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8

드라마 천룡팔부(2013) | 개정판의 심상치 않은 변화를 엿보다

천룡팔부(天龍八部, 2013) | 개정판의 심상치 않은 변화를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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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룡팔부(天龍八部, 2013) | 개정판의 심상치 않은 변화를 엿보다

천룡팔부(天龍八部, 2013) | 개정판의 심상치 않은 변화를 엿보다
<강민 역을 맡은 장비안(张馨予)>

「천룡팔부(天龍八部)」 2003년 드라마에서 왕어언(王語嫣)을 연기한 류이페이(刘亦菲)의 바람에 산들거리는 풀잎 같은 하늘하늘한 자태와 그 풀잎 위에 맺힌 이슬 같은 청순한 미모가 남긴 동틀녘 호수면 같은 잔잔한 정취가 마음속에서 채 사라지기 전에 2013년 작품을 보고 말았다. 순리대로 라면 원작의 줄거리조차 떠올리기 어렵고, 주인공들 이름만 머릿속에서 가물가물할 때 봐야 제격이지만, 가뜩이나 부족한 하드디스크 공간을 방구석에서 빈둥대는 백수처럼 하릴없이 차지하는 있는 꼴을 차마 봐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치를 거스르는 한편으론 시간과 수고를 들여 다운 받아놓은 만큼 한번은 봐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까지 곁들여 한 편 한 편 감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남은 밥이 아까워 물 말아 먹는 기분이랄까?

천룡팔부(天龍八部, 2013) | 개정판의 심상치 않은 변화를 엿보다
<완어언 역을 맡은 장멩(张檬)>

사정이 이러하니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둘 다 김용의 같은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한 드라마이니만큼 내용이 거의 똑같을 것이 뻔하다는 사실은 같은 이름의 라면이 맛도 같을 것이라는 경험만큼이나 확실했다. 다만, 어떤 배우가 어떤 배역을 맡았는지 하는 캐스팅에 대한 품평 정도만이 심드렁함 속의 호기심을 약간 자극할 뿐이다.

소봉 역을 맡은 종한량(钟汉良)의 첫인상이 좀도둑 같다, 왕어언 역을 맡은 장멩(张檬)의 미모가 영 마뜩잖다, ─ 2003년 작품에선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 목완청 역을 맡은 자오위안위안(赵圆瑗)은 예쁘다기보다는 듬직하게 잘생겼다 등등 이런 불만 같지 않은 불만들이 첫 편 재생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것들은 몇 편을 감상하면서 원작 소설과 조금씩 다른 점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옴에 따라 간질환자의 경련처럼 갑작스럽게 일어난 호기심에 묻혀버렸다. 전체적인 줄기가 다르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고, 보는 이에 따라선 소소한 차이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각본을 맡은 사람이 특별히 각색에 신경 쓴 것은 아닌가 하는 감탄이 들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것은 순전히 나의 무지에서 비롯한 오해였다. 「천룡팔부(天龍八部)」 2013년 드라마는 ─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텍스트 본이기도 한 1963년 소설 ─ 원본 일부를 수정한 2005년 개정판을 각색하여 만든 드라마였다.

천룡팔부(天龍八部, 2013) | 개정판의 심상치 않은 변화를 엿보다
<아주 아자 역을 맡은 자칭(贾青)>

고로 나처럼 개정판(한국어로는 2020년 5월에 출판)을 읽지 않은 사람은 오십 원 동전 무더기에 가물에 콩 나듯 드문드문 있는 백 원 동전 같은 원본과 개정판의 차이점들을 구분해내는 재미를 논할 수 있는 셈이다.

마 부인 강민을 음모가로 활약하게 한 점은 그녀가 죽는 시점까지 드라마 감상의 큰 흡입력을 발산하는 놓칠 수 없는 재미다. 그 이후론 쌍둥이로 개작된 아주 • 아자 역을 맡은 자칭(贾青)의 얄미운 연기 변신이 아주 볼만하다. 왕어언에 대한 모용복의 감정이 초기작보다 더 진실해지고 풍부해졌으며, 더 세밀하게 묘사된 모용복의 최후는 그가 이인자로서 살아오면서 느꼈을 법한 울분과 비애를 한층 더 사무치게 만든다. 말년의 모용복을 보고 있노라면 인생무상의 공허한 진리와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이외에도 초기작과 개정판의 차이가 꽤 있으니 개정판 소설을 보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꿩 대신 닭이라고 2013년 드라마로 어느 정도는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천룡팔부(天龍八部, 2013) | 개정판의 심상치 않은 변화를 엿보다
<소봉의 종한량(钟汉良), 허죽의 한동(韩栋), 단예의 진치판(金起范)>

드라마든 영화든 「천룡팔부(天龍八部)」를 영상으로 옮긴 모든 미디어가 피해갈 수 없는 것이 김용의 모든 작품 중 최고 미녀라고 일컬어지는 왕어언 역할을 맡은 배우에 대한 품평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2013년 작품의 왕어언 역을 맡은 장멩의 미모는 2003년 작품에서 왕어언 역을 맡은 류이페이와는 차이가 좀 난다(중국 여성 스타 순위도 각각 247위, 38위로 차이가 크다).

처음엔 그런 외적인 차이가 크게 느껴질 수 있으나, 시간이 약이라도 차이가 누그러질 만큼 회차를 감상하게 되면 장멩 나름의 매력이 보인다. 그것은 바로 근심이 어린 듯한 살짝 찌푸린 표정이다. 모용복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게 되는 왕어언은 웃는 표정보다는 근심스러운 표정을 더 많이 짓는데, 그래서 그런 것일까? 미소보다는 근심 짓는 표정이 더 매력적인 장멩을 왕어언 역할로 캐스팅한 이유가.

장멩의 살짝 찡그린 얼굴에서 이상야릇한 황홀함을 발견했을 때야 비로소 나는 고대 중국 4대 미녀 중 한 사람인 서시(西施)의 찌푸린 표정이 남자의 영혼을 탈탈 털어 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고사를 믿게 되었다!

단예가 육맥신검을 펼칠 때마다 영화 스타워즈를 통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레이저총 소리를 오랜만에 듣게 되고, 드래곤볼의 무공술과 다름없는 경공술에 넋을 잃고, 손짓만으로 멀리 떨어진 물건을 움직이는 초능력에 감탄하는 등 김용 작품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주인공들을 무술을 연마한 무인(武人)이라기보다는 마블 코믹스에 등장하는 히어로 정도로 오인할 것 같다. 무협 액션이 산을 넘어 바다로 가는 듯해 가관이다. 배우와 스태프들의 발품과 경비를 줄이려고 그랬는지 천혜의 정경을 외면한 채 CG와 세트로 배경을 얼렁뚱땅 처리한 것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 그래도 자칭(贾青)의 생기발랄한 악녀 연기와 미소보다는 근심 어린 표정이 더 매력적인 장멩(张檬) 때문에 끝까지 볼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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