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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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요리사들 | 죽음의 싸늘함을 데워주는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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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요리사들 | 후카미도리 노와키 | 죽음의 싸늘함을 데워주는 음식

나중에 얼마만큼 참혹한 사태를 야기하든 전화는 몸서리가 날 만큼 아름답다. 설령 이대로 죽는 한이 있어도 기분 좋게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자신이 느끼는 흥분이 가짜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우리 중 다수가 이미 그 비할 데 없는 공포와 쾌감과 피로에 중독되어 있었다. 망설임도 상실의 고통도 잊을 수 있는 극도의 긴장이 그리웠다. (p422)

추리소설 + 전쟁소설 = ?

묘한 전쟁소설이다. 후카미도리 노와키(深綠野分)의 『전쟁터의 요리사들(戰場のコックたち)』은 사람의 이성이 처참하게 파괴되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수수께끼 같은 사건들을 파헤치는 말단 병사들의 활약에서 무너진 이성의 일부분이나마 복원하려는 듯 논리와 추리를 찾고 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인간성 말살의 증거인 전쟁에서 산발적으로 목격되는 적군과 아군 사이에서 피어나는 드라마 같은 우정이나 인종과 문화,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박애 정신이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듯, 인류가 쥐어짜 낼 수 있는 모든 기술이 총동원된 살육 잔치가 한쪽에서 효율적인 잔인함과 극대화된 파괴성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동안 주인공들은 ‘군인 탐정단’이 되어 아직 건전한 이성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살인 기계로 둔갑한 무지막지한 이성에게 일말의 배신감을 느낀 독자를 안심시키려는 약간은 우울한 위안거리다.

『전쟁터의 요리사들』의 초반부는 전쟁소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진중한 품격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도에 넘치는 유쾌함으로 시작되어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전쟁소설을, 그것도 실제 벌어졌고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던 2차 세계대전을 유쾌하고 가볍게 읽는다는 것이 ─ 내 비록 전쟁 세대가 아닐지라도 ─ 과연 도덕적으로 옳은 일인지 꺼림칙하게 여긴 나는 왠지 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그들을 모욕하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켕기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 금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렀다지만, 인류의 존재와 번영을 위해 그들이 ─ 본의 아니게 ─ 희생되었다고 고집스럽게 생각하는 난 여전히 세계대전 역사를 눈물 없이 읽지 못하는 감수성이 유별나게 예민한 바보인지라, 여타 추리소설 같은 초반의 그 익숙한 느낌이 확실히 호의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전쟁소설은 전쟁소설이었다. 아무래도 초반의 산뜻한 출발은 중반 이후 펼쳐질, 그것도 전쟁소설만이 전해줄 수 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장의 참혹함과 전장에서는 도무지 피할 길이 없어 보이는 인간성 상실이라는 충격이 전해주는 슬픔이 독자의 여린 마음을 짓누를 것에 대비한 작가의 배려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나의 마음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실제 일어난 전쟁을 소재로 한 픽션이나 논픽션을 읽었을 때처럼 이 책 역시 나의 예민하고 풍부한 감수성에 지독히도 쓰라린 흔적을 남겨놓았다.

시체처럼 식은 동료의 몸과 마음을 위로해주는 ‘요리사들’

내 값싼 감수성을 탓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물건 다루듯 일말의 감정 없이 가하는 폭력만큼 잔혹하고 슬픈 것은 없다. 먹보이자 조리병인 주인공 콜처럼 전우를 잃은 상실감이 복수심으로 변주되어 항복해 오는 적을 사살하는 것이 ─ 실제 전쟁에서는 아주 짝에 쓸모없는 ─ 국제법에 위촉되고 누군가에게는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짓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차라리 인간답다. 하지만, 살인마저 고루한 습관이 되고, 그래서 노동자가 공장의 생산설비에서 생산품을 반복 조립하는 지루한 과정처럼 줄지어 선 포로들을 아무런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적을 사살하는 것은, 인간성의 완전한 말살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그래서 기계적으로 산업화한 홀로코스트의 대량 학살이 인류를 그토록 소름 끼치도록 했다.

그렇다고 우리의 주인공들이 그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유명한 노르망디 작전으로 처음 실전에 투입된 주인공 콜과 그의 동료는 전장의 혼란스러움과 여기저기서 동료가 죽어 나가는 참상에 차츰 익숙질 뿐만 아니라 어느덧 고참병이 되고 나서부터는 전쟁터를 그리워할 정도로 전쟁에 중독된다. 전쟁에 중독된 그들에겐 떼죽음을 몰고 오는 전장의 빗발치는 포화가 마치 불꽃놀이처럼 몸서리치도록 아름답다. 그들에게 전쟁터는 도시락으로는 전투식량을 지참하고 놀이기구로는 소총과 수류탄을 소지한 소풍이나 다름없다. 순식간에 육체가 잿더미로 화하고 영혼이 증발하는 전장이라는 이미지가 강압적으로 주입하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도 사람은 뭔가 즐길만한 거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그것은 전쟁에 익숙해지면 전쟁도 하나의 놀이가 되고, 살인에 익숙해지면 살인도 하나의 놀이가 된다는 끔찍한 논리로 귀결된다. 소녀가 품에 안은 곰 인형처럼 할머니의 레시피 공책을 소중히 여겼던 콜이 점점 피에 굶주린 살인마처럼 변해가는 과정은 전쟁에서 인간성을 간직한 채 생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콜을 보고 있노라면, 인류 문화유산 중 하나이자 적대감이 팽배한 분위기를 버터 녹이듯 부드럽고 따뜻하게 녹여주는 매우 훌륭한 수단이기도 한 요리를 책임지는 조리병일지라도 어느 정도의 인간성 붕괴를 겪지 않고서는 대량 살상 무기가 최고의 가치를 발하는 전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움을 실감하게 된다.

특기병임에도 툭하면 무시와 조롱을 받는 조리병들은 동료의 위장만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시체처럼 차갑게 식은 음식을 자주 먹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마음도 시체처럼 차갑게 식어간다. 콜은 동료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음식을 먹여 추위와 죽음에 그을린 그들의 몸과 마음을 녹여보려고 나름 애써보지만, 한 명의 조리병으로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런데도 이처럼 콜이 무던히도 애쓰는 것은 할머니의 가르침을 통해 따뜻한 음식이 의미하는 바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간간이 섭취하는 따뜻한 요리는 죽음이 일상이고, 일상이 죽음인 싸늘한 전쟁터에서 ─ 적군이고 아군이고 간에 ─ 모두에게 가족이 있다는 기억을 무의식적으로나마 되새기게 해준다. 그것은 콜 같은 진득한 ‘전쟁터의 요리사들’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Battlefield cooks
<취사병들이 생각난다>

‘군인 탐정단’으로 비화를 한층 누그러트리는

전쟁소설에 추리소설 양념을 가미한 독특한 소설이다. 조리병 콜과 그의 동료는 굳이 파헤쳐도 되지 않을 일을, 혹은 누군가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도맡아서 짬짬이 탐정 놀이를 즐긴다. 그렇게라도 잠시 머릿속에서 전쟁을 잊고 싶었으리라. 징병 모집 포스터에 등장해도 놀라지 않을법한 훤칠한 외모와 놀라운 장사 수완을 지닌 라이너스가 쓸모없어진 보조 낙하산을 모으는 이유, 하룻밤 사이에 보급품 600상자가 증발한 연유, 어린 두 자녀를 미군에게 남기고 자살한 네덜란드인 부부의 가슴 아픈 사연, 그 누구보다 혈기왕성했던 디에고를 하루아침에 겁쟁이로 만들어버린 유령 소동 등 홈스처럼 냉철하고 명철한 두뇌를 가진 에드와 왓슨처럼 어수룩한 콜이 동료의 도움을 받아 ‘군인 탐정단’을 간간이 이끌어가는 모습은 여지없이 추리소설답다. 그럼에도, 난 이 소설을 굳이 분류하자면, (전쟁추리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지 않는다면) 전쟁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도 썩 괜찮은 전쟁소설로 말이다. 분노와 실망이 뒤범벅된 복잡한 감정으로 눈에 띄지 않는 괴물로 변해가는 콜을 바라보며, 동료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에드를 애도하며, 동고동락했던 전우의 진짜 정체가 밝혀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하루아침에 등을 돌린 비정한 병사들을 힐난하며, 접착제처럼 질기고 강한 우정으로 뭉친 사이일지라도 죽음까지는 붙들어 맬 수는 없는 무정한 전장에서만 벌어지는 비일비재한 죽음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 한 편의 좋은 전쟁소설을 읽었다고 말하고 싶다. 중간마다 눈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땀에 전 끈적끈적한 손등으로 훔치는 바보 같은 나이지만, 오늘 정말로 오래간만에 좋은 전쟁소설을 읽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약간은 거리감을 둔 듯한 시선으로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르게 말해 조금은 가벼운 시선으로 전쟁을 관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누군가에겐 그러한 점이 이 소설을 전쟁소설로 분류할 수 없다고 비판할 수 있는 초석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전장의 참혹함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독자의 정신마저 피폐하게 만드는 전쟁소설이나 논픽션은 꽤 넘쳐난다는 점에서 『전쟁터의 요리사들』은 나름 묘한 매력이 있다. 아마 전쟁을 겪지 않은 비교적 젊은 작가가 쓴 작품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약간 피상적인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시선으로 전쟁을 이해하고 있다는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나름의 묘미가 있는 소설이다. 또한, 세계를 뒤집을만한 반전은 아니지만, 약간의 반전도 준비되어 있으니 추리소설의 맛도 함께 즐길 수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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