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서검은구록 | 싹수 있는 김용의 첫 작품
싹수 있는 김용의 첫 작품
만약 당신이 김용(金庸)의 최고 인기작이자 대표작인 영웅문 2부(신조협려)와 3부(의천도룡기)를 읽었다면, 1부를 안 보고 배길 재간은 없을 것이다. 같은 사정으로 『비호외전(飛狐外傳)』과 『설산비호(雪山飛狐)』를 봤으니 이 짧은 연대기의 1부 격이라 할 수 있는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또는 청향비)을 안 보고 배길 재간과 배짱과 의지가 내겐 없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까지는 아니더라도 한참 전에 절판된 책이지만, 텍스트로 된 해적판은 구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해적판을 구하지 못했더라면 천추의 한까지는 아니더라도 구각의 한으로는 남았을 것이다. 한편 드라마 「서검은구록(2009)」 감상을 앞두고 있으니 ‘드라마 감상 전 원작 읽기’ 차원에서도 한 번쯤 읽어볼 필요는 있었다.
알다시피 『서검은구록』은 김용의 첫 작품, 즉 처녀작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작품들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게 될 장점들을 꽤 발견할 수 있다. 해박한 지식, 웅장한 전개, 세밀하고 절묘한 무술 묘사, 개성과 특색 넘치는 인물들, 절세미인, 질박한 로맨스, 막힘 없는 필치 등등.
김용의 유명작품들을 이미 읽어본 독자가 『서검은구록』을 읽는다면, ‘아, 이 작가는 초기작부터 대단히 크게 놀았구나!’하는 감탄과 함께 훗날 다른 작품들에 등장하게 될 중요 인물 여럿의 프로토타입을 추리해보는 보너스 게임도 즐길 수 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홍화회의 문태래(文泰來) 구출 작전, 황제가 감금된 육화탑(六和塔)에서의 방어전, 청병의 대군을 치밀한 용병술로 대파한 곽청동(藿靑桐)의 활약, 항주 성 명기들의 화국장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황제와 진가락의 밀담, 수천 마리의 굶주린 이리 떼와의 혈전, 산봉우리 전체가 백옥으로 된 옥봉성의 전설 등 벌어지는 사건들마다 평범한 것이 없다. 시간을 정지시킨 듯한 섬세한 무술 묘사뿐만 아니라 신비롭고 화려하고 기이하고 긴장감 있고 통쾌한 사건들로 독자를 무아지경으로 빠져들게 하는 맛은 처녀작일지라도 예사롭지 않다.
한편으론 평소 미친 듯하고 모자란 듯하면서도 말속에 뼈가 있고 무공이 고강한 아범제(阿凡提)나 기행을 일삼는 원사소(袁士霄)는 주백통과 황약사와 홍칠공을, 미모와 지모를 겸비한 곽청동은 황용을 연상시킨다. 난 김용 팬이기는 하지만, 마니아 정도까지는 아니라서 그런지 지금 당장은 이 정도밖에 생각할 수 없지만, 진정한 김용 마니아라면 이외에도 많은 영웅/악당의 프로토타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 리뷰 |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 2009)」
<드라마 「서검은구록」, 1976년 작품> |
무협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상, 절세미인
김용 작품엔 다른 무협소설에 없는 박학다식함이 꿀처럼 뚝뚝 떨어지고, 작가의 골 깊은 역사관이 날카롭게 심겨 있고, 무공의 오묘함이 제갈량의 지혜처럼 무궁하고, 굴곡에 굴곡을 거듭하는 우주처럼 방대한 이야기로 독자를 압도하고, 이야기만큼이나 통쾌한 필치로 독자의 금쪽같은 시간을 게 눈 감추듯 훔친다고 하더라도 뭇 남성들의 후줄근해진 로맨스를 후끈하게 달아오르게 하는 미모의 여주인공들을 빼놓고 김용 작품을 리뷰한다는 것은 참으로 우울한 일이다. 그만큼 무협소설에서 영웅과 미녀의 관계는 홀쭉이와 뚱뚱이, 오징어와 땅콩, 김밥과 단무지, 주성치와 오맹달 관계라 할 수 있겠다. 무협소설에서 영웅만 있고, 미녀가 없다면 그것은 인세로 돈 벌기를 포기한 것이나 진배없으며 소 없는 만두만큼이나 밋밋하고 재미없고 속상하다.
일단 『서검은구록』에 등장하는 미녀들을 주관적 기준에 따라 순위를 매겨본다면 다음과 같다(참고로 객사려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공을 익혔다).
객사려(喀絲麗) > 곽청동(霍靑桐) > 이원지(李沅芝) > 낙빙(駱氷) > 주기(周綺)
향향공주(香香公主)라고도 불리는 객사려의 미모는 선녀급(혹은 그 이상?)이다. 오죽하면 한국어 번역판의 제목을 향향공주의 이름을 따서 청향비(淸香妃)로 지었을까. 그녀의 미모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죽고 죽이는 전쟁 중인 군인들조차 그녀를 보자마자 살기등등한 기세가 입가심한 듯 싹 가시는 바람에 싸울 생각을 잃어버릴 정도다. 여기에 심성은 천진난만하기 그지없고, 그녀의 몸에서는 담박하면서도 우아하고 맑으면서도 그윽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달콤한 향기가 난다. 주검이 묻혀있던 흙에서조차 맑고 향기가 날 정도이니 선녀가 따로 없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향기에 취하고 미모에 취하다 보니 어지러워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존재가 향향공주다. 아마 김용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미모에서만큼은 가장 뛰어난 여주인공이지 않을까 싶다(『천룡팔부』의 왕어언(王語嫣)보다 한 수 위다).
그런 만큼 드라마 「서검은구록」에선 어떤 배우가 향향공주 역을 맡을까 하는 기대감과 필치로만 묘사할 수 있는 그런 절세 미녀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두둥실 마음속을 휘젓고 다닌다. 내 생각엔 청초한 미모를 자랑하는 유역비(劉亦菲, 그녀는 드라마 「천룡팔부, 2003」에서 왕어언 역을 맡았다) 정도는 돼야 향향공주 역을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걱정이 들면서도 중국엔 사람이 많은 만큼 미인들도 많으니 한 번 기대해볼 만하다.
황용(黄蓉) 캐릭터에서 장난기만 살짝 제거된 듯한 곽청동 역시 기대할만한 배역이고, 때론 이야기 속으로 성큼 뛰어 들어가 냅다 쥐어패고 싶어질 정도로 (진짜로 마주친다면 그 반대로 내가 냅다 얻어터지겠지만) 짓궂은 악동 캐릭터인 이원지 역시 기대해봄 직하다. 대화의 문맥이나 상황에 상관없이 킥 웃는 활발한 도적 낙빙과 괄괄한 주기 역시 팽팽한 긴장감을 해소해주는 단비 같은 존재들이다.
물론 드라마 각색에 따라 이 다섯 여주인공 중 한두 명은 제외될 수는 있겠지만, 가능하면 모두 다 한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 에로한 몽상의 소재가 바닥난 뭇 남정네들의 애련한 사정이다.
드라마 감상을 앞둔 지금 이런 미모의 여주인공들 때문에 살짝 흥분되기도 하지만, 옥으로 된 산, 수천 마리의 이리 떼 등 2009년 중국의 드라마 제작 기술로 연출하기 어려운 부분도 꽤 있어 걱정되기도 한다. 드라마 「설산비호(雪山飛狐, 2007)」에서 본 성의 없는 세트와 마리오네트처럼 실이 치렁치렁 보이는 와이어액션을 또다시 봐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중국 드라마의 귀여운 특색이라 생각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 무엇보다 무협 드라마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술 액션이니만큼 소설 『서검은구록』의 무술 장면 중 가장 압권이라 할 수 있는 홍화회 총타주 진가락(陳家洛)과 극 중의 악당 중 최고수이자 무당파의 배신자 장소중(張召重)의 마지막 대결을 어떻게 연출할지가 관건이다.
왜냐하면, 이때 진가락의 무술은 그냥 되는대로 치고받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피리 소리에 맞춰 춤을 추듯 펼쳐지기 때문이다. 성룡의 취권을 연상하면 이해하기 쉽지만, 요즘 배우 중 이 정도의 무술 연기를 온전하게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전무후무하다는 점에서 감독이나 배우에게나 모두 난관이지 않을 수가 없다.
<드라마 「서검은구록」, 2009년 작품> |
홍화회와 건륭 황제, 그리고 진가락과 향향공주
『비호외전』을 이미 읽은 독자라면, 시기적으로 바로 전 이야기인 『서검은구록』에서 묘인봉(苗人鳳)과 호일도(胡一刀)의 대활약을 기대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사실 나도 두 사람이 진가락만큼은 아니더라도 조반산, 문태래 등의 홍화회 두령급 정도의 영웅으로 등장할 줄 예상했다. 하지만, 유명하다는 미래학자의 예상들도 보기 좋게 빗나가는 마당에 나의 예상이라 오죽하냐. 아쉽게 두 사람은 지나가는 말투로도 등장하지 않는다. 『서검은구록』은 홍화회와 건륭(乾隆) 황제, 그리고 진가락과 향향공주의 이야기이다.
『서검은구록』은 문태래 구출 작전, 홍화회와 홍화회 총타주 진가락의 한실 광복에 대한 염원, 건륭(乾隆) 황제와 진가락의 밀담, 청나라와 위구르족과의 전투 등이 골자를 이룬다. 하지만, 『비호외전』 바로 전 시기의 이야기이니만큼 연결성은 다분하다. 예를 들면, 건륭 황제 납치 사건, 복강안(福康安)이 1년 동안 홍화회 인질이 된 사연, 진가락과 향향공주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홍화회 총타를 북경에서 위구르(회강)로 옮긴 사연, 홍화회 영웅호걸들이 옹화궁(雍和宮)에 불을 질러 자금성(紫禁城)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 등 『비호외전』에서 스치듯 언급되는 과거사는 『서검은구록』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고로 나처럼 『비호외전』을 읽고 『서검은구록』을 읽기보다는 그 반대로 읽는 것을 추천한다.
김용의 무협소설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역사에서 이야기를 파생시킨다는 점인데, 처녀작인 『서검은구록』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소설가들이 정사보다 야사를 좋아하고 사실보다 전설을 좋아하듯 소설 『서검은구록』에서 건륭 황제는 한족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가상 인물인 진가락의 친형으로 설정되어 있다. 두 사람은 한실 광복이라는 대업을 두고 밀담을 나누기도 한다. 애석하게도 건륭은 향향공주를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되는데, 이로써 진가락이 한실 광복이라는 대업을 위해 사랑을 버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잔혹한 무대가 냉철하게 완성된다.
순결한 가슴에 비수를 푹 꽂는 듯한 이런 잔인한 로맨스는 『비호외전』의 주인공이자 진가락의 후배 격인 호비도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지만, 진가락의 동료들은 우여곡절 끝에 자기 짝을 찾는 데 반해 진가락은 이별도 아닌 석별도 아닌 사별의 쓰디쓴 고배를 마신다. 특히 향향공주의 죽음에 관해 논한다면 그 책임 절반은 진가락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천룡팔부의) 소봉과 아주의 비극을 다시 보는 것 같아 위장이 연마기로 갈리는 것처럼 속이 쓰리고 아프다.
작가가 젊은 시절에 쓴 작품이라 그런지 피눈물 나는 비극적인 로맨스를 시원하게 잘도 써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일까? 아마 난 손과 간이 부들부들 떨려 못 쓸 것 같다.
마치면서...
요즘처럼 몸이 불편하고 말을 잘 듣지 않아 뭔가에 집중하기 어려울 땐 무협소설만큼 신나고 재미난 것은 없다. 태블릿이 있으면 누워서 편하게 읽거나 TTS를 사용해 들을 수 있으니 방치형 게임을 보는 것처럼 편하게 시간을 보내며 잠시나마 약해빠진 몸을 저주하고 또 저주하는 한시름에서 벗어날 수 있다. 특히 홍화회 영웅들이 비겁하고 교활한 악당들을 호탕하게 무찌르는 장면에 이르면 책 읽는 것을 잠시 중단하고 제다이가 된 내가 광선검을 번쩍번쩍 휘두르며 용산의 무뢰배들을 무 썰 듯 무찌르는, 말은 안 되지만 통쾌하기는 그지없는 공상에 빠져들기도 한다. 무릇 남자라면 호비나 진가락 같은 영웅적인 기개를 호랑이처럼 포효하며 의협을 떨치는 공상에 젖기 마련이지만, 세상은 이다지도 비루하기 그지없으니 몇몇 영웅들은 기개를 꺾고 은거할 수밖에 없고, 이로 말미암아 교활한 자들이 득세하니 참으로 세상 살맛 안 난다.
법은 별처럼 멀고 주먹은 눈꺼풀만큼이나 가까웠던 시대에 암중비약하는 강호의 고독한 고수가 되어 악덕 지주와 부패한 관리들을 일망타진하면서 의를 세우고 악을 처벌하는 유치하지만 감질나는 상상이 뜬구름처럼 흩어지는 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오늘의 잡글 같은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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