하나둘씩 혁파해 가면서 사건의 본질을 조금씩 밝혀내 가는 유쾌한 여정이다. 이것은 흥미롭게도 교고쿠도의 여동생이 편집자로 일하는 희담사가 발간하는 ‘희담월보’의 취지와 일맥상통한다. ‘희담월보’는 동서고금의 기담, 괴이한 사건에 이성의 빛을 쏘여 그 수수께끼를 밝히려는 취지의 잡지인데, 교고쿠 나쓰히코가 쓰는 소설이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작품에서도 과학적으로는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교고쿠도의 말을 빌리자면 ‘민속학’적인 요소들이 대거 등장한다. ‘유령’, ‘저주’, ‘요괴’, ‘종교’ 등이 그러하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이 다루는 한 분야이면서도 여전히 완벽하게 해명되지 않은 요소들도 교고쿠도의 달변 속에 포함된다. 바로 ‘뇌의 기원’과 뇌와 ‘마음’, ‘의식’, ‘기억’을 서로 연결하고 뒷받침하는 복잡한 구조다. 그럼 이런 것들이 단지 교고쿠도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자랑하고자 백화점 진열대에 화려하게 늘어져 있는 상품 같은 요깃거리일 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이 세상에는 있어야 할 것만 존재하고, 일어나야 할 일만 일어난다는, 그래서 이 세상에는 이상한 일 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교고쿠도의 유명한 (아니면 유명해질) 좌우명처럼 미신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논리정연하게 파고들어 현실의 무언가로 끌어내리는 명석함도 교고쿠 나쓰히코의 작품을 읽는 더없는 맛이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단지 지식을 자랑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괴기스럽고 요상한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식견이자 그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로 작용한다. 이것은 교고쿠도의 장광설에서 얼핏 보면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을 것 같은 요소들이 결국에 가서는 클라이맥스를 해결하는 논리적 연결고리이자, 이야기 전개의 개연성을 보장하는 보증인이자, 결말의 정합성을 뒷받침하는 규칙으로 작용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은 이런 분위기?> |
‘서술 트릭’, ‘선입관’, ‘시선 트릭’으로 마술을 부리다!
이 밖에도 몇 가지 염두에 둘 것이 있는데, 『우부메의 여름』에는 독자(혹은 나만의 경우에는)를 감쪽같이 속이는 트릭으로 일종의 ‘서술 트릭’과 ‘선입관’, 그리고 ‘시선 트릭(?)’이 등장한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화자이자 트라우마의 후유증으로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혼란을 겪기도 하는 ‘나’ 세키구치는 프로이트가 심리적 방어기제의 하나로 제시한 데서 비롯된 '선택적 망각' 증상을 보일 뿐만 아니라 선택적으로 사물을 보지 못하는 인지적 착시 현상(정확한 용어는 모르겠다)도 겪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처럼 ‘선입관’으로 똘똘 뭉쳐 있다. 아시다시피 한 사람이 일생을 살아오면서 차곡히 쌓이다 못해 암 덩어리처럼 딱딱하게 굳어지기까지 한 선입관은 쉽게 타파하거나 극복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그가 보는 것과 보지 못한 것, 이해한 것과 이해하지 못한 것,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등이 오롯이 그의 잘못이라거나 능력 부족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작가는 세키구치가 겪는 혼란과 혼동을 역이용해 독자의 시선과 머릿속에서 사건의 진상을 교묘히 감춘다.
마지막으로 ‘시선 트릭’이 있다. 이것은 작품 중 아주 잠깐이지만 매우 중요한 한 장면에서 펼쳐진다(나처럼 이것을 뒤늦게야 깨우친 아둔한 독자는 아마도 페이지를 거슬러 올라가서 이 장면을 다시 한번 읽게 될 것이다). 마치 마술사의 숨겨진 필살기처럼 딱 한 번 발휘되는데, 만약 독자가 이것을 눈치채면 사건의 진상을 단박에 꿰뚫어 보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기에 실로 대범한 수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필살기이니만큼 정교하고 교묘하게 장치되어 있다. 고로 ‘혹시 내가 트릭을 깨면 어떠하나, 그래서 사건의 진상을 일찌감치 파악하는 바람에 책을 읽는 것이 재미없어지면 어쩌지?’ 하는 뜬구름 같은 기대와 쓸데없는 걱정은 일찌감치 접고 안심하고 읽어도 된다. 사실 술술 읽히는 텍스트와 달콤 쌉싸래하게 사람을 빨아들이는 교고쿠도의 장광설, 그리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괴기스러운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트릭’ 같은 것은 잊어버리게 된다. 책을 읽는 ‘나’조차도 잊을 정도다. 하물며 책 읽는 재미를 잃지 않고 독서를 위해 소비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트릭’은 간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 프로이트의 방어기제처럼 선택적 망각의 대상이 되어 ─ 간과해야 제맛이다.
마치면서...
장르소설로써 설명할 수 있는 작품성 같은 것은 둘째치고 교고쿠 나쓰히코의 텍스트가 발휘하는 흡입력이 어느 정도냐 하면, 지난번에 『망량의 상자』를 읽었을 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조차 미처 몰랐을 정도다. 그만큼 며칠 굶은 사람이 개처럼 허겁지겁 밥을 먹는 것처럼 정신없이 읽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부메의 여름』도 마찬가지다. 사정이 이러하니 당연히 작가의 다른 작품도 입맛이 당길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작가의 첫 소설이자 ‘교고쿠도 시리즈’의 첫 발판이어서 그런지 시대적 배경이 명확하게 명시된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면 1952년이 소설의 ‘현재’다. 사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현대의 첨단 과학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과학적 합리성과 논리성을 갖춘, 그래서 약간은 고전틱한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내겐 안성맞춤이다. 이것은 아마도 살아보지 못한 시대에 대한 염치 없는 그리움과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괴기스러운 첨단 문명에 대한 위선적인 혐오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딱히 현대 추리소설을 꺼리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CSI: 마이애미 (CSI: Miami)」보다는 「탐정 몽크(Monk)」를 더 좋아할 뿐만 아니라 앞 드라마는 아직 한 편도 보지 않았지만, ‘몽크’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모든 시즌을 감상했다. 이렇게 뜬금없이 다시 떠올리고 보니 다시 한번 ‘몽크’가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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