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의 섬 | 오노 후유미 | 미신의 실체를 감질나게 풀어가는 재미
오랜만의 외도
한눈팔지 않고 모리 히로시(森博嗣)의 S & M(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를 한국에 소개된 순서대로 죽 읽고 있었을 때, 외도로 만난 책이다.
읽지 않은 S & M 시리즈가 남아 있음에도 뜬금없이 오노 후유미(小野不由美)의 『흑사의 섬(黒祠の島)』을 선택한 것에는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간에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작용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S & M 시리즈를 독파해 갈수록 뭔가 내리막길을 걷는 듯한, 그래서 내 기대치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은 개인적인 아쉬움과 이제는 기분전환 삼아 한두 권 정도는 다른 작가의 소설을 읽어볼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있을 법한 변덕이다. 그렇다고 마지막 편까지 몇 권 남지 않은 S & M 시리즈를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한 작가의 소설만 내리읽다 보니 조금 질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고, 이런 질림이 S & M 시리즈를 읽는 재미를 방해하거나 훼방 놓는 걸림돌이 되는 것 같은 이유 있는 우려에서 잠시 외도를 결행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계속해서 먹으면 그 맛의 진가를 느끼기 어렵고, 꿀처럼 단 과자를 먹고 나서 과일을 먹으면 과일의 당도가 제아무리 높더라도 단맛을 제대로 음미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최근에 읽은 S & M 시리즈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점도 떠올려볼 수 있다. 너무 한 우물만 파다 보니 온통 신경이 그 우물 안에 갇혀 버린 것일까. 그래서 독서 감각이 잠시 마비된 것일지도 모른다. 우물을 파던 손짓도 멈추고 연장도 내려놓은 채 잠시 물속에 잠긴 하얀 두 발을 내려본다. 앙상한 내 발을 감싼 우물 표면에 비친 하늘은 어딘가에 있을 다른 세상, 다른 소설, 다른 작가를 영영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묻는 것 같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내 발걸음은 모리 히로시 소설이 가지런히 진열된 책장을 뒤로한 채 새로운 뭔가를 찾아 나서고 있었다. 넓지 않은 도서관 안을 주책없이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책들을 눈알을 굴리며 훑어보고 있을 때, 내 눈에 띈 것이 바로 오노 후유미의 『흑사의 섬』이다.
<영화「야사(夜叉, 1985)」의 촬영 장소, 후쿠이현 미카타군 미하마초 히나타> (출처: 佐渡の四季+α) |
작가와의 첫 대면은 첫사랑 같은 설렘과 풋풋함이
그녀의 이름을 보는 것도, 그녀의 작품을 읽는 것도 처음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당연히 그녀가 주로 어떤 장르의 소설을 쓰는 어떤 작가인지도 전혀 모른다(알고 보니 『십이국기(十二國記)』라는 유명한 판타지 소설의 작가였다). 전혀 모르기 때문에 A4 복사 용지 같은 깨끗한 상태로 편견과 사심 없이 그녀의 소설을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과연 어떤 이야기가 어떤 상상의 나래로 끌고 들어갈지 하는 기대감이 무척이나 나를 설레게 한다. 이때의 기대감은 한 번 이상 접해본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을 읽기 전 과는 사뭇 다르다. 맞선 자리로 나아가는 발걸음처럼 기대 반 우려 반 섞인 초조함 같은 것이 살짝 묻어있는 것이 묘하게 사람을 긴장시킨다.
오노 후유미라는 작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뒤표지에 적힌 본격 미스터리라는 설명과 작가의 동기생으로 아비코 다케마루, 아야츠지 유키토, 노리즈키 린타로 등이 있다는 설명에 혹했다면 혹했다. 특히 이 중에서 아야츠지 유키토의 작품 몇 개는 흐릿하게나마 기억에 남아 있을 정도로 괜찮은 작가라는 느낌이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기에 오노 후유미의 책도 한번 읽어보자 하는 동기를 유발하는데 가장 큰 선전 효과가 되었다. 그 외에도 아비코 다케마루의 경우는 작품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대출 목록을 검색해 보니 『살육에 이르는 병』과 『미륵의 손바닥』을 읽었다. 노리즈키 린타로의 경우도 대출 목록을 검색해 보니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한 권이 있었다. 하지만, 아야츠지 유키토의 경우는 『키리고에 저택 살인사건』, 『인형관의 살인』, 『십각관의 살인사건』, 『어나더』 , 『살인방정식』 등 총 다섯 권이나 된다.
한두 권에서 끝난 경우는 이제 더는 그 작가의 작품은 읽어볼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지만, 그 이상 읽었다는 것은 최근에 내가 『모든 것이 F가 된다』를 읽고 나서 모리 히로시의 S & M 시리즈를 독파해야겠다고 다짐한 경우처럼 그 작가의 작품에서 ‘재미’와 더불어 읽어볼 만한 ‘가치’를 발견했다는 뜻이다.
그런고로 아야츠지 유키토의 동기생(옮긴이의 해설을 읽고 안 사실이라면 두 사람이 부부란다. 작가 부부, 그것도 추리소설 작가 부부라니 참으로 부러운 사람들이다)이라니 약간은 혹할 수밖에 없었고(이래서 학연이 무서운 것이다!), 딱히 다른 대안도 없어서 선뜻 『흑사의 섬』을 책장에서 꺼내 들 수 있었다.
외딴섬을 지배하는 미신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몇 자 적는다는 것이 무료하게 길어지면서 결국 서두가 아닌 서두가 되어버렸지만, 나름의 스포일러 없는 추리소설 리뷰를 써보자는 기치 아래 능력에도 못 미치는 긴 글을 쓰려다 보니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뭐, 그렇다고 걱정해야 할 것도 없다. 누구 눈치 볼 필요도 없고, 글을 쓰며 뭔가 대가를 받는 것도 아니니까. 뭔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지향하는 나로서도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 혹은 이쯤 되었으면 이제 내 리뷰를 읽는 우주 공간 속의 산소만큼이나 귀한 독자는 어느 정도 내 성향을 파악했으리라는 속 편한 지레짐작이 나를 뻔뻔하게 만들기도 했겠지만 말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편하지만,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 쓸쓸하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서두를 주절거리며 질질 끌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리라.
인제야 『흑사의 섬』에 대해 몇 마디 늘어놓아 볼까 한다. 일단 이 책을 읽으면 연상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요괴 장광설의 달인 교고쿠도(교고쿠 나쓰히코의 백귀야행 시리즈의 등장인물)다. 『흑사의 섬』을 읽다 보면 신체, 신상, 신주, 그리고 귀신이 한 마을에 정착하여 신으로 받들어지거나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괴기한 것에 요괴 이름을 지어주는 등 교고쿠도 시리즈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전혀 낯설지 않은 (민속학지에서나 마주칠법한) 단어나 민화 같은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교고쿠도도 강조했듯 무언가가 요괴화되는 과정이나 그 원인을 밝히는 것만큼이나 그렇게 완성된 요괴 이야기가 그 지역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떤 식으로 이해되는지도 중요한 것처럼 『흑사의 섬』에서 일어난 참혹한 살인사건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섬사람들이 마두야차의 존재를 마음속으로까지 믿든 안 믿든 간에) 마두야차가 섬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과 존재감을 올바로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섬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은 그저 미신을 광신하는 한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연쇄살인 정도로 결론 내기 십상이다.
그런 고로 책장을 펼치자마자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무턱대고 미신이니 흑사(黑祠: 이단의 신을 받드는 것)니 하고 냉소를 터트려버린다면 사건에 얽힌 내막과 그 내막에 껌처럼 들러붙은 미신의 실체를 감질나게 풀어가는 이 책의 묘미를 (작가가 의도한 대로) 고스란히 체험하기는 어렵다. 미신이든 신화든 전설이든 개의치 않고 마두야차의 존재와 그 존재의 힘을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일단 믿어라. 믿는 자에게 복은 아니지만 ‘재미’는 있을 것이다.
문명 세계 밖 정의 구현, 미신
지금이야 『흑사의 섬』 같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마두야차나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미신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그것은 (책에서처럼) 국가의 성문법도 가볍게 뛰어넘는 절대적인 불문법이었다. 그것은 국가의 녹을 받는 나리가 와도 어찌하기 어려운 관습이나 전통 이상의 무엇이었고, 설령 국가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와도 그 지역과 반목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겉으로나마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무엇이었다.
어떤 유전자가 대대손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 그 유전자를 보유한 개체의 번식이나 생존에 어떠한 이득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면, 미신이라 불리는 것이 과학의 시대에 접어들기 전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미신을 따르는 개체나 집단에 뭔가 이득을 주었기 때문이다. 문화 유전자인 밈(Meme) 같은 존재로서 말이다. 그렇다면 마두야차는 ‘그것의 존재와 힘을 믿는 섬사람들에게 어떠한 이득을 주었을까?’ 하는 질문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름도 무시무시한 야차도(夜叉島)에서 벌어진 살인사건들을 도시에 사는 편협하면서도 냉혹한 시선으로 본다면 그저 정신 나간 미치광이의 짓일 뿐이다. 하지만, 섬사람들도 그렇게 믿을까? 외부인이 볼 때 그들은 섬에서 일어난 모든 살인사건을 대놓고 덮어두려고만 하는 어리석고 고집 센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섬사람들에게 비자연적인 죽음은 마두야차가 내린 응징이자 형벌이다. 즉, 죽은 사람은 죽을만한 죄를 저질렀기에 마두야차가 내린 단죄에 희생된 것이다. 섬사람들에게 마두야차는 국가의 행정력이나 사법권이 미치지 못하는 곳의 질서와 정의를 나름의 편법으로 바로 세워주는 장치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미신은 법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 즉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벽지나 외딴섬에서 흥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연유로 섬사람들에게 살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살인이 아니라 신이 내린 단죄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정의가 이루어진 셈이니 굳이 범죄네 살인사건네 법석을 떨면서 파헤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외부인의 처지에선 완전히 그 반대다. (이미 죽은 살인자들은 둘째치고) 마지막 살인자가 살아 있는 이상 누군가가 누구를 죽였다는 명백한 범죄가 성립된다. 그 최후의 살인자는 섬사람들에게는 마두야차라는 입에도 올리기 꺼리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지만, 외부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살인자일 뿐이다. 하지만, 소설은 섬사람들에게만 정의를 내려주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물론 섬사람들이 말하는 정의는 외부 사람이 보기에는 부당하고 시대착오적인 미신일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정의로운 것이 누군가에게는 부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보편적인 정의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는 이상주의가 낳은 망상임을 은유한다.
소설의 결과가 편협한 것일까? 아니면 소설은 미신에 지배당하는 야차도나 법전에 찍힌 문자들만 평등을 외치고 실제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법칙에 지배당하는 국가의 사법제도나 매한가지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일까?
<영화 「디몬 폰드(夜叉ヶ池, 1979)」의 한 장면(출처: PINTSCOPE)> |
마치면서...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 해서 나쁜 책이라고 판단할 수 없듯 내가 재미없다고 해서 정말로 재미없는 책이라고 할 수도 없다.
내가 굳이 이런 밑밥을 깔아두는 이유는 『흑사의 섬』은 ‘본격 미스터리 • 본격 추리소설’이라고 말하기에는 약간은 내 기대에 못 미치는 추리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트릭의 의외성과 논리성은 인정하지만, 그 추리 과정이 독자로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미지의 문턱(여기선 작가만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넘어서야만 완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는 정직하지 못하다. 특히 초 • 중반까지도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 낼 수 있는 이런저런 단서가 전무후무하다 보니 ‘작가 + 범인 vs 주인공 + 독자’의 대결 구도가 확실하게 경계를 짓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범인이 누구인가를 추리하고 싶다는 욕구가 죽은 나무처럼 시들시들한 남자의 그것처럼 제대로 서지 않는다. 한마디로 작가가 마지막 패를 보여주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진실에 근접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특히 모리 히로시의 소설처럼 한 범죄 사건을 두고 여러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는 ‘가설 세우기 공장’은 폐업 상태라 할 수 있어 독자의 상상과 사고의 확장을 애초에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고로 단서를 토대로 범인을 추리해가는 재미보다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재미 위주로 감상하면 그런대로 볼만한 작품이다. 그런 면에서는 교고쿠 나쓰히코의 교고쿠도 시리즈와 비슷하다고 할까나? 물론 교고쿠도처럼 독자의 머리를 혼란하게 하는 장광설이나 독자를 세뇌시키는 현학적인 유혹은 다행히도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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