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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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비호외전(飛狐外傳) | 김용(金庸)

비호외전(飛狐外傳) | 김용 | 드라마 감상에 앞서 원작 읽기!

책 리뷰 | 소설 비호외전(飛狐外傳) | 김용(金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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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감상에 앞서 원작을 찾은 여유

운이 좋게도 「비호외전(飛狐外傳, 2022)」이라는 중국 무협 드라마를 입수했는데, 알고 보니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金庸) 선생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드라마다. (‘비호외전’처럼) 소설을 원작으로 한 모든 드라마에 적용해야 할 만큼 대단하거나 독특한 취향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김용 선생의 원작을 기반으로 제작된 드라마만큼은 원작을 먼저 읽고 드라마를 나중에 봐야 여러모로 제맛이다.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 주요 사건의 인과 관계, 그리고 등장인물 간의 대립 및 우호 관계를 포함한 강호의 인맥 지도 등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으면 드라마를 감상할 때 ‘대사’나 ‘사건’보다 (중국 사극 특유의) ‘영상미’‘나 ’볼거리‘나 ’액션‘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도 하고, 생략 • 축약 • 변조 • 추가 등의 각색 작업이 맥락을 싹둑 끊어먹었을 때 초래하게 되는 ‘어색한 전개’ 같은 혼란을 방지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가지각색의 성격과 이러저러한 인생 내력을 지닌 개성 만점의 주인공들을 (특히 무협 소설에 빠질 수도 없고 빠져서도 안 되는 경국지색의 미모를 뽐내는 여주인공들을) 어떤 배우들이 어떻게 연기했나 하는 품평하는 재미가 있다.

강권하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말한 변변찮은 이유로) 김용 작품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만큼은 감상하기에 앞서 기회가 된다면 원작 소설을 읽기를 추천하고, 이번에도 그러한 방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성실한 의지에서, 그리고 마침 읽을 책도 없고 해서 소설 『비호외전』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참고로 '비호외전'은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 → 신조협려(神雕俠侶)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등 세계관을 공유하는 영웅문 3부작처럼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 → 비호외전 → 설산비호(雪山飛狐)‘로 구성된 작품의 중간 부분으로써 (아마도 위소보의 손자들이 거들먹거리고 있을) 청나라 건륭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 관계를 미리 알았더라면 ‘서검은구록’을 먼저 읽었을 것도 같은데, 리뷰를 쓰는 지금에서야 알았으니 하는 수 없다.

책 리뷰 | 소설 비호외전(飛狐外傳) | 김용(金庸)
<『비호외전』이 읽고 싶다면, 20만 원만 있으면 된다!>

우리 시대의 잃어버린 미덕, 협행과 의협심

또우반(豆瓣)에서 ‘飛狐外傳’으로 검색하면 (이번에 입수한) 2022년도 작품이 유일해 보인다. 1991년에 제작한 ‘설산비호(雪山飞狐)’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또우반에 소개된 줄거리를 보면 한 권 분량 정도의 ‘설산비호’와 다섯 권 정도 분량의 ‘비호외전’을 합쳐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소오강호’, ‘영웅문’ 시리즈가 꾸준히 재판되는 것과는 달리 『비호외전』 한국어 번역판은 절판 상태다.

이런 점만 놓고 보면 ‘비호외전’은 ‘영웅문’ 시리즈처럼 잊을만하면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되는 유명 작품은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읽어보면 대충 답이 나온다.

일단 ‘청소년들에게 의협심(義俠心)을 심어주고 건전한 기풍을 진작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심정’이라는 작가의 집필 의도에서 알 수 있듯 『비호외전』은 대협(大俠) 호비(胡斐)의 협행(俠行)을 묘사한 작품이다. 협행이란 것이 무엇인가? 관리와 결탁해 약한 자를 핍박하거나 자신의 힘만 믿고 나쁜 짓을 일삼는 자를 미진한 법과 겁약한 사회를 대신해 응징하거나 징벌하는 의로운 행위를 말한다. 도덕 불감증이 당연시되고 교활한 처세술이 출세의 발판으로 인정받는 요즘에 무협소설이 찬양하는 ‘협행’과 ‘의협심’은 응당 미덕이라 불릴 만하다. 하지만, 수많은 전통과 구시대의 관습이 그러하듯 그것들은 되살릴 수 없는 잃어버린 미덕이기도 하다.

호비는 불산진의 으뜸가는 부자인 봉천남(鳳天南)과 아무런 원한이 없음에도 그가 저지른 사악한 행위에 매우 분개하여 복수를 다짐한다. 권세에 짓눌려 목숨마저 부지하지 못하는 타인의 불행을 단지 참을 수 없다는 이유로 목숨 걸고 협행을 행하는 호비야말로 진짜 대장부이고, 그런 일이야말로 얼마 전에 일어난, (2022년 카타르 월드컵 3차 예선전) 한국과 포르투갈 경기에서 추가시간에 벌어진 황희찬의 역전 골만큼이나 통쾌한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멀어도 너무나 멀다. 타인의 불행을 보고 어제오늘의 평안에 안도하거나 남몰래 기뻐하는 야비한 사람은 비일비재할지라도 호비처럼 타인의 불행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어떻게든 해보려는 사람은 찾아보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그랬다가는 좋은 소리 듣기도 어렵다. 자칫 잘못하다간 쇠고랑 찰 수도 있다.

호비의 협행에 탄복하는 감흥만으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식량 • 에너지 문제, 일본의 재무장, 북한의 핵 위협, 고조되는 대만-중국의 전쟁 위기, 이제는 웃을 수도 없는 한국 대통령 부부의 한심한 작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신의 문제 등 안하무인 격으로 나를 못살게 구는 세상만사를 잠시라도 잊기엔 뭔가가 조금 부족하다.

드라마 비호외전(飛狐外傳, 2022) | 원작보다 재밌다?

이루어지지 못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다음은 영웅적인 주인공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가 너무나도 참담하게 끝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호비는 김용 작품의 여타 주인공처럼 염복이 없어도 너무 없다.

호비는 두 명의 여자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한 명은 총명함과 기지는 황용(黄蓉)에 버금가지만 외모는 드라마 「설중한도행: 왕의 길(2021)」의 강니 같은 말라깽이에 그저 그런 얼굴인 정영소(程靈素)와 또 다른 한 명은 아리땁고 매력적이면서도 짓궂고 괴팍한 원자의(袁紫衣)다. 호비의 마음은 두 여자 중 첫 번째로 인연이 맺어지는 원자의에게 향하지만, 원자의는 호비의 일을 대놓고 방해하거나 대립하는 등 시종일관 어중간한 태도를 보인다. 정영소는 범접할 수 없는 호기가 넘쳐흐르고 성격이 곧바르고 시원시원한 호비를 사모하지만, 이미 원자의에게 마음을 뺏긴 호비에게 정영소는 그저 얌전하고 지혜로운 누이동생일 뿐이다.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는 깨어질 듯 부서질 듯 아슬아슬하게 진행되면서 독자의 마음을 잔뜩 졸이다가 마침내 서로의 진정한 마음을 드러내 보일 때쯤엔 (지금까지 읽은 김용 작품에 등장한 남 • 여주인공들이 우여곡절 끝에 결국엔 연인 사이로 맺어졌던 흐뭇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서) 어떻게든 결실을, 그것도 무지개처럼 찬란하고 저녁노을처럼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내가 원하는 결말은 (내가 그러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혹은 모든 남자가 꿈꾸는 판타지처럼) 다소곳한 정영소와 괄괄한 원자의라는 서로 상극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독특한 맛이 있는 두 사람을 모두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다. 『녹정기』의 위소보는 무공이 보잘것없는데도 오직 잔꾀와 교활한 술수만으로 무려 일곱 명의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무공도 고강하고 인품도 손색없는 호비 같은 영웅이 두 명의 아내를 둔다고 해서 흠 될 일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남성적 섹스 판타지에 기반한 경망스러운 기대는 무참히 깨진다. 히로시마 상공에 거대한 버섯구름이 솟아오른 것처럼 풍비박산 나버린다. 여기에 호비가 어린 시절 상가보에서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선뜻 연민의 은혜를 베푼 마춘화(馬春花)의 불행한 사랑 이야기까지 보태면 『비호외전』에서의 사랑 이야기는 야심한 시간 창밖을 후드득후드득 두드리는 빗줄기처럼 이루 말할 수 없는 처량함과 서글픔을 마음 한구석에 상감하듯 아로새겨주는 것이 울적함과 곤혹감을 달랠 길 없게 만든다.

모두 다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그 모두는 그녀가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또한 그녀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두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했지만, 한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고, 또 다른 한 여자는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몰래 짝사랑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 세상만사에서 도리를 따져 말할 수 없는 것 중에 으뜸이 사랑과 정이라고 했다면, 최소한 『비호외전』에서만큼 그 말은 절대적이다. 참으로 야속하고도 야멸치다.

책 리뷰 | 소설 비호외전(飛狐外傳) | 김용(金庸)
<드라마 「비호외전(2022)」의 한 장면, 두 사람은 누굴까?>

그래도 명불허전은 명불허전이다!

하지만, 이러한 감상평은 올해 역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또 자책하는 내게 벼랑 끝처럼 다가오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을 판결을 기다리는 피고인처럼 속절없고 허망하게 맞이해야 할 운명에 처한 작금의 우울한 기분 때문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인협(仁俠)'이라는 두 글자를 반드시 지키려는 호비의 굳센 기상이 뼈에 사무치도록 부럽기 때문이다. 부귀공명 따위는 개똥 쳐다보듯 하고 남에게 빌붙지 않아도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는 호방한 삶을 지켜나갈 수 있는 호비의 능력이 질투 나기 때문이다. 재능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한 개인이 가진 모든 능력을 기지개를 켜듯 힘차게 선보일 수 있는 그런 유아적인 유토피아를 꿈꾸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김용 작품(소오강호, 영웅문, 녹정기, 천룡팔부)에 견주어보면 강호의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은원 관계보다 단순 명확한 ‘협행’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비호외전』은 웅대한 규모 면에서, 그리고 이야기의 곡절이나 깊이 등이 다소 부족해 보인다. 주인공 호비의 사랑 이야기가 끝내 꽃을 피우지 못하고 한 편의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뜬금없다. 그러나 역시 명불허전은 명불허전이다.

젊은이의 의미심장한 미소 속에 숨은 포부처럼 간략한 필체에 숨겨진 천금 같은 서사와 천금 같은 액션은 역시나 읽는 사람의 금쪽같은 시간을 감쪽같이 훔쳐내는 것이 김용의 여타 작품처럼 재밌기는 매한가지다. 특히 묵직한 도법과 날렵한 검법의 대비와 맞대결을 정교하면서도 시원시원하게 묘사한 것이 역시 무협소설 대가의 작품답다.

무협소설의 주인공처럼 천하를 주유하며 민생을 괴롭히는 정치인들이나 얼굴에 낀 개기름처럼 악덕과 탐욕이 번지르르한 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면서 경국지색의 여인들과 풍류를 나눌 수 있다면, 그렇게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면 이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일인가? 정녕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한(恨)과도 같은 사실을 마음속 심연 같은 곳에 송골송골 맺히도록 모자람 없이 인지하고 있기에 우리는 그런 탈선적인 욕구를 심하게 느낄 때마다 누군가를 몽둥이로 후려치는 대신 무협소설을 찾는다. 아, 이 얼마나 건전한 취미이고, 이 얼마나 선량하면서도 서민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인가!

사대부들은 한서(漢書)를 안주로 삼고, 백성들은 통쾌한 무용담을 안주로 삼으면서 잠시나마 세상의 시름을 잊고 고달픈 세상살이를 멀리할 수 있었다. 우리라고 별수 있나? 세상이 통쾌하게 끝장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은원 관계처럼 맺어진 무협소설과의 끈질긴 인연을 끝장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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