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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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파는 남자 | 현실 감각을 마비시키는 언어의 독

O vendedor de passado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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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파는 남자 | 아구아루사 | 현실 감각을 마비시키는 언어의 독

Original Title: O vendedor de passados by José Eduardo Agualusa
잘 생각해보면, 꿈이 있는 것과 꿈을 꾼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나는 꿈을 꾸었다. (『기억을 파는 남자』, p221

학력을 속이는 연예인, 과거를 부정하는 정치인, 과거를 날조하는 역사학자, 과거를 왜곡하는 국가,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과거를 지우고 잊으려는 사람들과 그와 다른 이유에서 과거를 추억하고 기리는 사람들 등 이 모든 작태는 아름답든 추하든 과거는 존재하며 또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삶과 함께 머물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그런데 여기 장터에서 물건 팔듯 과거를 파는 남자가 있으니, 황당하면서도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의 과거가 추하다면 아름다운 것으로, 당신의 과거가 현재 지위나 명예에 걸맞지 않게 초라하다면 고귀하고 전통 있는 내력을 갖춘 명망 있는 일가의 일원으로, 화려하고 주목받는 삶에 싫증 난다면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과거로, 주제 에두아르두 아구아루사(José Eduardo Agualusa)의 소설 『기억을 파는 남자(O vendedor de passados)』에 등장하는 백색증을 앓는 흑인 펠릭스 벤투라는 마치 논문을 대필해 주듯 과거를 팔고 기억을 매매한다.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 「아일랜드(The Island, 2005)」에서 장기 대체용으로 생산되는 복제인간에게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과거를 심어주듯, 펠릭스는 한 사람의 완전한 과거를 재창조해내고 그것을 사들인 사람은 지우고 싶은 과거 위에 기꺼이 새 과거를 덮어씌운다.

하지만, 단지 매매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뀐 과거가 현재의 삶과 그 삶을 살아가는 태도도 변화시킨다는 『기억을 파는 남자』의 테마는 사람이 얼마나 과거에 집착하고 사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떤 토양에 뿌리를 내리느냐에 따라 식물의 발육 정도가 제각각이듯 한 사람의 인성과 현재의 삶은 과거에서 기인하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데, 소설에서 새 과거를 산 사람은 재창조된 과거에서 마치 자신이 실제로 살았던 것처럼 재창조된 과거에 걸맞은 성격으로 서서히 변화해 간다. 이것은 사람은 자신이 맡은 사회적 역할이나 자신이 입은 제복의 영향력으로 언행이나 심리가 변화될 수 있음을 연구해 온 사회심리학자들의 오랜 노력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튼, 그럼으로써 그 사람의 진짜 과거는 묻히고 대신 그 자리에 재창조된 새 과거가 들어선다. 만약 그의 진짜 과거를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헌재 살아가는 그의 삶이 진실한 과거에 기반을 둔 삶인지, 아니면 거짓된 과거에 기반을 둔 삶인지 판단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 사람에 대한 기억 대부분이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는 것으로 유지되듯 설령 한두 사람이 그 사람의 진짜 과거를 안다고 해도 많은 사람이 그 사람의 재창조된 과거를 진짜로 여긴다면 누가 한두 사람의 말을 믿어줄까. 아마도 이때는 그 사람의 진짜 과거를 밝히는 한두 사람의 말이 거짓이 되고 다수가 믿는 재창조된 과거가 진짜가 되는, 진실과 거짓이 자연스럽게 뒤바뀌는 상황을 목격하리라.

O vendedor de passados by José Eduardo Agualusa
<언젠간 기억을 물건처럼 사고파는 날이 올지도..>

철학은 진실을 추구하고 과학은 사실을 추구하지만, 두 학문의 상호간섭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거짓과 진실, 허구와 실재, 꿈과 현실의 경계가 생각만큼 명확하게 딱 그어져 있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때론 우리 자신이 그 경계를 뭉개면서 서로 대치되는 것으로 뒤엉킨 모순적 삶이 가져다주는 환상적이고 아찔한 매혹에 좀비처럼 끌려가게 된다. 『기억을 파는 남자』는 그러한 현실을 사람이 아닌 도마뱀붙이 에울랄리우라의 눈에 비친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吾輩は猫である)』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펠릭스 집에 거주하는 한때 사람이었던 에울랄리우라의 눈과 의식, 전생에 대한 기억, 그리고 꿈으로 그려진 이 소설을 읽노라면 자신의 꿈은 언제나 현실보다 더 생생하고 사실적이라는 도마뱀붙이의 당돌한 의견에 공감하거나, 아니면 묵묵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억을 파는 남자』를 읽는 동안만큼은 거짓과 진실, 허구와 실재, 꿈과 현실을 구분하려는 독자의 인지 감각은 도마뱀붙이가 내뱉는 관조와 사색의 퀴퀴한 향기가 은은히 묻어나오면서도 강아지가 누워 있다가 막 떠난 자리의 따스함이 나른하게 전해져 오는, 도마뱀붙이의 갈라진 혀끝이 부리는 마술적 조합에서 쏟아져 나오는 언어의 독에 자신도 모르게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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