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년 봄의 제사 | 루추차 | 이제 미스터리도 ‘원플러스원’으로 승부?
어느덧 우리 눈에 띄게 된 중국 추리소설
개혁 • 개방 시기 전까지만 해도 상업성과 오락성이 짙은 추리소설은 사회주의에 반하는 껄끄러운 존재였으니 출판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경제성장으로 다소 느슨해진 문화, 예술 정책으로 그동안 기를 펴지 못했던 작가들의 재능이 봇물 터지듯 폭발하기 시작했다.
사정이 이렇듯 중국 추리소설 작가들이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고, 그런 만큼 우리에게 중국 추리소설은 아직은 낯설다. 누군가가 괜찮은 추리소설을 추천해 달라고 조른다면 널리 알려진 일본 작가의 작품을 추천하는 것이 욕먹을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트릭의 구성과 그 트릭을 풀어나가는 재미가 쏠쏠한 일본 추리소설 작가의 작품을 자주 읽는 편이다. 한국에 번역된 추리소설 작품들의 수도 일본 작가의 작품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인구만 놓고 따져보면 중국 추리소설 작가들이 훨씬 많을 것 같지만, 출판사로서는 검증된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수익 면에서는 유리할 것이고, 전문 번역가들도 일본어를 전공한 사람이 더 많은 것으로 추측된다. 독자나, 출판사나 중국 추리소설은 여전히 도전이다.
그러나 아이(阿乙), 차이쥔(蔡駿), 쯔진천(紫金陳), 찬호께이(陳浩基) 등등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중국 추리소설 작가들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옌롄커(閻連科), 한사오궁(韩少功), 츠쯔젠(遲子建) 등 순문학 작가들의 작품들을 몇 권 읽어 본 나로서는 중국 고전문학이 가진 옛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즉, 이제는 몇 권 정도일지라도 중국 추리소설을 읽지 아니한 독자는 진정한 추리소설 마니아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경제 분야에서 중국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내는 동안 중국 문단 역시 부단히 정진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무녀 오릉규는 이런 인상일까?(사진 출처: 바이두)> |
첫 숟갈에 배부를 수 있을쏘냐
그렇다면 오늘 소개하는 루추차(陸秋槎)의 『원년 봄의 제사(元年春之祭)』는 앞에서 잠깐 언급한 쯔진천이나 찬호께이의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작품인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직은 글쎄올시다’이다.
‘아직은’이라고 말한 것은 ─ 단 한 번이라도 엘러리 퀸 작품을 즐겁게 읽은 독자라면 너무나도 반가운 이벤트인 ─ ‘독자에의 도전’이라는 선전적인 문구가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트릭 구성은 훌륭하고, 웬만한 집념과 지식 없이는 손대기 어려운 2,100여 년 전의 중국을 무대로 작품을 구상한 점은 높이 살만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입체적이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성향이 짙은 등장인물들의 모호한 성격이 이야기 흐름과는 엇박자로 노닐며 이야기 전개를 훼방 놓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트릭의 구성은 감탄할만하지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윤활유 교체 시기가 지난 엔진처럼 부드럽지 못하다. 많이 배우지 못해 뭐라 똑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구성이 약간 산만하다고나 할까나? 좋게 말하면 원석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작품이라고 할까나? 만화 캐릭터 같은 인물들에게 좀 더 현실성을 부여하고, 현학적인 담론으로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도 좋지만, 추리소설이니만큼 트릭을 풀어나가는 과정에 좀 더 신경 썼다면 분명 더 완성도 높은 추리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본격 추리소설이라면 무엇보다 트릭이 맛깔스럽게, 그리고 목에 걸리는 것 없이 시원하게 넘어가야 한다고 고집하는 나로서는 『원년 봄의 제사』는 루추차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소설이다. 왜냐하면, 독자가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하게 만드는 정정당당한 트릭을 구사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미스터리 패턴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나라 시대가 배경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뭔가 다른 추리소설을 찾는 독자를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그런 점에서 『원년 봄의 제사』의 다음 시리즈가 사뭇 기대된다.
이제 미스터리도 ‘원플러스원’ 시대
독자는 ─ 소설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현재(BC 100)를 기준으로 ─ 4년 전에 일어난 관약영 일가족 살해사건의 범인을 정확하게 추려낼 수 있어야만 ‘현재’에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도 풀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만만치 않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뒤따른 추리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매우 완고한 구조다. 하지만, 그런 점을 고려해서인지 작가는 관약영 일가족 살해사건만큼은 비교적 쉽게 풀어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참으로 친절한 작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4년 전 사건의 범인을 정확하게 추리해냈다고 해서 이후 모든 트릭이 실타래 풀리듯 저절로 풀리는 것은 아니므로 만만하게 봤다간 큰코다친다. 이쯤에서 힌트를 주자면, 『원년 봄의 제사』의 현재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을 추리해낼 수 있는 핵심 단서는 바로 트라우마에 있다는 것(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미스터리가 물증보다는 심증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받아들이고도 남는다)!
4년 전 사건과 현재의 사건은 전혀 별개의 사건일 수도 있고 그래서 범인도 다를 수 있지만, 작가는 4년 전 사건을 일으킨 범인에게 현재 진행되는 사건을 추리하는 독자를 혼란케 하는 모종의 역할을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독자의 추리는 4년 전 사건의 진범을 찾아내는 데서 끝나서는 아니 되고, 더 나아가 4년 전 사건의 진범이 그 사건으로부터 얻은 심적 고통까지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신뢰할 수 없는 목격자 증언’이라는 최대의 난관을 돌파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신뢰할 수 없는 목격자 증언’이라는 것이 함정이라면 함정일 수도 있고, 나도 처음엔 그 점 때문에 패배를 인정하기 싫었지만, 앞장을 다시 들춰보면서 역시 내 생각이 미치지 못했음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작가는 얄밉게도 독자 스스로가 이 트라우마를 밝혀낼 수 있도록 충분한 단서를 곳곳에 심어놓았다. 다만, 사막에서 바늘 찾을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배경 속에서 뭔가를 발견해낼 수 있을 정도의 관찰력과 사소한 것들을 집약하여 유의미한 것을 추려낼 수 있는 통찰력, 그리고 ─ 추리소설이니만큼 당연히 ─ 약간의 상상력은 필요하다. 이런 점이 갖춰진 독자라면 좋은 승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 건방짐 하는 무녀 오릉규와 열등감에 찌든 관노신이 BC 100년에 겪은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을 독자가 추리해낼 수 있는 모든 단서는 빠짐없이 소설 속에 들어 있다. 남은 문제는 ‘동기’다. 재밌게도 『원년 봄의 제사』는 다른 추리소설에서는 부차적으로 처리되곤 하는 범행 동기마저도 독자 스스로 유추해낼 수 있도록 곳곳에 단서를 치밀하게 준비해놨다. 물론 동기까지 맞추기는 쉽진 않지만, 진범을 정확하게 추리한 독자라면 그리 어려울 것 같지도 않다. 한마디로 『원년 봄의 제사』에는 범인 맞추기, 동기 맞추기 등 두 개의 미스터리로 구성된, 그래서 두 개의 ‘독자에의 도전’이 준비된 격이니 어떻게 보면 ─ 마트에서 흔히 보는 이벤트 상품처럼 ─ ‘1+1’ 미스터리다. 사정이 이러하니 놓치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원플러스원은 중국에도(사진 출처: 바이두)> |
어찌 되었든, 다시 한번 흩어보게 하는 소설
작가와의 대결에서 비록 참패를 면치 못했더라도 돌이켜보면 ‘아하, 그랬었구나’하고 감탄을 절로 일으키게 할 정도로 트릭의 완성도는 일본 추리소설과 비교해서 전혀 꿀리지 않는다. 책을 다 읽고 난 독자가 설마설마하며 다시 앞장을 흩어보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독자의 호기심을 끝까지 놔주지 않는다는 것이니 추리소설로서는 좋은 본보기다. 한 글자 한 글자 새겨듣지 않고 그냥 흘겨 넘긴 나의 무심함에 땅을 치고 통곡하고 싶을 정도다. 한편으론 성큼성큼 나아가는 듯한 속도감 있는 전개로 뇌수를 빨아먹듯 이야기에 홀딱 빠지게 한 작가가 원망스럽다. 그뿐만 아니라 성격 파탄자 같은 17살 무녀를 탐정으로 내세웠다는 점, 그리고 그녀의 짝으로 견원지간과도 같은 아둔한 소녀를 붙였다는 점, 그리고 이 두 사람이 푸릇푸릇한 10대의 소녀라는 점은 어디에서도 구경하기 어려운 색다른 구성이다.
다소 아쉬운 점은 그 청순함만으로도 남자를 홀딱 반하게 하고도 남을 나이인 10대 소녀들이 이야기의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하고 있음에도 외모 묘사는 ─ 머리가 길다는 것 정도를 제외하고는 ─ 전혀 없다는 것이다(아니면 내가 간과했을 수도). 그래서 앞서 등장인물들이 어딘지 모르게 입체적이지 못하다고 말했다. 루추차는 외모 묘사에 자신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것 또한 미스터리로 남겨 독자의 궁금증을 폭발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물론 전부 다 어여쁜 미소녀들일 것이라고 상상은 가지만 말이다.
오릉규는 관노신을 대놓고 바보라고 꾸짖으며 가르치려 들기만 하고, 관노신은 매번 오릉규 앞에서 핀잔을 맞는다. 읽어 보면 알겠지만, 사정은 이보다 더 심각하다.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가 아옹다옹하는 것 같다. 그런데도 관노신은 오릉규와는 끝끝내 결별하지 못한다. 이 두 사람의 위태로운 관계는 친구들에게 늘 바보 원숭이 취급받는 세키구치와 그런 세키구치를 위로하기는커녕 독설로 세키구치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서슴없이 짓밟는 교고쿠도(두 사람은 교고쿠 나쓰히코(京極 夏彦)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를 보는 것 같다. 오릉규의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방자하기까지 한 장광설 역시 교고쿠도를 연상시킨다. 교고쿠도는 요괴 박사라면 오릉규는 제사(祭祀) 박사라고 할까나? 물론 오릉규의 장광설은 그 품질이나 격에서 아직 교고쿠도에게는 한참 못 미치지만 말이다. 이런 점은 일본 추리소설 작가를 좋아하는, 그리고 일본에 거주하기도 하는 루추차가 일본 추리소설에서 받은 영향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자면, 성숙하다고 말하기엔 어딘지 모르게 유치한 문장과 등장인물들의 단순한 성격(아니면 10대 소녀들이라서 일부러?)이 전체적으로 격을 떨어트리지만, 두 개(범인, 동기)의 ‘독자에의 도전’이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다는 점과 이 두 트릭의 패턴이 지금까지 접해본 여타 추리소설 작가들이 구사했던 패턴과는 어딘지 모르게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추리소설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10대 소녀의 당연한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 변덕스러움을 맘껏 뽐내면서도 그 와중에 재기발랄한 기질을 한껏 드러내려는 소녀들의 당찬 태도에 홀리는 독자가 더 많을 것으로 예상한다. 이런 점 때문에 영화로 제작된다면 매우 유쾌하면서도 흐뭇한 영상이 만들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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